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성, 남자다움

2020.09.12 01:51

안유미 조회 수:821


 1.여자들과 대화하다 보면 대화가 말싸움이 되곤 하죠. 그리고 나는 돈이 안되는 말싸움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대화가 말싸움으로 번질 것 같으면 대화를 그냥 접어버려요. 


 주위의 여자들의 문제는, 당사자성에 매우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이예요. 그녀들은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게 있을 때면 반드시 '여은성님은 주부로 살아 봤나요? 나는 주부로 살아봤어요!'라고 하거나 '여은성님은 회사에서 여자로 근무해 봤나요? 나는 근무해 봤어요!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회사를 다니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기나 합니까!'라고 말하죠. 여자 사원은 커녕 그냥 사원도 해본 적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들이 그런 말을 할 때면 '회사따위를 내가 왜 다니냐?'라고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하죠.



 2.하여간 그녀들의 문제는, 자신이 약간의 교집합에 해당되기만 하면 당사자성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믿어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거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사람은 어딘가에 발을 담가 봤다고 해서 그곳의 맥락이나 시스템의 얼개를 파악할 수 없거든요. 한 사람이 발을 담근 영역은 매우 협소한데다가 각각의 상황이나 조건이 몽땅 다르니까요. 발을 좀 담가 봤다고 해서 전문성이나 대표성이나 당사자성을 띄게 되지는 않아요.



 3.물론 사안에 따라, 경험치에 따라 당사자성을 짙게 가진 사람이 있긴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더더욱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사람은 무언가를 너무 경험하면 그것에 너무 몰입해 버리니까요. 맥락이나 얼개를 따지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처지를 중심으로 이해관계를 논하게 되거든요. 


 사람은 무언가를 잘 모르면 논할 것도 없고, 무언가를 너무 잘 알면 이해관계만을 논하게 되곤 해요.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단언하는 사람들을 별로 안좋아해요. 그런 녀석들은 무언가를 단언하기 위해, 일단 당사자성을 파는 걸 너무 즐겨 하거든요.


 늘 말하지만 나는 그래서 돈을 좋아해요. 돈은 아주 투명하거든요. '야 너 부동산까지 다 해서 25억 있다고? 나는 부동산 빼고 30억 있어. 내가 이긴 거지? 대화 끝!'하면 쌍방이 납득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숫자로 딱 떨어지지 않는 게 대화 주제로 등장하면, 인간들은 아주 짜증나게 변해요. 자신이 이겨먹기 위해 완전 말도 안 되는 것도 끌어오기 시작하니까요.



 4.휴.



 5.위에 굳이 여자라고 쓴 이유는 이거예요. 남자가 그런 식으로 지랄하기 시작하면 '헛소리 하지 마라.'하고 끊어버릴 수 있거든요. 뭐 하나 찍어먹어 봤다고 나대 보려는 남자는 사람들이 다들 싫어하니까요.


 하지만 여자에게는 그럴 수가 없단 말이죠. '내가 해봤다.'라는 말을 들고 나오는 여자에게 '하하, 찍먹 한번 해봤다고 나대는구나.'라고 했다간 이 쪽이 매장당할 거니까요. 여자가 그런 말을 하면 그냥 접어줘야 해요.


 아니 뭐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예요. 전에 썼듯이 문화나 관습이 짙게 가동되는 곳에서는 원래 남자는 여자를 못 이기니까요. 그리고...남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는 여자의 기를 세워 주는 게 모두가 행복한 일이죠.



 6.어쨌든 그래요. '당사자성'을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오는 여자에게 반박하는 건 그 여자만을 상대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곳에 있는 모든 여자와 모든 남자를 상대로 싸우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길 수가 없어요. 설령 본격적으로 덤벼서 결국 말싸움에서 승리하더라도 쪼잔한 놈이 되어버리면 그건 이긴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괜찮아요. 관습과 명분이 여자의 무기니까요. 남자의 무기는 자본력이고요. 관습이나 명분에 너무 기대는 것도...심지어는 논리를 따박따박 따지는 것도 남자답지 못한 일이거든요. 그게 억지쓰는 게 아니라 정말 옳은 소리라고 해도 그래요. '너무나 옳은 말' '너무나 옳은 소리'같은 걸 자신의 무기로 삼는 건 남자답지 못한 거예요. 논리나 명분으로 목에 힘주는 남자는 꼴불견이거든요. 사람들도 싫어하고요. 겉으로는 박수치지만 실제로는 아니예요. 남자는 명분이나 논리력이 아니라 자본력으로 가치를 평가받는 거니까요.



 7.물론 위에 쓴 건 내 생각이 아니예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죠. 나는 그냥 문화와 관습을 최대한 존중해 보려는 거고요. 


 음 아닌가? 존중한다...라는 말은 너무 피상적이네요. 정확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관습이나 어거지에서 도망치고 싶지는 않은 거겠죠. 전에도 썼듯이 사람들이나 사회가 남자에게 들이대는 허들을 피하는 건 좋지 않아요. 아예 사회 밖에서 살 게 아니면요.


 왜냐면 사람들은 허들을 피해가는 남자에게 허들에서 도망치는 놈이라고 야유를 퍼붓거든요. 어쨌든 사회에서 살아갈 거라면 허들을 상대하긴 상대해야 한단 말이죠. 그건 매우 좆같은 일이지만 그냥 세금 내는 셈 치고 납부하는 거죠. '남자다움'이라는 세금을 말이죠.



 8.물론 나는 내가 별로 남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전에 썼듯이 나는 우연히 이렇게 조성된 몸에 들어와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내 주위사람들은 엉뚱한 사람에게 남자다움을 강요하고 있는 중인 거죠.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죠.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이상 '남자다움'이라는 세금을 내면서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세금을 냈으면 대범한 척 하면서 가만있을 게 아니라 세금을 낸 만큼 환급을 받아내야 하는 거고요. 


 내가 살면서 알게 된 게 그거거든요. 알아서 환급금을 가져다 주는 사람은 없어요.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환급금조차도 한 번씩 어필을 해줘야 챙겨먹을 수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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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괜찮아요. 여자는 페미니즘 같은 무기가 있으니까요. 여자는 '지금 나에게 여자다움을 강요하는 거야? 그건 정말 21세기답지 않은걸?'이라고 반격할 수 있어요. 그런 권리가 있는 거죠.


 하지만 남자는 아니거든요. '지금 나에게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거예요? 지금 21세기잖아요! 이건 옳지 않아요!'라고 하면 그냥 비웃음거리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씨발 나는 존나 부자란다!'라고 말하는 남자는 비웃지 않지만 '이건 옳지 않아!'라고 말하는 남자는 비웃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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