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조금만 페이지를 넘겨도 그 아우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자의 문장은 명료하고 담박하며, 권위를 느낄 수 있고 당당

합니다. 무식해서 용감한 것과는 달리 오랜 살핌과 깊은 통찰 끝에 나온 성과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입니다. 이번에 아주 오랜만에 
가슴 설레고 두근거리는 그런 책을 만났습니다. 바로 남영신의 『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입니다. 보통 타인에게 책을 추천하는
일이란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의 취향과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만큼은 자신있게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땅의 국민이라면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저자는 아마도 이 분야에서 권위 있는 분이라 여겨집니다. 아주 유명한 분이기도 할 것이고 이 책 또한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책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며칠 전의 저와 마찬가지로 아직 소개받지 못한 분이 있다면 권해드리고 싶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어제 리브로 구매 인증샷을 올렸었는데(닉네임은 오늘 다시 구 게시판에서 쓰던 것으로 바꿔서 다릅니다.) 좋은 
책들이 많지만 단연코 이 책 한 권만으로도 매우 흡족합니다. 필사하는 기분으로 분량이 살짝 많았지만 단숨에 타이핑했습니다. 
저작권이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웹상에서 읽기에는 다소 긴 글이 되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머리말은 차치하더라도 
'들머리 : 한국어 바로 쓰기의 중요성'은 꼭 읽어보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유쾌한 금요일 되시기를!

추신1 - 글이 너무 길어져서 접기태그를 시도했었는데 현 게시판에서 접기태그가 적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추신2 - 며칠 전 haia님께서 '한+국어사전(남영신)과 민중국어사전의 풀이'란 글을 올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머리말

『토지』의 작가 박경리 님은 '언어란 강을 건너 피안에 도달할 수 있는 배'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는 '피안'을 '진실이 있는 곳'으
로 파악하고 비록 그 배가 피안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강을 건너 피안에 도달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언어 자신은 진리가 될 수 
없어도 진리에까지 우리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연장임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이는 불가(佛家), 특히 선가(禪家)에서 말이 끊어진 
자리에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과는 배치되지만, 나는 그의 생각이 소설가로서는 조금도 잘못이 없는 매우 당연한 생각이라고 보고 
싶다.
 
 만일 언어가 '배'라면, 나는 피안까지 우리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두 종류의 배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상당한 비바람 
속에서도 인간을 안전하게 빨리 실어 나를 수 있는 배가 있을 수 있고, 대단치 않은 비바람 속에서도 난파의 어려움을 겨우겨우 넘
기면서 어렵게 실어 나르는 배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통나무배 언어, 돛단배 언어, 증기선 언어, 원자력선 언어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배라도 잘 사용한 배와 잘못 사용한 배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싣고 가는 한국어라는 배는 성능이 어느정도일까? 영국인을 싣고 가는 영어, 일본인을 싣고 가는 일본어, 중국인
을 싣고 가는 중국어 등과 한국어는 어느 정도 성능의 차이가 있을까? 혹시 이들 언어에 차이가 있어서 피안에 가는 데에 어떤 언
어의 배를 타는 것이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배를 갈아타야 할까, 아니면 한국어라는 배의 성능을 
높이는 노력을 해야 할까? 영어라는 배나 일본어라는 배로 갈아탄다면 문제가 해결될까, 아니면 생각지 못한 새로운 문제가 생겨서 
갈아타지 않음만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까? 한국인이 한국어라는 배를 버리고 영어나 일본어라는 배를 타고 가기에는 위험부담이 
클 것이다. 그 배를 운행하는 기술이 미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서 몹시 서투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한국인은 한국어라는 
배를 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어라는 배를 타고 간다고 해도 모든 한국인이 하나의 배를 타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각자 자기가 만든 한국식 배를 타고 피안
을 향해서 항해해야 한다. 영국인은 각자가 만든 영국식 배로 항해하고, 일본인은 각자가 만든 일본식 배를 타고 항해해야 한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만든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자기의 배를 타고 최고의 성능을 낼 수 있
도록 만드는 것이다. 한국인이 한국식 배 가운데 최고 성능을 가진 배를 만들어 항해한다면, 일본인이 낡은 일본식 배로 항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피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이 낡은 한국식 배를 타고 항해한다면 성능이 우수한 일본식 배
로 항해하는 일본인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한국인은 최고의 성능을 낼 수 있는 한국식 배를 타고 항해하
고 있을까, 아니면 낡고 삐걱거리는 한국식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을까?

