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대공원에 갔다가...

2010.07.01 23:56

차가운 달 조회 수:3783





지난주 금요일의 일이네요.
그날 무척 더웠죠.
친구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한낮이었어요.
어린이대공원에 가서 맥주나 한잔하자는 거예요.
뭔 소리냐고 했더니 아이가 자꾸 동물원에 가자고 보채서 지금 어린이대공원에 갈 거라네요.
목요일까지 정신없이 바빴거든요, 쉬는 날은 그냥 좀 느긋이 쉬고 싶었죠.
제대로 대답을 안하고 있으니까 그럼 좀 생각해보고 전화하라고 하더군요.

일단 설거지부터 해야했어요.
수도를 틀자 잠시 미지근한 물이 나왔죠.
설거지를 마치고 창가에서 내려다본 골목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어요.
이제 정말 여름이 찾아온 것 같았죠.
저는 여름을 좋아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죠.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준비를 했어요.

흰색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신발장에서 샌들을 꺼내려고 보니까 샌들이 없는 거예요.
이사를 하면서 어디 다른 곳에 처박아 둔 모양이었어요.
그래서 그냥 운동화를 신고 나섰죠.

어제와는 다른 공기,
거리에는 후끈거리는 열기가 치솟고 있었어요.
버스에는 사람들이 햇빛이 들지 않는 한쪽으로 주르르 몰려서 앉아 있었어요.
어쩔 수 없이 반대쪽 빈자리에 앉았죠.
햇빛이 반바지 위로 드러난 무릎에 떨어지더군요.

친구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이는 유모차 안에 잠들어 있더라구요.
동물원 가자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데리고 나오니까 잠들었네.
친구가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죠.
저는 유모차로 다가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봤어요.
까만 머리칼로 볼을 가린 채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죠.
연아야, 삼촌 왔어.
하지만 아이는 깊이 잠들어 있었어요.
아, 물론 연아라는 이름은 가명이에요.
아이의 원래 이름은 별로 평범하지 않거든요.

출산을 앞두고 친구의 아내가 친정에 갔을 때
친구의 집에서 아이 이름을 짓겠다고 둘이서 끙끙거린 적이 있어요.
뭐, 그냥 그 핑계로 밤새 술을 마신 거죠.
제가 몇 개 생각해 봤는데 별로였나 봐요.
새벽 무렵에 친구가 문득 한 이름을 얘기했고, 저는 그거 괜찮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이는 그 이름을 갖게 된 거죠.

잠시 후 전동차가 들어왔어요.
저는 유모차를 밀고 문으로 향했죠.
그런데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의 그 공간, 바퀴가 걸릴 것 같더라구요.
순간 당황해서 유모차를 밑에서부터 들고 허겁지겁 전동차에 올라탔죠.
이제는 아이가 많이 커서 그런지 좀 무겁더라구요.
혹시 유모차 바퀴가 빠지면 어떡하나 가슴이 철렁했는데 한숨 돌렸죠.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뭔가 좀 이상했어요.
"아니, 내가 왜 이걸..."
녀석은 먼저 올라타서 팔짱을 낀 채 남의 일인양 쳐다보고만 있었거든요.
넌 뭐하는 놈이냐고 뭐라 그래도 히죽히죽 웃기만 하네요.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우리는 일본 축구 얘기를 했어요.
일본이 덴마크를 이긴 날이었거든요.
일본 왜 이렇게 잘하냐, 16강도 통과하는 거 아니냐, 오카다가 그렇게 욕 먹다가 갑자기 영웅이 됐다.
뭐 그런 얘기를 한참 했죠.
"나중에 우리나라에서 오카다 감독 수입하는 거 아냐?"
낄낄거리고 웃다가 친구가 문득 내려, 내려, 그러면서 유모차를 붙잡네요.
문이 열리자 녀석은 능숙하게 유모차 미는 것과 동시에 앞바퀴를 살짝 들어서 승강장으로 넘어가고 다시 뒷바퀴를 들어서 전동차에서 빠져나왔죠.
그걸 보고 있으니까 왠지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요.
저렇게 하면 되는데 유모차를 밑에서부터 들고 난리를 쳤으니.

