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2020.03.26 18:14

은밀한 생 조회 수:733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병원을 다녀왔어요.
항암치료 예후검사 진행 중인 남친의 대장내시경 보호자로 간 건데요.
수면 내시경은 보호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게 규칙이고 아주 드물게 보호자 없이 검사받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마저도 규모가 큰 병원에선 여의치가 않더라고요. 친구든 누구든 보호자가 와야 하는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있어요. 환자가 수면 마취가 덜 풀린 상태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내시경 사진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한 후에, 낙상 방지라든가 그런 부분을 주의시키더군요. 이런저런 검사와 치료를 병행해온 남자친구 말로는 골수 체취가 제일 뭣 같다고....

암튼 와중에 내시경이 끝난 뒤 아주 잘 자는 남친을 보면서 있는데, 커튼 옆에서 한 모자가 대화를 나누는 게 또렷하게 들리더라고요. 사실 대화가 아니라 아드님 혼자 중얼중얼 한 거지만. 어머니가 도무지 잠에서 깨어나질 못하자 간호사들도 여러 번 다녀가고 “저희 퇴근할 때까지 주무실 것 같아요 ㅠ ㅠ 일어나셔야 하는데 ㅠ ㅠ"라면서 애원 섞인 압박을 하는 중이었거든요. 음 근데 그 아드님이 어머니를 깨우면서 하는 말들이 아직도 생각이 나요.

“엄마.. 많이 졸리시죠 ㅠ” (아들이 어머니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는 소리가 들림)
“으응 으으.. 우어..” (어머니는 잠에 취해 계심)
“엄마.. 힘드시죠.. ㅠ” (아들이 어머니 등을 다시 토닥토닥 쓰다듬)

-5분후-
“엄마.. 많이 졸리시죠 ㅠ” (아들이 어머니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는 소리가 들림)
“으응 으으.. 우어..” (어머니는 잠에 취해 계심)
“엄마.. 어젯밤에 늦게 잠드셨구나.. ㅠ” (아들이 어머니 등을 다시 토닥토닥 쓰다듬)

-5분후-
“엄마.. 에고... ㅠ” (아들이 어머니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는 소리가 들림)
“으응 으으.. 우어. 검사 몇 분 했어?” (어머니는 잠에 취해서 웅얼대다 희미하고 어눌한 발음으로 물어보심)
“엄마.. 5분쯤 했어요 .. 괜찮대요 엄마..” (아들이 어머니 등을 다시 토닥토닥 쓰다듬)

-다시 대략 5분후-
“엄마.. 많이 졸리시죠” (아들이 어머니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는 소리가 들림)
“으응 으으.. 우어. 검사 몇 분 했어?” (어머니는 잠에 취해서 웅얼대다 희미하고 어눌한 발음으로 아까와 같은 걸 물어보심)
“엄마.. 5분쯤 했어요 .. 괜찮대요 엄마..” (아들이 어머니 등을 다시 토닥토닥 쓰다듬)

정말 이 같은 대화가 시간차를 두고 계속 반복이 되더라고요. 다정하기도 하여라. 어지간하면 엄마 양팔을 잡고 “자 엄니 일어나십시다!!!! 여엉차!!” 할 만도 한데. “아 엄마 쫌 인나요!!!” 할 만도 한데. 아님 혼잣말이라도 “하... 언제 가지 ;;;” 할 법도 했고. 간호사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꽤 오래 잠들어 계신 것 같더군요. 아들이 계속 기다리면서 어머니 등을 쓰다듬고 토닥이며 고작 하는 말이라곤 “엄마 많이 졸리시죠 ㅠ ㅠ” 절대 짜증 1도 안 내고. 우리가 일어나서 이런저런 주의사항 듣고, 조직검사 결과 외래 예약까지 마치고 나오는 길에도 그 모자는 계속 그렇게 있는 중이었어요...

그 아들의 다정하고 안타까운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울리네요. “엄마... 많이 졸리시죠..”
마음에 작은 촛불 하나가 켜진 기분이에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3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9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96
125071 킹스 퀘스트 4 음악 [2] 돌도끼 2023.12.26 81
125070 [디즈니플러스] 아직은 크리스마스니까! 시즌 무비 '솔드 아웃' 잡담입니다 [4] 로이배티 2023.12.25 350
125069 프레임드 #654 [4] Lunagazer 2023.12.25 78
125068 [아마존프라임] 코엔 형제 '스타일'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블로 더 맨 다운' 잡담입니다 [2] 로이배티 2023.12.25 275
125067 최근 본 드라마와 잡담 [6] thoma 2023.12.25 455
125066 기형도, 성탄목 - 겨울 판화 3 중 [7] jeremy 2023.12.25 282
125065 [강력비추] 레벨 문;;; [14] LadyBird 2023.12.25 609
125064 캐롤 앨범 중에는 이게 부동의 1위여요. [7] jeremy 2023.12.25 506
125063 [핵바낭] 일 다 끝냈습니다 & 일상 바낭 & 메리 크리스마스 [14] 로이배티 2023.12.25 407
125062 이런저런 잡담...(어른들의 말) 여은성 2023.12.25 228
125061 송창식-밤눈 [2] jeremy 2023.12.24 153
125060 프레임드 #653 [4] Lunagazer 2023.12.24 64
125059 Ocn 나홀로집에 1편 지금 해요 [1] 가끔영화 2023.12.24 112
125058 아마존 프라임 추천작 '솔트번' [6] LadyBird 2023.12.24 396
125057 이런 형식으로 쓰기 좋아하는데 직업이 아니라 자타의 완성도 30%하하 [1] 가끔영화 2023.12.24 155
125056 뉴 엑스 파일에 대한 루머 [3] theforce 2023.12.24 304
125055 [디즈니플러스] 더 베어, 외딴 곳의 살인초대 [8] 쏘맥 2023.12.24 344
125054 크리스마스에 눈이 온다요, 우리동네 아이맥스, 요즘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노래 [1] 상수 2023.12.24 134
125053 프레임드 #652 [2] Lunagazer 2023.12.23 69
125052 팔콘 3.0 음악 [3] 돌도끼 2023.12.23 12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