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대화...(홍대)

2018.12.21 15:27

안유미 조회 수:686


 1.휴...심심하네요. 왜 심심할까요? 


 아마도 그건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가는 시기가 끝나버렸기 때문이겠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은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갈 때가 행복하거든요.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아주 어린 시절...어떤 순간은 내가 뭔가 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어떤 순간은 나는 반드시 뭔가 될거라는 자신감에 불타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살던 시기가 좋았어요. 실제로 무언가가 되어보니 남은 건 행복이 아니라 책임뿐이거든요. 


 

 2.책임조차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인생에서 남은 건 소비뿐이고요. 하루하루 가진 것들을 완만히 소모해가며 죽음이 다가오게 놔둘 건지, 죽음으로 다가갈 건지 매일 결정해야 해요.


 그리고 아무런 결정도 안 내린다는 건 죽음이 다가오도록 내버려두는 일이겠죠. 이제 내게 남은 건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가 언젠가 죽는 것밖에 없다...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3.뭐 우울한 것처럼 썼지만 아직은 좋아요. 마음이 원하는 게 없더라도 몸은 아직 덜 열화됐으니 이런저런 욕구가 생겨나고, 욕구가 생겨나는 주기도 아직은 짧으니까요. 식사를 해도 쉽게 배가 고파지고 여자를 봐도 쉽게 여자가 보고 싶어지니...그런 것들을 쫓아다니며 살면 되죠 아직은.


 누군가는 '그럼 존경심에 관한 욕구는 어쩌냐? 인간은 짐승이 아니잖아?'라고 묻겠죠. 하지만 전에 썼듯이 그래요. 인간은 칭송을 필요로 하지만 칭송을 얻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누구의'칭송을 얻는가를 따지기 시작한다고 말이죠. 그래요...에고가 커져버려서 아무나의 칭송을 바라는 게 아니라 특정한 누군가의 칭송을 바라게 되는 거죠. 하지만 그걸 얻어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예요. 에고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도 커져가지만 권력이나 능력은 그냥 커지지 않으니까요. 



 4.휴.



 5.어제는 곱슬을 만났어요. 곱슬은 cj를 나와서 모 통신사에 들어갔어요. 곱슬은 '전에 먹은 맥켈란18은 맛있었어. 계속 생각나길래 내년에 여행을 갔다올 때 면세점에서 사오려고 해.'라고 말했어요. 


 사실 나는 위스키 원래 가격을 몰라요. 그야 '원래 가격'에도 도매가나 소매가가 있겠지만 어쨌든 그냥 매장에서 사서 가지고 돌아와 먹는 가격이요. 그래서 '한국에서 맥켈란18을 사면 대체 얼마길래?'라고 묻자 돌아온 건 의외로 비싼 가격이었어요. 나는 캬바쿠라에서 맥켈란18을 팔때 한 다섯배 정도의 가격으로 파는 건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예요.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그는 '그러고보니, 그때 생일파티에 가져온 맥켈란은 바에서 마시고 놔둔 킵술을 챙겨온 거지?'라고 물었어요. 그렇다고 하자 '혼자 가서 그렇게 돈을 쓰는 건 쓸데없는 짓이야.'라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6.그래서 말해 봤어요. 


 '이봐, 혼자니까 돈을 쓰는 거야.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있다면 편의점에 가서 800원짜리 캔커피를 사서 손에 들고 거리를 걷기만 해도 괜찮거든.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비싼 곳에 갈 필요도 없어. 서로에게 서로가 있으니까. 하지만 혼자라면...어딘가 허세쩌는 곳에 가야 하지.'


 그러자 곱슬은 청담쯤에 괜찮은 바를 아냐고 물어왔어요. 곱슬이 물어오는 건 당연히 여자가 안 나오는 바를 말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런 제대로 된 바는 몰라.'라고 대답했어요. 그래도 몇번 가본 기억을 더듬어 말해봤어요.


 '그래...제대로 된 바는 정말 그래. 응대에서부터 안주 하나의 만듦새도 완전 달라. 위스키를 시켜도 술맛을 잃지 않게 커다란 둥근 얼음도 넣어주고.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그래봤자 혼자서는 절대 안 가지만.'


 한데 문제는, 일반 여자를 만나도 그런 곳에 갈 일이 없다는 게 문제예요. 요즘 알게 된 사실인데 보통 여자들은 그런 곳을 안좋아하더라고요. 둘이 만나도 그냥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걸 좋아하지 그런 곳에 가서 뭔가 허세 술을 먹는 걸 안좋아한단 말이죠.


 그렇게 말하자 곱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래? 내 주위의 여자들은 허세를 정말 좋아하던데. 안 좋아하는 애가 없어. 인스타에 가보면 온갖 그런 거 투성이야.'라고 주억거렸어요. 하긴 그럴 것 같긴 했어요. 곱슬은 페북이나 인스타 같은 문화에 익숙하니까요. 인맥도 그쪽에 많고요.



 7.이번엔 곱슬에게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봤어요. 


 '한데 말이야, 요즘 돌아다니다 보니 결혼한사람들 사이에선 바람피는 게 그냥 패시브더라고. 그런데 곱슬 씨가 바람을 피지 않는 이유는 뭘까...내 생각엔, 곱슬 씨가 착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결혼을 잘한 거야. 그래서 바람을 피지 않는 게 아니라 필 필요가 없는 거지. 어때 맞아?'


 곱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어요. '맞아, 나는 정말 결혼을 잘했어.'라고요. 이건 사실 같았어요. 곱슬은 바람은 커녕 건전한 호스티스가 나오는 가게에도 절대 같이 안 가거든요. '건전한 호스티스'라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예요.



 8.슬슬 헤어질 시간이 되어서 정리하는데 곱슬이 포시즌스 호텔의 바 얘기를 꺼냈어요. '포시즌 호텔에 있는 찰스 바 괜찮은 것 같던데 말야.'라고요. 한데 나는 그런 컨셉 싫어하거든요. 그런 척하는 컨셉 말이죠.


 '아아. 그 호텔에 있는, 숨겨진 척 하는 바 말이야?'라고 비꼬았지만 곱슬은 딱히 비아냥거리는 걸로 듣지 않았는지 '응, 거기 말이지.'라고 대답했어요. 


 '이봐, 거기보다는 드래곤시티에 있는 바가 훨씬 낫겠어. 거기 vip테이블이나 가자고. 곱슬 씨가 아까 말한, 허세 쩌는 인스타 여자애들 좀 모아서 말이지.'


 그러자 곱슬은 0.5초 정도 조보아-골목식당ver-같은 표정을 짓고 대답했어요. '말했듯이, 나는 결혼을 해서 말이죠.'라고요.


 그렇게 드래곤시티에 가는 걸 또 실패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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