하지만 바보들의 행진은 그때부터였죠.
친구와 저는 나란히 붙어서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어요.
계단을 다 올라갔는데 또 계단이 나오더라구요.
우리나라 지하철 이대로 좋은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또 계단을 올라갔어요.
개찰구를 빠져나와 출구를 찾았죠.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어린이대공원이라는 글자는 안 보이네요.
이상하다 싶어서 벽에 붙은 지도를 보는데 우리가 내린 역은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아차산역이 아니라 한 정거장 전인 광나루역이었던 거예요.
친구 녀석이 내리자고 해서 아무 생각없이 내렸던 거죠.
정말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더라구요.

우리는 다시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고,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죠.
마침내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 저는 친구 녀석에게 성질을 내면서 말했죠.
"나 지금 등에 땀 났거든?"
녀석은 아 몰라 몰라, 다 일본 때문이야 그러면서 자기도 더운지 손으로 부채질을 하네요.
저는 유모차 안의 아이를 잠시 바라보았어요.
잘 자더라구요.

아차산역에 내려 계단을 오르기 전 문득 엘리베이터 생각이 났어요.
계단 옆으로 가서 보니까 바로 엘리베이터가 보이더군요.
"너, 유모차 끌고 지하철 탄 거 오늘이 처음이지?"
그렇게 바보들은 문명의 이기를 맘껏 누리며 지상으로 향했어요.

거리에는 뜨거운 햇볕이 무자비하게 내리쬐고 있더군요.
어린이대공원으로 향하는 넓은 길을 걸었어요.
나무 그늘이 있는 쪽으로 해서 말이에요.
노점 옆에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이 유모차를 보면서 큰소리로 외치시더군요.
"유모차가 작다, 작아."
아이의 발이 발판 밖으로 삐죽 늘어져 있었죠.

어린이대공원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얼마 만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여름 한낮, 나무 그늘 속으로 유모차를 천천히 밀며 안으로 향했어요.
친구도 정말 오랜만이라며 말을 꺼내더군요.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처음 와 보는 것 같은데? 왜, 그때 우리 여기서 체육시험 봤잖아."
"그래, 사흘 동안 수영 연습하고 마지막 날 시험 쳤지."
뭔가 생각났는지 녀석은 낄낄거리고 웃더군요.
"너, 그때 5m도 못 나가고 허우적거렸잖아. 물만 사방으로 튀기고."
"5m는 무슨, 제자리에서 첨벙거리기만 했지. 풀에서 나올 때 체육 선생이 진짜 한심하게 쳐다보더라."

그때는 수영을 전혀 못했거든요.
아주 어렸을 때 강으로 수영을 하러 간 적이 있었어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더웠던 것으로 기억되는 여름 어느 날이었죠.
대구 근교의 무태라는 곳이었는데, 지금도 그날 일은 생생하게 기억나네요.
친형제처럼 지내던 옆집의 형이랑 함께 갔었죠.
목덜미로 따갑게 쏟아지던 햇볕, 길가의 플라타너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는 매미들,
혼자서 돌아오던 길의 기억이 생생해요.
그 형은 유리에 발을 깊게 베여 피를 많이 흘렸죠.
어른들이 병원으로 데리고 갔어요.
아무튼 저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 밑이 무서웠어요.
다 크고 나서도 수영을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죠.
언젠가 꿈에 나온 수영장에는 온통 개구리 시체가 둥둥 떠 있었어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것들은 항상 무서워요.

"근데, 난 졸업하고 나서도 여기 온 적이 있어."
"그래? 여기 올 일이 뭐가 있냐?"
"모르겠어, 어떤 여자애랑 한 번 온 적이 있는 것 같아."
"그럴 리가 있나."
"정말이야, 우리는 같이 회전그네를 탔거든. 그것만 생각나네. 줄에 매달린 그네에 앉아 있으면 빙빙 돌아가는 거 말이야.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 회전그네를 탔던 것만 생각나."
"근데 누군지 모른단 말이야?"
"응, 전혀 모르겠어. 짐작도 안 가."

평일의 어린이대공원이라 한적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곳곳에 사람들이 보였어요.
유모차를 끌고 온 여자들이 많았죠, 신기하더라구요.
날도 더운데 손을 꼭 잡고 있는 연인들도 보였어요, 아직 어리더라구요.
가끔은 부부가 함께 유모차를 끌고 있는 모습도 보였죠.
날이 더워 느릿느릿 움직이느라 그런지 모두들 평화롭고 또 느긋해 보였어요.

유모차를 밀고 천천히 걸어가다가 만난 둥근 건물 안에는
매점, 음식점, 그리고 동물공연장 따위가 있었죠.
바로 앞에는 파라솔이 잔뜩 늘어선 벤치와 식탁들도 있었구요.
아이는 여전히 유모차 안에 얌전히 놓여 있었어요.
"지금 잘 시간이라서 그래."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며 친구가 말했죠.

