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2020.09.12 07:54

어디로갈까 조회 수:684

어제 한 선배의 부음을 접했습니다. 무빈소 1일 가족장으로 치른다더군요. 자발적 죽음의 의미를 따질 필요는 없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그건 그 선택에 그림자를 부여하는 짓이니까요. 그저 한 송이 국화를 영전에 바치는 마음으로 이 시를 음미해봅니다. 

- 공무도하가
公無渡河     님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님은 그예 물을 건너
墮河而死     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네
當奈公何     가신 님을 어이할까

바람소리처럼 흐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은 시입니다. 시가 전달하는 상황은 선명하지만, 그 선명함이 바람처럼 불어가므로 어떤 해명의 여지조차 없어요. 이 시는 문자의 명백한 고착성을 부정하는 듯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가 좋아요.

간명한 노래입니다. 강으로 걸어 들어가는 늙은 남편을 만류하다 비탄에 빠지는 여인의 슬픈 외침뿐이니까요. 그러나 지어진 내력를 따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 시에는 네 사람의 시선이 있습니다.
1. 강에 투신하는 노인 2. 노인의 뒷모습을 보는 여인 3. 우연히 이 광경을 목도하는 사공 4. 그에게서 이 광경을 전해듣는 사공의 아내.
열여섯자 속에 펼쳐지는 시공간이 참 커다랗습니다. 낮부터 저녁에 이르는, 네 개의 시선을 통과하는 그 초조한 시간의 흐름마다 하나의 세계가 열리고, 닫힙니다.

- 시선 하나.
강으로 걸어들어가는 백수광부의 시선은 미지의 저편을 향해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등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의 시선은 황홀이든 죽음이든, 개인이 소멸되는 지점 - 피안의 세계에 닿아 있습니다. 아닐지도 모르죠.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가 강으로 걸어들어갔다는 사실, 그의 뒷모습뿐입니다.

- 시선 둘.
백수광부 아내의 외침과 시선은 이별의 고통과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과연 그것 뿐일까요? 
극심한 고통이나 공포의 표정은 섬뜩한 無를 드러냅니다. 자신의 실존적 상황을 전체성의 맥락 속에서 개관하는 자는 울부짖거나 외치지 않는 법이에요. 아내의 외침은 고통과 無, 이 양자의 중간 어딘가에 있습니다.
시를 보면, 아내의 외침에는 고통을 느끼는 주체로서의 자기 응시가 없어요. 고통의 주체는 있지만 고통받는 자신을 아는 주체가 없기에 이 시는 떠도는 바람소리처럼 들립니다.
바람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기에 투명하게 흘러갈 수가 있어요. 노인은 강물 속으로 들고, 아내는 바람 속에 서서 이미 거의 바람이 되어 있습니다.

- 시선 셋.
이 상황을 우연히 목도한 이는 뱃사공 곽리자고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그가 놀라기는 했겠으나 아파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그는 시/노래가 아닌, 이야기의 매개인이니까요. 그는 이 시에 관여된 네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서사적인 것을 매개하는 인물입니다. 노래의 비정이 노래의 노래됨에 있다면, 서사의 비정은 이야기의 이야기됨, 즉 그 이성에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강물을 붙들고 바람을 가두는 힘입니다.

- 시선 넷.
여옥에겐 시간처럼 흐르는 강에서 사공일을 하는 남편이 있습니다. 그가 낮의 세계에서 돌아와 이야기 하나를 던져놓아요. 그렇게 저녁은 시작됩니다. 공후인을 타며 이 시(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동안, 여옥에겐 비로소 낮이, 슬픔이, 세계가, 남편이라는 타자가, 저무는 하루가 구체적인 소리로 확인됩니다. 노래를 만드는 동안 여옥의 눈앞에 무엇인가 활활 타며 깨달음이 되었을 것이에요. 그러나 그순간 노래는 이미 지워지고, 그녀에겐 아무런 느낌도 남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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