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친구

2010.07.28 00:15

차가운 달 조회 수:2956

 

 

시골에 살 때 가장 답답했던 것은
약속 없이 아무 때나 찾아가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점이었어요.
서울에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이 몇 놈 있거든요.

 

R은 영혼의 반쪽과도 같은 친구예요.
고교 시절부터 저는 이놈이 어딘가에서 잃어 버린 내 쌍둥이 형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죠.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떠들어도 이놈이랑은 지겹지가 않았어요.
모든 면에서 말이 잘 통하고, 무슨 짓을 해도 재미있고, 같이 있기만 해도 즐거웠죠.
집도 가까웠기 때문에 밖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늘 불러내서 술을 마셨어요.
치킨집에서, 순대국집에서, 포장마차에서, 동네 구멍가게 평상에서, 어두운 놀이터에서, 달이 뜬 편의점 파라솔 아래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아침이 와도 헤어지기가 싫었어요.
그래서 언젠가 술이 깨고 난 아침에는 함께 강원도로 바람을 쐬러 간 적도 있었죠.
강가의 조용한 펜션에서 실컷 잠만 자다 왔어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렸던 기억이 나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죠.
도원경의 '다시 사랑한다면'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좋아요.

 

시골에 살 때 제일 많이 찾아온 친구였죠.
한번은 아내와 아기까지 데리고 찾아온 적도 있어요.
이놈은 서른이 넘도록 단 한 명의 여자도 사귀지 못했는데
어쩌다 스무 살짜리 여자애를 만나서 딱 한 번 연애를 했고 또 결혼을 했어요.
인생은 한 방이라는 말이 이래서 있나 봐요.
굉장한 미인이에요.
그리고 술을 마시는 걸 무척 싫어하죠.

 

재미없어요, 정말 재미없어요.
인생이 그런 거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저도 불쌍하지만 이놈도 불쌍해요.
그놈의 술이 뭔지.

 

J는 인생 자체가 불쌍한 놈이에요.
뭐 그래 봤자 저만큼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좀 불쌍해요.
저는 이놈이 자기와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는 꼴을 본 적이 없어요.
늘 여자 때문에 인생이 이리저리 표류하죠.
여자와 무슨 문제만 생기면 저한테 전화를 해서 술을 마시자고 해요.
이놈 때문에 한밤중에 자다 말고 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죠.
얼마 전에 두 살 연상의 여자를 만나서 동거를 하고 있어요.
요즘은 전화가 없는 걸 보니 잘 살고 있거나 죽었거나 둘 중의 하나겠죠?
이놈은 워낙 정신없이 살고 있으니까 그러려니 해요.
뭘하는지 모르겠는데 항상 바빠요.
전화해서 뭐하냐고 물어보면 일하지 일해, 앵무새처럼 중얼거리기만 하죠.

 

저는 사람들에게 먼저 전화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시골에 살 때는 더더욱 그랬죠.
전화해도 할 얘기가 없고, 전화한다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안 했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제가 먼저 전화를 해야만 하는 놈이 있어요.
고교 시절 하교길에 늘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던 H,
저보다도 더 친구에게 전화를 안 하는 놈이거든요.
이놈은 제가 매일 전화해서 매일 술을 마시자고 하면 정말 매일 술을 마실 거예요.
하지만 제가 전화를 하지 않으면 자기도 먼저 전화를 하지 않죠.
이놈은 곰이에요, 바위예요, 돌부처예요.
정말 웃긴 게, 이놈도 평생 연애 한 번 못하다가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랑 두 달 만에 결혼을 했어요.
어쨌거나 잘 살고 있죠.
예전에 서로 여자가 없을 때는 미친 듯이 붙어다니다가 요즘은 두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요.
항상 제가 먼저 전화하죠.
요즘은 정말 친구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한 번쯤은 먼저 전화해서 술 마시자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쁜 새끼.

 

재미없어요, 정말 재미없어요.
요즘은 친구란 것들도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죠.
워낙 먹고 살기 바쁜 세상이니까요.
저 역시 뭐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래요, 그래서 누군가가 필요한가 봐요.
언제라도 둘이 함께 동네 치킨집에 슬리퍼를 끌고 가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사람 말이에요.

언제라도,

언제라도 말이에요.

 

가끔 집에 들어가는 길에 맥주를 사서 혼자 마시고 있으면
정말 기분 이상해져요.
뭐라고 말로 표현을 못하겠네요.
이상해져요.

 

대구에도 친구들이 있어요.
열다섯 살까지 거기서 살았거든요.
대구에는 동생들도 많아요.
제가 아는, 세상에서 제일 무식한 놈들이죠.