시원한 캔 맥주를 사 와서 파라솔 그늘 아래서 마셨어요.
찡오야인지 뭔지하는 오징어다리도 샀구요.
"나무 그늘 아래서 마셔야 더 맛있는데."
그 말을 듣고 친구는 주위를 한 번 둘러봤어요.
"안 돼, 맥주 사러 갔다 오기 힘들잖아."
맥주 한 캔을 금방 다 비웠죠.

"알고 봤더니 유모차 부대가 어린이대공원에 다 모여 있었네."
저쪽에서부터 다가오는 세 대의 유모차를 보며 제가 말했죠.
친구는 고개를 돌려 힐끔 본 다음 피식 웃었어요.
세 명의 여자가 나란히 줄을 맞춰 유모차를 밀면서 다가오고 있었죠.
"같은 동네 사는 여자들이겠지?"
"그렇지 뭐, 낮에 혼자 애 보고 있으면 심심하니까. 그냥 바람 쐬러 나오는 거지."
"너처럼?"
친구는 흐흐거리고 웃었어요.

아이가 눈을 떴어요.
낮잠을 자다가 깨어났을 때, 한순간 지금 자기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그런 얼굴이었죠.
작은 손으로 쉬지 않고 눈을 비비더군요.
아빠가 있어서 그런지 울지는 않았어요.
대신 엄마를 찾았죠.
"엄마 일하러 갔어. 이따가 저녁에 올 거야."
아이는 잠기를 떨치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뜨고 감았다 뜨고 그랬죠.
"더 자, 더 자, 아빠 맥주 마시게."
친구는 아이를 더 재우려고 애를 썼죠.
아이는 다시 잠들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유모차 안에 누워 있었어요.

아이가 깼기 때문에 제가 맥주를 사러 갔다 왔죠.
건물 유리창에 비춰본 얼굴은 살짝 붉더라구요.
둘 다 세 캔씩 마시고 네 캔째 사오는 길이었죠.
치킨을 팔기에 치킨도 여섯 조각 샀어요.

그늘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죠.
우리는 파라솔의 숲 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아이는 조금씩 활기를 찾더군요.
친구는 아이가 먹을 만한 것을 사러 아이와 함께 음식점으로 들어갔어요.
저는 혼자 남아 캔 맥주를 마셨죠.

빛을 받아 눈부신 길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어요.
어쩌면 그 너머에 있는 나무들, 어쩌면 그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아니, 굳이 뭔가를 보고 있었다고 말하기 힘든 거겠죠.
그냥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듯한 상태로 앉아 있었어요.

친구가 돈가스를 들고 아이와 함께 돌아오더군요.
"무슨 생각하냐?"
"응, 그냥..."
"여자 생각하냐?"
"무슨 여자?"
"왜, 회전그네 같이 탄 여자 있다며?"
"아니?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생각해."
"그거 슬픈 얘기네."
"뭐가?"
"누군지도 모르니까 슬픈 거 아냐?"
저는 아이에게 돈가스를 잘게 잘라 먹이는 친구를 잠시 바라보았어요.
"그게 뭐가 슬퍼, 벌써 잊혀졌는데. 잊혀진 다음에는 상관없어."
"그래?"
"그래, 앞으로 누구랑 그네를 타느냐가 중요한 거지."
친구는 혼자서 히죽 웃었어요.
"그 여자는 잊어 버리지 마라."
저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어요.

돈가스를 다 먹이고, 캔 맥주도 다 마시고,
우리는 동물을 구경하러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아이는 어느새 기운이 넘쳐서 뛰어다녔죠.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런지
몇몇 동물은 자리를 비우고 없더군요.
산양, 과나코, 얼룩말, 원숭이, 미니말...
그래도 꽤 많이 구경했어요.
날도 더운데 녀석들 참 고생이 많더군요.

사진을 찍으라고 만들어 놓은 바위 모양의 의자가 있었어요.
아이를 그 위에 올려놓았더니 그때부터 쉬지 않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더라구요.
재미있어 보였어요.
친구와 저는 가만히 서서 열심히 암벽 등반을 즐기는 아이를 지켜보았죠.
그리고 나무 위의 표범도.

마침내 아이가 내려왔을 때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어요.
나무들은 햇빛 아래 꼼짝도 않고 서 있었고,
여전히 무더운 여름 오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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