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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갔고 듀게에는 아직도 조풍曺風이 한창인 것 같네요. 이제 바야흐로 짧은 가을이 지나고, 또 긴 겨울이 오겠지요. <체실 비치에서>는 그 가을에 잘 어울리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보면서 어쩐지 <어톤먼트>와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원작이 둘 다 이언 매큐언의 작품이었군요. 분위기 있는 시대극인 점도, 잔잔하고 섬세한 남녀의 이야기인 것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의 정서도 비슷합니다.

저야 사실 무심해 빠진 성격이어서 그런지, 오래 전 <어톤먼트>를 보고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음. 그래서 이게 무슨 얘기지..? 저 여동생 뇬을 능지처참해야 하나! 였던 기억입니다(...) 한 편으로는 제 인식의 레이더 속에선 거의 감지되지 않는 섬세한 심리와 관계성에 관한 이야기가, 소설이 되고 또 영화가 된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어요세월의 힘을 입은 덕인지, <어톤먼트>를 경험한 후 보게 된 <체실 비치에서>는 좀 더 가까이 공감할 수 있었던 작품 같습니다. 이들에게는 음악이 함께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영화의 도입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쌍의 남녀가 해변을 걸어오며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어떤 곡에 관한 대화입니다.


 

: 이제 E.

: 으뜸음(the tonic).

: 아니, E코드라고.

: 알았어, E.

: 그렇게 네 마디 가고.. 당신도 잘 알지? “아침에 깼더니 머리가 깨질 듯해-”, 그 다음에 A.

: 버금딸림화음(the sub-dominant).

: “아침에 깼더니 머리가 깨질 듯해-” 똑같이 가고 코드만 다르게.

: 복잡해.

: 그리고 다시 E.

: “아침에 깼더니 머리가 깨질 듯해-”

: 여기서 회심의 한 방! B까지 쭉 올라가.

: , 딸림화음(the dominant).

...

 

같은 화음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이 짧은 대화를 통해, 우리는 남녀에 관해 어느 정도의 정보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음악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장르는 다르다. 남자는 코드 진행으로, 여자는 화성학 관점으로 화음을 이해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그녀는 속으로 ‘B코드로 가봤자 뻔하게 주요3화음인데 뭐가 회심의 한 방이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코드는 주로 대중음악의 개념이고 화성학은 클래식의 개념이므로, 남자는 대중음악을 좋아하고 여자는 클래식을 들을 것이다. 선입견일 수 있지만, 좋아하는 장르를 통해 남녀 각자의 문화적 배경을 유추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60년대의 영국, 여자는 중산층 이상의 교양 있는 집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많다. 반대로 남자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많다.

 

이렇게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은 한 쌍은, 막 결혼을 하고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와 있습니다. 역사학을 공부한 남자와 바이올리니스트인 여자의 첫날 밤 이야기로, 하루가 흘러가는 동안의 미묘한 삐걱거림 속에서 종종 그들의 아름다웠던 연애 시절은 회상됩니다.

이들의 결혼 첫날은 결국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둘은 분명 서로 사랑했지만 아직 어렸고, 서툴렀고, 나름대로 배려한 행동들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서투른 부부는 화해하지 못했고, 그 날로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원작 소설을 못 읽어 봤는데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해요.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실 할 줄 몰라서가 아니었을지... 어느 책 제목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의 순간을 우리는 늘 맞닥뜨리며 살게 되니까요. 그 때 했더라면,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알았더라면, 차라리 몰랐더라면..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운명의 수레바퀴는 삐걱, 하고 돌아가게 됩니다.

 

현명하고 착하지만 보수적인 아가씨, 플로렌스를 야무지게 연기하는 시얼샤 로넌이 참 예뻤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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