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이라 한 이틀 안 왔더니 종교 이야기가 대세네요.

아직 셤중이라 쵸큼 바쁘지만 분위기 식기 전에 몇 자 적어봅니다.


며칠 전 대립각님 글에 제가 개신교도라고 나서서는 댓글로 넋두리를 남겼었습니다.

( http://djuna.cine21.com/xe/board/1029951 )


그때도 그렇고 오늘 게시판을 훑어보면서도 그렇고 왠지 가슴이 답답합니다.

아, 불신자들을 향한 안타깝고 절절하고 뜨거운 사랑 이런 건 아니니 오해 마시길^^;


한국 교회에 이상한 점이 많고, 사회적으로 흠결 있는 목회자들 많고,

세계사를 보더라도 기독교도라는 사람들이 십자가 들고 저지른 잘못 많죠.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는 개신교도 독재자가 있는데, 신의 이름으로 수만을 학살했다더군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부족한 점이 많고요.


교리(?)라고 나도는 것들을 봐도 납득 어려운 소리가 많죠.

창조론이라든지, 축자영감설, 성서무오설, 예수 이야기, 천국과 지옥 등등.

사실 저도 그런 거 그닥 다 믿지 않습니다.


실은 가끔 저 스스로도 내가 정말 개신교도인가 돌아볼 때가 있습니다.


저는 세상이 6일만에 만들어졌다고 믿지 않아요. 진화론이 당연히 설명적으로 우월하다고 보죠.

사실 진화론적 준거틀로 이것저것 설명하듯 말하는 걸 좋아해서 평소에도 친구들과 시시껄렁한 진화심리학적 농담을 합니다.


성경 한 글자 한 글자에 지존자의 영감이 들어가서 한 마디도 틀린 말이 없다느니 하는 것도

무식한 개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초판본 본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요.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별로 없을 뿐더러

누가 상을 당했다든지 하는 특별한 때가 아닌 이상 언급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개신교도라고 말하고 다니는 건 대강 아래와 같은 까닭입니다.


전 창조론에서 중요한 건 몇째 날에 뭐 했냐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면서 (고대인들이 보기에) 세상을 만들 정도로 대단한 어떤 존재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을 잘 알고, 게다가 인간을 좋아한다는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이 꽤 맘에 들어요.


압니다. 진리 이딴 거, 좀 촌스럽죠.

포스트모던이고 상대적 진리관이고 전 그런 거 잘 모릅니다.

여하튼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란 건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기는 해요.

인식론적인 한계라든가 뭐라든가 때문에.


근데 그럼 어차피 모를 거,

그런 진리 그 자체인 존재가 있어서 인격이 있다고 가정하고

기본적으로 날 잘 알고 좋아할 거라고 가정하는게 해로울 것 같지는 않네요.

단! 어디까지나 가정이라는 것만 염두에 두고 있으면요.


말하면 입아프지만 가정이라는 건 잘 모른다는 거죠.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그다지 신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죠.

근데 보십시다. 성경에도 신은 워낙 신비로운 존재라서

성경을 쓴 사람들도 신의 마음을 잘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까 말한 인식론적인 한계라든가 진리라는게 있다고 가정한 거라든가 하는 걸

누구도 신의 마음을 잘은 모른다는 소리로 대치해도 뜻이 대강 통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저는 제가 믿고 싶은 바, 즉 "진리라는 게 있고 그게 날 잘 알고 날 좀 좋아한다"

같은 아이디어를 딱히 해롭지 않으면서도 수천년을 물려내려온 신앙적 유산과도 통하는 방식으로

성공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위에 다른 신앙적 유산 중 맘에 들고 이해도 되는 걸 골라서 쌓습니다.

그럼 오래된 책이나 클래식 들을 때 좋은 것 처럼, 옛날 사람들이랑 세월을 넘어 통하는 느낌도 들고 흐뭇한 게 있어요.

물론 신을 믿는 거지 교회를 믿는 건 아니니까 교회의 무리한 활동에는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당연히, 이런 신념체계로 양자우주론이나 신경생물학 같은 것에 접근하기는 어렵죠.

물리학의 언어로 의사소통론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요. 용도가 다른 언어니까요.


하지만 기독교라는 언어를 바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폴 틸리히♡ 좋아합니다.)

시간과 내공이 부족한 관계로 바른 용례에 대해 이렇다하고 쓰질 못해 많이 아쉽습니다만,

저한테는 "한국교회를 보니 개신교란 거나 개신교도들이란 거나 모두 쓰레기에 바보천치야"와 같은 취지의 이야기는

"디씨 ㅇㅇ갤을 보니 한국어랑 한국어 사용자는 모두 쓰레기에 ㅇㅇㅇ야"와 같은 취지의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기독교적 세계관이라는 인류적 유산을 일종의 언어로 보자면,

그 언어의 바른 쓰임새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종교 밖의 언어로 번역하는게 딱히 불가능하진 않을 거고요.


하잘것 없는 넋두리에 이런 얘기까지 갖다붙이자니 좀 우습지만,

인류가 지금까지 기독교와 함께 걸어온 길을 생각해 볼 때,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이만큼 치고받고 싸우는 걸 겪어냈으면,

차이점보다도 공통점에 더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이해보다는 경멸이 더 쉽습니다. 물론 때로 더 유용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뭔가가 생산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행복해지는 건 고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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