 

이놈들은 술만 마시면 전화를 해요.
약을 올리려고 전화를 하는 거죠.
또, 서로 술을 마시고 싸우다가 누구 말이 맞는지 제게 물어보려고 전화를 하는 거예요.
팔팔 올림픽 때 우리나라가 중국보다 잘했는지 못했는지 뭐 그딴 걸 물어본다구요.
아니, 이놈들은 제가 왜 그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아니, 이놈들은 술 마시다가 왜 그딴 걸로 싸우고 있는 거죠?

 

하루는 밤 열두 시가 넘어서 전화가 온 적이 있어요.
역시나 술을 마시고 약을 올리네요.
술 한잔 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내려오라는 거죠.
기름값 준다 걱정하지 마라, 어쩌고저쩌고.
한참 머리도 아프고 이유 없이 짜증이 막 날 때였죠.
지금 당장 내려갈 테니까 기름값 준비해 놓으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이놈들 버릇을 한 번 고쳐 줘야겠다고 생각했죠.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차에 올라타니 한 시였어요.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영동 고속도로, 중부내륙 고속도로, 경부 고속도로...

한참 가다 보니까 졸리더라구요.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죠.

온통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혼자.


배가 고파 충주 휴게소에서 우동도 한 그릇 먹었죠.
한 놈은 잘 오고 있느냐고 중간 중간 전화를 걸었고,
다른 한 놈은 지금이라도 차를 돌려서 그냥 집에 가면 안 되겠냐고 전화를 걸었어요.
기름값을 준다고 큰소리 친 놈이었죠.
결국 녀석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곳까지 찾아가는 데 세 시간 정도 걸렸네요.

 

새벽 네 시가 넘은 시간이었죠.
지하에 있는 주점으로 내려가니 술이 취할 대로 취해 뻗어 있는 두 놈이 있더라구요.
술집 주인은 둘이서 맥주 두 박스를 마시면서 다섯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노래만 불렀다고 증언을 하네요.
그놈들은 그전에 다른 곳에서 소주까지 마셨거든요.
결국 저는 두 놈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술도 마시는 둥 마는 둥 했죠.
"그러니까 내 핑계 대고 느그들만 실컷 처마셨네?"
제가 그렇게 말해도 이놈들은 오히려 저 때문에 무리했다고 난리를 치네요.
"그러게 내가 술 마시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잖아."
"어떻게 술을 안 마시노? 심심한데..."

 

다음 날부터 저는 일주일 동안 친구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밤마다 술을 마셨죠.
예전에 대학 시절에는 이놈 집에서 한 달 동안 숙식을 한 적도 있었어요.
그렇게 한 달 동안 죽치고 있었던 적이 두 번쯤 되네요.
한 번은 겨울, 한 번은 여름,
그해 여름은 정말 잊을 수 없어요.
그때 처음으로 여자랑 연애를 했거든요.
비가 많이 내렸던 여름이었어요.

 

낮에는 동생들이랑 하루 종일 당구장에서 살았죠.
정말 일주일 내내 당구만 쳤어요.
대구에는 지금 당구가 제2의 전성기라나 뭐라나.
짜장면을 시켜 먹고, 짬뽕을 시켜 먹고, 낮부터 소주도 마시고...
아예 당구장 주인이 안주까지 갖다 줬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날,
동생 중의 한 놈이 집에 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같이 살자고 하네요.
저는 잠시 심각하게 고민을 했죠.
그래, 만날 당구장에서 당구나 치면서 말이지.
친구놈은 하룻밤만 더 자고 가라고 옆에서 살살 부추기네요.
예전에 바로 이런 식으로 한 달 동안 붙잡혀 있었죠.
매일 밤 잠들기 전에는 소주 한 병을 사 와서 종이컵에 반씩 따라서 나눠 마시고.
저는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얼른 차를 출발시켰어요.

 

그 다음부터는 술 마시다가 전화를 해서 약만 올리고
기름값 줄 테니 대구로 내려오라는 말은 절대 안 하네요.
나쁜 새끼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정말 재미없었어요, 재미없는 하루였어요.
이것저것 정말 싫은 것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세계로부터, 저 자신으로부터.
오죽하면 아무 도움도 안되는 친구놈들 얘기나 늘어놓고 있겠어요.
아뇨, 아뇨, 사실은 보고 싶어요.
신념이고 야망이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조용히 물러나고 싶어요.
시골에서 장어나 키우면서 살고 싶어요.
술만 마시면 장어 양식 얘기를 하는 놈이 있어요.
그게 그렇게 돈이 된다네요.
장어도 실컷 먹고 좋죠 뭐.

 

정말이지 지금은 모두 너무 멀리 있다는 생각뿐이에요.
모두 너무 멀리 있고 저는 여기 처박혀 있죠.
여기, 즐거움이 없는 별에.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