  이 책은 한국인이 타고 항해하는 한국어라는 배 - 이 배는 모두 한국식으로 기본 설계가 되어 있지만 개인의 건조(建造) 솜씨와 
관리 상태에 따라서 그 성능이 천차만별이다. - 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점검하여 문제점을 해결함으로써 한국인의 모든 배가 최고
의 성능을 갖추도록 안내하기 위하여 지어진 책이다. 만약 그 배가 돛단배라면, 배의 겉을 싸고 있는 삼은 제대로 붙어 있는지, 널
과 널 사이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박(대깔)이 완벽하게 메워 있는지, 멍에목은 배를 잘 지탱하겠는지, 개밥통은 돛대를 잘 받칠 
만하고 마룻줄은 손쉽게 돛을 오르내릴 수 있게 잘 묶여 있는지, 키따리의 한쪽이 쪼개져서 배의 방향을 바꾸는 데에 어려움이 생
기지 않겠는지, 노(櫓)는 놋좆에 알맞게 걸려 있어서 저어 나가기에 어려움이 없는지 등을 점검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잘 관리된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이 허술하게 관리된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이 책에서 한국어라는 배의 성능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 몇 가지 부분을 세밀하게 점검하였다. 이 점검의 결과로 우리
가 사랑하는 한국어가 좀더 차원 높은 언어로 발전하기 바란다.



들머리 : 한국어 바로 쓰기의 중요성

 한국어는 한국인의 언어이다. 새삼스럽지만 우리가 이 언어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면 참 많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
랑하는 마음을 전하고, 생각을 전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일 등 수많은 일들이 이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니, 우리의 모든 
삶이 이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언어란 인간을 인간답게 해 주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고, 한국어는 바로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길러주는 어머니의 언어이다. 그 한국어를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용하고 있을까? 그 한국어를 우리는 
어떤 기준에 맞추어서 사용하고 있을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난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행복하였네라.(유치환, 「행복」에서)

 시인 유치환은 평생 연모하던 이영도 시인을 향하여 애절한 사랑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유치환에게 이런 간절한 자기 마음을 표현
하도록 한 한국어는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 언어인가?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가 그의 유명한 글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언어
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보다는 인간이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라고 갈파한 것처럼, 이 시를 통해서 우리의 정서가 얼마나 
아름답고 곱게 순화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
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
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의 청년 남녀가 모
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 바란다.
(김구, 「나의 소원」에서)

 한국어로 이러한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김구 선생의 고매한 인격과 그의 사상을 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행복이다. 이런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한국어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런 문장을 쓰는 한국인을 더는 만
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돌고래 사회에서는 적령기의 수컷들이 늘 삼삼오오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은밀한 골목길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서 암컷을 얻으려
면 수컷 서넛이 앞뒤 좌우에서 함께 몰려다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암컷 꽁무니를 따라다녀 마침내 허락을 받아내
면 패거리 중의 한 수컷이 그 암컷을 취하는 영광을 얻는다. 다음날 또다른 암컷의 허락을 받아내면 이번엔 다른 수컷의 차지다.
 이렇듯 돌고래 수컷들은 그들간의 차례를 기지키면서 가까운 친구들끼리 협동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최근 동물행동학자들의 관찰
에 의하면 아무리 같이 다녀도 별 볼일 없어 보이면 설령 친구라 할지라도 버리고 자주 패거리를 옮겨 다니는 약삭빠른 수컷들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단 지조 없는 친구로 낙인 찍히면 아무리 차례가 와도 다른 수컷들의 방해로 암컷을 얻지 못할뿐더러 결국 
집단 따돌림을 면치 못한다.(최재천, 『생명이 있는 것은 아름답다』에서)

