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 가족에 대해서

2019.09.23 22:35

Sonny 조회 수:627

<벌새>가 그려내는 가족의 형태가 인상깊었습니다. 대부분 영화에서는 가족을 한 분기점으로 나눕니다. 아직 균열이 완전히 드러나기 전, 균열이 작동해 쪼개져버린 후. 대부분의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곪아있는 가족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테러리스트가 침입하든 외계인이 쳐들어오든 대재난이 일어나든 이 가족은 그 때서야 비로서 갈라져나가면서 숙제같던 분열을 실천합니다. 그리고 재결합을 하거나, 아니면 영영 찢어져버립니다. 그런데 <벌새>는 그렇지 않습니다. 위기의 순간들이 오는데도 은희네 가족은 감정적 결합의 카타르시스를 향해 간다기보다는 그 모든 감정적 분기점을 극복해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전이나 이후나 고만고만하고 무뚝뚝한 가운데 어쩔 때는 애틋한, 그런 가족으로서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화 바깥의 보편적인 가족일 것입니다.

은희는 가족으로부터 멀어져버릴 만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만 편애하는 아버지, 툭하면 자기를 때리고 무시하는 오빠, 춤바람이 나서 엄마를 폭행한 아빠. 이런 순간들에 은희는 환멸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저는 <벌새>를 보면서 그런 예측을 했습니다. 저 감정들이 축적되어 은희는 제목처럼 더 처연하고 고독한 날개짓을 하겠구나... 그런데 영화는 의외로 가족이 다시 뭉치는 순간을 그립니다. 은희가 수술을 받을 때 그 폭력적이던 오빠와 아빠는, 눈물을 보입니다. 이것은 가짜 눈물도 아닙니다. 그래도 꼴에 가족이라고, 죽지는 않았으면 하는 이들의 순진한 바람입니다. 이들이 갑자기 좋은 아빠와 오빠로 개심한 건 당연히 아니고, 은희와의 거리가 좁혀진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공동체로서 공유하는 어떤 유대만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전 <벌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가족이란 커다란 네개의 개체가 충돌하거나 묶여서 계속 굴러가는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히려 가족은 각 구성원들이 순간의 감정과 시간들로 군체처럼 모여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와글와글 점들이 움직이고 때론 다른 구성원과 부딪혀 서로 갉아먹다가, 어느 순간에는 자기 형태를 버리고 가족이라는 커다란 원을 그리는 것 같습니다. 함께 사는 모든 순간이 개개인의 형태로 나눠져서 따로 뭉쳐져있다가, 죽음의 순간이 엄습하면 그 때는 모두가 제 형태를 버리고 하나의 둥그런 원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굳이 원이 아니더라도 어떤 도형을 만들기는 했을 것 같아요)

저는 <벌새>를 단절과 연속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거대하고 불규칙한 점선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큰 언니가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가족이라는 도형에 큰 공백이 생긴줄 알았을 때, 은희네 가족은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한 대답으로 가족으로서의 도형을 만듭니다. 이들의 가족은 이전의 형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가족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어져야 할 것이 끊어질 때, 점들은 흩어지거나 있었던 자리만을 만듭니다. 어떤 것은, 이어지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너무 당연한 게 가족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 수직적 질서가 뻔뻔하게 존재하고 거기서 위에 있다 스스로 믿는 자들은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가족이 그 형태로 지속되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세계의 폭력은 그보다 훨씬 더 갑작스럽고 거대하게 닥쳐옵니다. 영원한 건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계속 이어지진 않습니다. 은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큰 형태를 자기 자신의 상실과 또 다른 가족의 상실 두 경우를 직접 겪으며 몸소 깨닫습니다. 가족마저도 지난 학기의 추억처럼 과거의 순간이 되버릴 수 있다고. 물론 이 깨달음은 "그래서 열심히 사랑하고 이해하고..."라는 교훈이 아닙니다. 그저 당연한 줄 알았던 존재의 자리가 갑자기 비어서 그 어떤 그림자도 자라날 수 없다는 현실을 힘겹게 깨달을 뿐입니다. 약하고 자그맣던 존재는 가족이라는 세계를 걱정하고 매달리면서 계속 연속되기를 바랍니다. 벌새라는 새가 날개짓을 멈추지 않고 하늘에 떠있듯이, 은희는 가족을 포함한 세계 안에서 계속 머물러있고자 합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모두가 이렇게 살고 있지 않나요. 그것은 시끄럽진 않아도 처절하고 쉼이 없어서 괜히 슬퍼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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