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딱히 스포일러는 없습니다만. 2019년에 1984년 가족(??) 오락 영화를 보면서 '스포일러'운운하는 게 의미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ㅋㅋ



 - 다들 아시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35년이나 된 영화이고 하니 간단히 스토리 얘길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어딘가의 촌동네가 배경입니다. 세상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발명품을 그마저도 넘나 조악한 퀄리티로 만들어서 여기저기 팔러 다니던 아저씨가 오리엔탈리즘 향이 폭발하는 차이나타운 잡화점에 들어갔다가 '모과이'라고 불리는 귀여운 동물을 훔치듯 구입해 옵니다. 근데 이 동물에겐 주의 사항 3종 셋트가 붙어 있죠. 물을 묻히지 말고, 자정이 넘으면 음식을 먹이지 말 것이며 절대로 햇빛에 노출시키지 말래요. 이 아저씨는 이 희귀 동물에게 '기즈모'라는 이름을 붙여서 동네 은행에 다니면서 옆자리 예쁜 직원과 썸타고 있는 아들래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안겨주고 아들은 당연히 주의 사항을 하나씩 어김으로써 이야기를 전개 시키기 시작합니다...



 - 시대별로, 세대별로 '이거 안 봤으면 간첩'이 되는 영화들이 여럿 있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이 '그렘린'은 제 세대의 그런 영화들 중 하나였습니다. 극장에서 그렇게까지 큰 흥행을 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 유명세는 어마어마했죠. 아마도 이야기의 실질적 주인공 격인 '기즈모'의 귀여움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고, 또 절대로 어기면 안 된다는 '세 가지 금기'가 당시 국딩(...)들의 마음에 매력적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


 저는 못 봤습니다. 전 오늘 처음 봤어요. ㅋㅋ 왜냐면 저희 부모님께서 저를 극장에 자주 데려가주시는 편이 아니었기도 하고, 또 집에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어서 나중에 비디오로 빌려 볼 수도 없었거든요. 사실 비디오가 있긴 있었죠. 어느 날 아버지께서 히죽히죽 웃으시며 자랑스럽게 들고 들어오셨던 그 비디오. 대우(!)에 다니는 친구가 최신 제품인데 기존 비디오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좋은 거라면서 싸게 팔아줬다고 뿌듯해하며 가져오셨던 그 비디오는 무려 베타 맥스 방식이었거든요. (못 알아들으셔도 당황 마세요. 정상이십니다. 제 또래들 중 상당수도 그 때나 지금이나 이런 물건의 존재 자체를 몰라요.) 그래서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릴 수 있는 영화가 없었고, 덕택에 저는 영화가 보고 싶어서 열살 때부터 혼자 극장에 다니고, 주말의 영화와 명화극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재미 없는 영화가 해도 무조건 보고야 마는 집념의 어린이가 되었습니다.

 ...와 같은 쓸 데 없는 이야기는 이만하구요.



 - 일단 보면서 좀 놀랐던 건 이게 지금 봐도 지루할 틈 없이 상당히 재밌는 영화라는 거였는데... 그거야 뭐 감독 조 단테와 제작 스필버그의 이름빨과 시리즈의 네임 밸류를 생각하면 당연한 걸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놀라운 건 이 영화의 잔혹함이었습니다. 아니 뭐 요즘 기준으로 엄청 잔인하고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가족 영화 겸 청소년(이라기엔 주인공은 성인입니다만 어쨌든 내용적으로!) 모험 영화의 탈을 쓴 영화 치고는 좀 많이 어두침침하고 폭력이 살벌한 편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게 유머가 아주 많은 영화인데 사람들이 죽거나 크게 다치는 장면들에도 여전히 유머가 흘러가고 있어요. 이런 걸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하는 가족 영화라고 생각하며 자식들에게 보여주던 부모들은 아마 좀 많이 놀라지 않았을까 싶네요. ㅋㅋㅋ 아마 그래서 당시에 감독 조 단테에게 '악동' 칭호가 붙고 그랬겠죠. 



 - 그리고 각본가 크리스 컬럼버스의 스타일이 굉장히 많이 드러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배경이고 고전 영화들 인용이 쉴 새 없이 튀어나오며 괴짜 취급 받는 주인공이 하룻밤 동안 벌이는 환타스틱 모험담이면서 이야기 톤에 비해 상당히 튀는 폭력 장면들이 많이 나오다가 마지막엔 코믹하고 훈훈한 가족 영화 같은 결말을 보여주죠. '나홀로 집에'나 '솔드 아웃' 같은 영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셜록 홈즈 영화 각본을 쓰면서도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해야 직성이 풀렸던 크리스마스 덕후 크리스찡...