 위의 글은 우리에게 신비한 돌고래의 짝짓기와 공동 생활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만일 한국어가 일정한 틀을 갖추지 않았다면 
이런 정보를 얻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과 그것을 읽는 사람 사이에 한국어라는 표준화된 언어가 존재하
기 때문에 우리는 이처럼 매우 손쉽게 다른 사람의 지식과 경험과 생각과 감정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한국어는 이 역할
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이렇게 품위 있고 바른 문장이 있는가 하면 이상한 한국어 문장도 숱하게 많다. 어법에 맞지 않은 문장, 어휘를 제대로 이
해하지 못하고 쓴 문장, 문맥이 서지 않은 문장,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문장 등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 문장을 
보면 우선 그 속에 녹아 있는 고귀하고 아름답고 중요한 의미가 훼손됨을 느끼고, 나아가서 마음이 답답해지거나 짜증이 나게 된다.
우리의 언어 생활이 점점 후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부적절한 어휘 사용과 틀린 문장, 비논리적인 문장의 범람은 결국 한국어의 
기능을 위축시키고, 지식과 정보 교환의 통로를 질컥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한국인의 지적 발전을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
이 있다.

 질그릇이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고 들렸는데, 마당에는 아무도 없다. 부엌에 쥐가 들었나? 샛문을 열어 보려니까, "아 아 아
이 아아 아야!"하는 소리가 뒤란 곁으로 들려온다.(계용묵 「白痴 아다다」에서)

 위의 글을 보면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소리가 났다고 들렸는데'라는 부분이 바로 그렇다. 어떤 경우에 '소리가 났다고 
들렸는데'라는 표현을 써야 하는지, 이 표현과 '소리가 났는데'나 '소리가 들렸는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표현의 옳고 그름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결국 독자가 작품의 내용에 빠져드는 데 걸림돌을 만들어 놓은 셈이 되고 말았따. 아래 문
장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은 아니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 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 -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
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
운 벼 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놓는 새 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박경리, 『토지』에서)

 위의 글은 논리적으로 차분히 쓰지 않고 감각적으로 쓴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때부터'가 언제를 가리키는지, '이 바
람에'가 어느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지 알 수 없다. '무렵이래야'가 무슨 의미로 쓰였는지, '치러야 했고'나 '성묘를 해야 했고'와 
나누다 보면'에서 과거 시제가 현재 시제로 바뀐 이유가 있는 것 같지 않고, 어른들의 행위를 순서대로 나열하는 표현이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한나절은 넘는다'를 '한나절이 넘는다'나 '한나절을 넘긴다'와 비교하면서 특별히 골라 쓴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또 
'타작 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와 그 뒤에 오는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
는데'의 연결이 별로 매끄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이 세 문장은 온통 알 수 없는 이상한 한국어로 차 있다. 『토지』의 위대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문장이 되고 말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아래 문장은 더욱 해괴하다.
 
 春園(춘원)과 金東仁(김동인) 및 대부분의 문인들이 일본 유학생이라는 계층적 문제, 春園, 東仁의 처녀작이 모두 日語가 먼저였
다는 점, 金東仁의 한국어 첫 작품 「약한 자의 슬픔」이 한국적 배경과 거의 무관심하다는 점 등도 문제되겠지만 소설 창작법, 묘
사 방법조차가 일본식으로 착상되고 다만 그것이 거의 朝鮮語로 번역한 것이었다는 점의 인정은 바로 林和(임화)의 저 문학사 방법
론의 인정을 강요하는 것이 될 것이다.(김윤식, 『韓國近代作家論評論考(한국근대작가론평론고)』에서)
 
 이 글은 한국어를 잘못 쓸 수 있는 모든 실수들이 들어 있는 이른바 '한국어 오류 백화점'이라고 할 만하다. '처녀작이 일어가 먼
저였다', '한국적 배경과 거의 무관심하다', '소설창작법, 묘사 방법조차가 일본식으로 착상되고', '다만 그것이 거의 조선어로 번
역한 것이었다' 같은 표현에다, '점의 인정', '임화의 방법론의 인정'에서 쓰인 조사 '의'등을 보면 이 글도 한국어를 배운 지 얼
마 안 된 외국인이 쓴 것 같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가 우리 문학가의 이런 글들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나는 한국 문학가들
이 한국어를 잘 모르고 있다는 슬픈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논평했을 것이다.
 
