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2019.03.16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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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e
J는 우리 팀의 막내인데 여러 면에서 유능함을 자랑하는 인물입니다. 정직, 최선, 단순함 (좋은 의미에서의), 긍정... 등의 어휘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녀의 분위기를 저는 참 좋아해요. 어떤 상황에서도 호호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또 얼마나 선하고 맑은 공명을 일으키는지.

어제 함께 점심을 먹고난 후 커피 타임에 그녀는 담담하게 자기 안에 숨어 있는 한 뼘의 황무지를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실연기였어요. 모든 실연기는 차갑고 단단하죠. 모양이 똑같은 틀 안에서 얼려진 얼음처럼 새로울 건 없다 해도, 각각의 사연이 마음에 와닿을 때는 시리고 얼얼하기 마련입니다. 다행이었던 건, J의 표정이나 목소리에 위악도 유아적인 경련도 없었다는 점이었어요.

"이젠 마음이 다 정리되었어요."라고 말할 때 그녀는 진정으로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말을 스스로 믿다 못해, 말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버리는 표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표정을 지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다른 시간의 문을 열고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빛이 없는 모든 순간에도, 빛이 있을 때 가능했던 방식대로 그녀가 살아나가기를.

- He
퇴근 무렵, 콜백을 원하는 메모를 받고 그에게 전화했더니 대뜸 저녁에 좀 보자는 명령에 가까운 부탁이 건너왔습니다.
"일요일쯤 보면 안 돼?"
"안 돼."

피로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한 음성이었으므로 "무슨 일이야?"라고 긴장해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우리, 끝냈어." 
"......."
짧은 바람이 휙 심장을 스쳤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나라로 신혼여행 왔을 때, 그의 아내와 셋이서 놀러 갔던 스포르체스코 성 안에 불던 저녁 바람이 그 말만큼이나  선득했던가.

거리의 불빛과 그 위에서 서서히 어둠의 결이 달라지는 하늘이 바라보이는 카페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식사주문을 하려니까 처음에 그는 "먹으면 위경련이 일어난다"며 싫은 얼굴을 했어요. 하지만 "난 배고픈 사람과는 대화 안 해!"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자, 순순히 새우 그라탕 하나를 주문해서는 묵묵히 먹어주었습니다. 배가 부르면 기쁨은 겸손해지고 슬픔은 겸연쩍어지는 법이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던 거겠죠.

때때로 노래가 흘러갔습니다. 때때로 커피향기가, 웃음이, 대화가, 말이 되지 못하는 한숨이, 그 모든 것들을 가차없이 몰아내어 버리는 침묵이 흘러갔습니다. 그가 지닌 상처의 내용을 잘 알지만, 앓아야 하는 건 철저하게 그의 몫이죠.  저는 그가 정직하게 앓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일시적으로 콧물이나 기침을 잠재우며 나른한 환각을 주는 감기약 같은 위로에 기대지 않고.

세상의 모든 나무, 모든 꽃들도 나무와 꽃이 아니라 단지 먼지바람 속에 흔들리는 무엇이고 말 때가 있는 거죠. 사람이라고 다를까요. 사람도 사람이 아니라 상처나 외로움, 단지 하나의 생명으로서만 살아내어야 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에요.
빛이 없는 모든 순간에도, 빛이 있을 때 가능했던 방식으로 그가 살아나가기를.

덧: https://www.youtube.com/watch?v=rEe8RqxMO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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