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십과 인권 사이

2020.01.11 20:24

Sonny 조회 수:1389

얼마전 모 배우들의 문자가 유출되었었죠. 저는 그걸 두고 뭔가를 쓰고 싶으면서 쓰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유명인이라는 타이틀만 빼면 익히 반복되던 일이잖아요. 거기다가 뉴스의 충격강도로 따지면 이미 작년에 정준영과 승리의 정신나간 성폭행 이슈가 훨씬 더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충격은 충격이고, 한마디도 안하고 넘어가기엔 답답했고, 이런 일이 그 정도와 사람을 달리해도 여전히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좀 말은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웅앵웅 논란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람이고 이런 종류의 불꽃 같은 동기는 일상생활의 피로에 훅 하고 삼켜집니다. 저는 사실 아직도 구하라와 설리의 사망 소식이 남긴 앙금이 아직 다 용해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누가 힘들다고 하면 불현듯 그 두 사람 생각이 나면서 쓸데없이 다급한 책임감이 생길 정도에요. 여자는 죽고, 남자는 더럽게 사는 이야기가 계속 제목만 바꿔서 오르내리합니다. 


이런 종류의 사건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은 의외로 힘든 일입니다. 저는 제 sns에 조금 진지한 탄식이나 반박을 쓰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고충은 얼마나 더할까 상상하게 됩니다. 특히 심각한 사태를 심각하게 보자는 취지의 글을 쓰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어떤 크기로든 파여있을, 분노의 샘 같은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저는 매일 쓰는 것도 아니고 돈 받고 쓰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마음 내키는대로 쓰는대도 어떻게 뭘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거든요. 그래서 시종일과 같은 텐션으로 분노하고 실망하고 그 분노의 샘을 퍼올려서 언어로 구체화하는 페미니스트 여자분들에게 슬픈 경외심 같은 걸 갖고 있습니다. 저는 그냥 지쳐버리더라구요. 그래서 여러가지 변화를 줘봤는데 별 효과는 없었습니다. 되게 무겁게 끝맺음을 하기도 하고, 유쾌하게 놀려보기도 하고, 투쟁적으로 호소하듯 써보기도 하고, 마비된 듯 써보기도 했는데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질 않더군요.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곤란한 것은, 이런 일들이 대부분 가십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가누가 문란하게 논다더라~ 하는 것이 이번 이슈의 컨텐츠인데, 그 안에서 이 잘났다며 나대는 남자배우들의 말을 또 꺼내들고 어떤 여성혐오가 있으며 이것이 왜 일부남자가 아닌지를 막 설명해야 한다는 게 피곤합니다. 그게 그렇게 진지해져야 하는 일 같지 않잖아요? 추접스럽고 지저분한 남자 이야기를 뭐하러 하겠습니까. 대부분의 페미니스트 여자들은 이런 남자의 신상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폭력적 행위의 양상과 그것이 다른 남자들에게 소비되는 현실 자체가 중요하죠. 그런데 이런 말들은 어쩐지 가십을 다루고 있는 모양새가 됩니다. 이걸 맞받아치려는 남자들 역시 가십으로서 이를 독해해버립니다. 잘못되었다는 비판에는 남의 사생활이라는 해석, 여성을 향한 폭력적 태도에는 남자들끼리 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욕망으로서의 해석이 따라붙습니다. 바로 얼마 전 이슈가 되었던 여성들에 대한 태도와는 너무나 다른 판단입니다. 유명 여성 비제이가 홀로 아이를 양육해왔다는 소식에는 시청자를 속였다는 비판이 따라붙고 웅앵웅이라는 유행어를 말한 여자연예인에게는 남성을 혐오했다는 혐의가 덧씌워집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무관심해도 되는 일들 아닙니까. 그런데 실망과 비난은 여성연예인에게 집중됩니다. 웅앵웅이라는 말 한마디,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이를 숨길 수 밖에 없던 여자의 인생은 절대 곱게 넘어가줄 수 없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남성 연예인들의 불륜과 성매매에는 그저 잘나가는 형들의 거친 무용담이라는 해석만이 따라붙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그냥 가십이니까요. 그 안에 담긴 여성혐오의 맥락에는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정준영 승리 사태때도 그랬죠. 


흔히들 곡해합니다. 페미니스트들 껀수 잡아서 신났겠다고. 글쎄요. 딱히 저는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할 입장이 아닙니다만 옆에서 지켜본 바로도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는 그리 싸구려가 아닌 걸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쳐요. 특히나 이런 가십 성격이 짙은 일에는요.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존재한다거나, 피해자의 끔찍한 고통이 있다거나, 구조적인 병폐가 분명히 드러나는 일들에는 오히려 날을 세우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은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찜찜합니다. 그리고 여성인권을 다루는 이슈 대부분이 이렇습니다. 그 음습하고 조악한 욕망을 계속해서 목격하고 전시해야 합니다. 루리웹의 오타쿠들이라든가 보배드림의 아저씨들이라든가 하는 정말 너절한 언어적 쓰레기들 말입니다. 그게 무슨 아름답고 파고들 가치가 있는 것들이겠습니까. 


차라리 은밀하게 숨겨진 병폐를 밝혀내서 떡하니 드러내고 반성을 촉구할 수 있는 일이면 모르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슈들은 그런 고발이 씨도 안먹힙니다. 너무 일상화되서 뭐가 잘못됐고 부끄러워해야하는지도 모릅니다. 윤리는 감각입니다. 감각이 마비된 사람들에게 통증을 자극해봤자 반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게시판에도 있잖아요. 성매매 일지를 끝없이 쓰고 그게 쿨하다고 믿는 남성분이요. 그게 정말 음성화되어있다면 이런 게시판에 공개하는 것에는 부담을 느껴야 하는데 그런 것조차 없습니다. 그런 남자들이 아주 많고 그 시장이 거의 양성화되어있다 싶은 수준이니 그냥 별 게 아닌 겁니다. 저는 분노가 아니라 그런 피로를 느낍니다. 커뮤니티에서 맨날 보는 그 놈이나 스크린에서 폼잡던 그 놈이나 다 매한가지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야말로 기득권의 폭력이고 착취라는 것을. 그런데 가십이라는 양면성이 저를 지치게 합니다. 차라리 트럼프를 욕하는 게 뭘 이야기하는 동기부여가 더 될지도요. 인간적으로는 극히 저질이지만 그는 미국대통령이잖아요? <기생충>이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한국영화의 위상을 다시 세우고 있을 때, 국내의 내노라 하는 남자배우들은 비닐봉지 같은 내면을 고대로 들키고 있습니다. 이 비루한 현실을 어떤 언어로 엄중하게 꾸짖은들 현실의 성격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궁금해집니다. 분노를 넘고 실망을 넘고 환멸까지 넘어서면, 그 너머의 감정은 무엇이 있을까 하고. 저는 그냥 신경을 끌 수 있지만 피로해도 분노와 실망이 계속 맴돌 수 밖에 없는 당사자들은 어떤 식으로 익숙해져있을까. 저는 사실 그게 무섭습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들은 그게 무섭지 않은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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