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교가 불러일으킨 기억

2020.03.01 19:07

어디로갈까 조회 수:1350

날마다 뉴스는 세계적 감염병으로 확산된 covid-19의 실태를 전하고 있습니다. 위기감의 고조에도 불구하고 반복되기에 저는 이 사실을 나날의 바람처럼 대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공공의 적이 돼 있는 '신천지'의 면면을 접하노라니 불현듯 몇년 전 밀라노에서 근무하던 때의 방문객들이 떠오르네요.

뒤늦게 마음의 얼음이 풀리면서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나아지는 삶이랍시고 꾸역꾸역 일상을  일궈 나가고 있는 저 자신을 연민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온 세상이 가여웠어요. (제가 속한 계층의 삶을 거부하다가 점점 일반적인 삶의 자세를 모방하고 있다는 인식이 강렬해져서 괴로웠던 것 같... - -)
세상과 깊게 접촉하는 일을 좋아해본 적이 없었으나, 그 시절엔 '연민'을 매개로 제가 세상에 깊숙이 닿아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제 마음이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죠. 말하자면 세상의 일부로서 제 마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었는데,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애도哀悼라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시절이었는데 일요일마다 제 집을 찾아와 벨을 누르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할머니 한 분과 젊은 여성 한 사람으로 구성된 2인 1조의 'Jehovah's Witnesses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빌라 이웃이었어요. 할머니는 어딘지 소녀 같은 귀여움이 있었고 제 또래 여성은 우직한 시골 아가씨 같은 인상이었죠.
그들이 제게 뭔가를 설득하거나 강요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매번 지나치게 밝은 이미지들로 가득찬 두꺼운 팜플릿을 가져다 주고, 카톨릭을 비난하고, 세상의 종말이 왔음을 알리고, 더러운 세계의 죄악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고 부탁했고, 그들의 동아리에 들기를 권했어요. 그뿐이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현관 청소를 하느라 열어둔 문으로 밀고 들어온 그들과 긴 대화 끝에 이런 질문을 던져봤어요. "그러면 당신들은 세상의 악과 함께 괴로워하세요? "
함께 괴로워할 수 있다면, 여호와의 증인이건 카톨릭이건 다른 무엇이건 무슨 문제랴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나 그들은 함께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자신들을 '고립시킨다'는 설명이었어요. 왜냐하면 악에 물들지 않고 순결한 한 조각 다른 세상으로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악과의 단호한 대치이자 대립이었죠. 

악에 물들지 않고 순결한 한 조각 다른 세상으로 머무르겠다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지 지금도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 - 허구가 더 진실하게 여겨지는 영생의 질곡으로 들어간- 이들에게 가졌던 감정과 비슷한 걸 요즘 '신천지' 신도에게도 느낍니다. 그들을 낙인찍어 구분하고 떠밀어낼 게 아니라 '신천지' 밖의 세상이 신천지 보다 뒹굴기 좋은 개똥밭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우리 사회가 보듬어줘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 여러분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_-)

보르헤스가 어느 글에선가 중국의 백과사전을 인용했죠. 고대의 전쟁에서 황제군이 승리하면 적군이었던 동물과 요괴들을 거울 속에 가두고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을 거울 속에서 따라하도록 주술을 걸었다고. 그러나 현인이 가르치기를 그런 거울은 언젠가는 반드시 깨어진다고 했노라고.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 거울이 깨어지는 시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covid-19는 그 깨어진 거울 틈새에서 삐져나온 것일 수 있고요. 어쩌면 앞으로 더 크고 지독한 요괴가 등장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인류가 쌓아온 죄업의 카르마를 인류가 이룩한 문명이 무화시킬 수 있을까요.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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