 - 특수 효과가 많이 들어간 80년대 영화를 참으로 오랜만에 봤는데요. 그러다보니 영화에 쓰인 아날로그 특수 효과들이 참 반가웠습니다. 근데 그냥 반갑기만 한 게 아니라, 의외로 되게 훌륭하더라구요. 굉장히 많은 그렘린들이 한 번에 등장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스톱모션 티가 팍팍 나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냥 자연스럽구요. 특히 얘네들 표정 짓는 걸 화면 가득 클로즈업해서 보여줄 때는 정말 여러번 감탄했습니다. 이제 cg로 못 하는 게 없어져서 크리쳐 표현에 있어서 아날로그 특수효과만의 장점 같은 건 없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오산이었더라구요. 오히려 요즘 블럭버스터에 나오는 몬스터들보다 훨씬 실재감이 느껴지는 장면이 많았습니다. 아니 뭐 실재하는 물건이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시면 뭐라 할 말은 없겠습니다만(...)



 - 암튼 '옛날 영화니까 이만큼 봐주고 시작하지' 같은 배려(?) 없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봐도 충분히 재밌는 영화였습니다. 물론 그 시절에 대한 추억 같은 게 있는 사람들에게 더 재밌기는 하겠지만 그냥 영화 자체가 훌륭해요. 예전 영화들에서 흔히 보이는 (요즘에 비해) 느릿느릿한 느낌도 없고 지나치게 건전하거나 순한 맛이라는 느낌도 없고 그냥 재밌습니다. 중반의 몇몇 장면은 정말 괜찮은 호러이기도 하고요. 또 장면장면이 되게 신경 많이 쓴 티가 나는 디테일과 소소한 아이디어들로 가득해서 지루하지 않습니다.

 제목만 익히 들어보고 아직 안 보신 분이라면 한 번 시도해보실만 해요. 사실 저도 하루 종일 무슨 일 하다가 밥 먹을 때 잠깐 틀어봤는데 보다가 사정상 중간에 끊은 게 아까워서 밤에 애들 재우자마자 다시 달려서 한 번에 끝냈네요. 허허.




 - 그 시절의 피비 케이츠는 지금 봐도 정말 인형처럼 흠잡을 데 없이 예쁘더군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경악스런 장면이 이 배우 캐릭터의 장면이었는데... 기억하십니까. 여주인공이 크리스마스를 싫어하게 된 이유요. 그 이야기를 어린 나이에 극장에서 접했을 이 땅의 '당시 국딩'들에게 애도를... ㅋㅋㅋㅋ



 - 80년대 헐리웃 호러 & 코미디 영화에서 그런 걸 신경 썼을 리는 없겠지만 의외로 여성 캐릭터의 활약이 강조되는 영화입니다. 사실 임팩트로 따지면 여자들 쪽이 훨씬 세요. 아빠는 영화 내내 다른 데서 헤매다가 이야기 끝날 때야 등장하고 주인공은 그냥 열심히 뛰어다니는 선량한 한 마리 악의 근원일 뿐이지만 주인공 엄마와 여자 친구는. 특히 주인공 엄마는... 하하하.

 


 - 어찌보면 나이 먹고 봐서 더 재밌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그 당시에 이 영활 봤다면 초반에 잠깐 나오는 재수 없는 젊은이 캐릭터의 007 드립 같은 건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그냥 넘겼겠죠. 수많은 고전 영화 인용들도 마찬가지구요.



 - 역시나 흘러간 옛날, 특히 인터넷과 cctv가 없던 시절이 이야기 만들기는 좋았던 것 같아요. 21세기 버전으로 이런 이야길 만든다면 아마 주인공들은 모과이를 보자마자 구글 검색부터 해 봐야 할 것이고, 그럼 작가들이 거기에 대해 뭐라뭐라 핑계를 만들어줘야 하구요. 마지막의 거한 난리통 같은 것을 연출하고 나면 주인공의 행적이 온통 cctv에 남을 테니 역시 엔딩을 위해 작가들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사실 별 필요 없는 사족을 만들어 붙여야 하겠죠. 그러다보면 영화가 좀 번잡, 산만해지기 쉽겠구요.

 노인들이 맨날 '옛날이 좋았다'고 푸념하는 게 그냥 헛소리가 아닙니...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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