 우리 나라 문인들이 쓴 수많은 소설(신소설부터 현대 소설에 이르기까지)에는 앞에서 든 것처럼 명백하게 잘못 쓴 문장이 수없이 
널려 있다. 문인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문인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펴낸 
책에도 비문법적인 글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이것은 단순히 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 있고, 한국인의 언어 능력 내지 지적 능력의 하락을 가져올 수 있는 중대한 문제라는 생각을 하였
다. 그래서 문학가들조차도 이렇게 잘못된 언어 생활을 하게 만들 정도로 한국어에 까다롭거나 어려운 부분이 무엇인지 밝혀내어 
이를 많은 국민들이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한국어가 까다롭거나 특별히 더 어려운 언어가 아닌데도 한국인에게 어렵게 인식되었는지도 모른다.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바에 따
르면 국민들의 한국어 능력이 6년 전에 비해서 상당히 낮아졌다. 성인의 '어문 규정 능력'이 평균 30점에 머물렀는데, 이는 6년 전
의 결과보다 21점이 낮아진 수치이다. 이 조사는 단순히 어문 규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아본 조사였기 때문에 국민들
들의 전반적인 언어 능력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한국인에게 한국어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결론은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결론이 '한국어는 어려운 언어'의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문 규정이나 어법이 까다로워서 한국어가 어렵
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어문 규정이나 어법에 맞지 않는 언어 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어문 규정이나 어법에 맞게 언
어 생활을 하려고 하니 한국어가 어렵거나 까다롭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잘 배우지 않고 막연히 얻어들은 대로 사
용하거나, 어법에 맞게 쓰기보다는 자기 언어 습관대로 쓰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어뿐 아니라 모든 언어가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말을 글자로 적는 경우는 어느 언어이든지 쉽지 않다. 한국어의 맞춤법, 영어의 철자법, 중국어의 간체자(簡體字), 일본어의 훈독
법(訓讀法) 따위는 한국인, 영국인, 중국인, 일본인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것은 끊임없이 배워서 익히지 않으
면 안 된다. 또 어느 언어에나 모국어 화자(話者)가 익히기 어렵고 까다로운 부분이 있다. 한국인에게는 한국어의 조사와 어미, 높
임말과 호칭 및 지칭이 어렵고 까다롭게 느껴질 것이고, 미국인에게는 영어의 시제, 단수, 복수 등과 관련된 일치와 호응이 어렵게 
느껴질 것이며, 프랑스인에게는 프랑스어의 성(性) 구별 문제가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각 모국어에 있는 이런 어렵고 까다로
운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익힐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언어를 처음 배우는 순간부터 단계적으로 꾸준히 익히고 학습하여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학습을 제대로 하지 않아 상당히 많은 모국어 화자가 모국어를 정확하게 사용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이들
은 결국 모국어를 어려운 언어로 인식하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앞의 문화관광부 조사 결과 성인의 37%가 한국어를 어려운 
언어로 응답했다는 사정은 한국인이 언어 생활을 매우 방만하게 해 왔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예로 든 문학가들의 글에는 어문 규정과 관련된 잘못보다는 어법에 관련된 잘못이 대부분이었다. 어문 규정을 몰라서 틀린 
문장은 문학가들의 어문 규정 능력이나 출판사의 교정에 의해서 걸러질 수 있기 때문에 거의 독자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그
러나 어법을 모르거나 오해하여 쓰는 경우, 깊은 생각 없이 어휘를 나열하는 데 급급하면 수많은 비문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한국어 문장의 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한국인의 지적 능력이 향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
금부터 한국어에 있는 까다롭고 틀리기 쉬운 어법을 찾아 이를 정확히 익히고 사용하는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자기의 중요한 뜻이 
문장 구성의 잘못으로 인해서 오해되거나 평가 절하되지 않도록 가장 어법에 맞는 문장을 쓰는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바르게 쓴 
언어와 문장 속에 아름다움과 참됨이 깃든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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