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게시판과 나쁜 게시판

2010.08.05 01:06

질문맨 조회 수:4380

" 어딜 다녀 봐도 우리 게시판 만큼 존중과 배려가 넘치는 좋은 게시판은 못 본 것 같아요. "  어떤 커뮤니티이건 이런 자랑 아닌 자랑이 올라오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소리가 나온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 게시판 변한 것 같지 않나요."라는 볼멘 소리가 들려오고 연이어서 "이렇게 가식적인 게시판인 줄 몰랐어"라는 야유가 쏟아지기 마련입니다. 좋은 게시판이 나쁜 게시판이 되는 원인은 게시판을 이루는 글의 쓰레드가 아니라 닉 뒤의 사람을 상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가장 좋은 게시판은 사람의 내음이 풍겨오는 게시판이고 가장 나쁜 게시판은 사람의 냄새가 가득한 게시판입니다.  그래서 오래가는 게시판은 사람의 냄새가 덜한 게시판입니다. 오래가는 게시판 중에는 마치 디씨처럼 모두가 할로윈 가면을 쓴 듯한 게시판도 있을 터지만  무심한 듯 글 너머의 사람을 괘념치 않은 게시판도 있습니다. 마치 사람같지 않았던 듀나님이 주인장이었던 이 곳도 사람의 냄새가 덜한 게시판 중 하나였지요.

 

하지만 어느새인가 듀나님의 여러가지에서 일상의 소소한 감정을 토로하기 시작한 것처럼 듀나 게시판에서도 사람의 냄새가 풍겨져 나옵니다. 오래된 닉들이 게시판의 존경을 받기도 하고 건프라 모임이나 듀다모 같은 이벤트성 오프 모임에서부터 듀솔클이나 시국좌담회같이 듀게의 구성원을 기반으로 한 소모임도 존재합니다. 온라인의 바이트로만 된 공간에서 오프라인의 목소리가 되는 광고를 싣기도 하고  무료한 일상의 술한잔을 함께 할 친구를 찾기도 그리고 삶의 이정표가 되는 사랑을 발견하는 것도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닙니다. 때문에 게시판에 애정이 생기는 것도 그 기대와 믿음 때문에 게시판의 사람으로 인해 아픔을 겪는 것도 필연지사로 따라 오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게시판은 글로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게시판의 개성을 발하는 것도 게시판의 구성을 하는 것도 온전히 글로만 평가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게시판에서 가볍게 쓰여지는 글이 얼마나 어리숙할 수 밖에 없을 까요? 글이란 사고의 외연을 구성하는 패션과 같습니다.  때론 멋진 장식과 문양으로 가득한 글이 있는가 하면 천박하기 그지 없는 반짝이 의상 같은 글이 있습니다. 단정하고 말쑥한 글이 있으면 허투른 넝마 같은 글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글이란 사고의 외피만을 조금 나타날 뿐 사람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니 모순으로 가득한 삶의 단면을 나타나고 있기에 자칫 주의하지 않으면 언밸런스한 모습으로 보는 사람의 눈을 찌뿌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충고와 야유를 던지는 것은 가능할 거예요. 하지만 다른 평범하기 그지 없는 글에서조차 팽팽이 잡아당겨 넝마를 만드는 일은 오지랖을 넘어서 폭력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길에서 보는 취향에 맞지 않는 모습을 한 사람을 타인이기에 지나치는 것처럼 취향에 맞지 않는 글이라도 타인이기에 반응을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글을 더욱 어리석게 하는 것은 그 소란스러움일 테니 말입니다.

 

 어리석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영민하지 못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나온 성실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글이란 단순히 쓰여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읽혀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게시판의 글이란 쓰여질 때가 아니라 읽혀질 때 완성되는 것이기에 글을 쓸 때는 어떻게 읽혀질지 감안하고 써야 하는 것일 테지요. 자신의 의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의도조차 알아야 하는 것.  이것은 단순히 좋은 교육을 받는 것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글이란 논리나 단어가 결여된 글이 아니라 소통이 부재하여 생명력을 잃은 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겸양과 타인에 대한 사소한 배려. 이런 마음가짐으로 작성된 글은 비록 부박한 실타래일 뿐일지라도 댓글이라는 뜨개질을 통해 하나의 멋진 옷이 되는 글이 될 수 있습니다.

 

 게시판에는 수런수런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오고 갑니다.   일상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지만 게시판에서는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 수 있는 여유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고백하지 못하는 소심함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 현실에 대한 우울함, 일상에서는 청승맞다고 소박맞을 일일지라도 게시판에서 그 작은 어리숙함을 고백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떨구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생활에서는 과감히 말하지 못할 성적 소수자의 권리와 정치적 소수자의 논리. 게시판에서는 목소리를 드높이지 않더라도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놓기를 희망합니다. 일상에서는 바쁘기에 혹은 관심이 없었기에 듣지 못했던 이야기와 관점을 아는 것은 자신의 편협된 경험을 알게 되고 하나의 배움이 되는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올바르다 하더라도 목소리를 드높여 강요를 하는 것은 조금은 거북한 체함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 몰랐던 사실이 두렵거나 부끄러워 지지 않도록 조곤조곤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실 가식적이라는 외부의 비판과 게시판 내부 인원끼리의 지분거림은 듀나게시판의 규모에 비해서 꽤 큰 편이라서 다소 의아하기도 다소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 여전히 듀나 게시판의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내가 모르는 책이나 영화 이야기를 보는 것도 좋고 소심한 일상 이야기나 소소한 예민함에 공감하면서 보기도 합니다.  외국어나 요리 잘하시는 분들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팔불출 같은 연애 이야기에도 가벼운 웃음을 짓곤 합니다.  항상 장황하고 뻔한 이야기를 하건만 제 글을 기꺼이 읽어주는 분들도 고맙고요. 무책임한 듀나님도 고생하시는 사춘기 소년님도 힘내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좋은 게시판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나쁜 게시판이 됩니다. 하지만 생각과 생각을 함께 펼쳐 놓을 수 있는 놀이터란 언제라도 소중한 것일 테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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