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는 한때 동료들에게 쌈닭으로 불리며 목소리도 크고 자기주장도 강하고 고집도 센 사나운 직장인이었습니다. 그때는 하루하루 해야 할 일과 감정과 스트레스가 월E가 날마다 치워내던 쓰레기 같았어요. 남은 건 더러운 성질과 악명뿐이었지만 결코 짧지 않았던 직장생활에서의 긴장과 스트레스는 갈수록 내성이 생기는지 웬만한 건 코웃음도 안 나올 정도로 저는 강해졌어요……? 아마 그래서 견딜 수 있었던가 봅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얼마간의 자유가 보장되고 귀찮은 일이 덜 생긴다는 것도 그때 알았어요. 완성도나 집중도 면에서 실수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만, 사람들은 저와 일하기를 조금은 부담스러워(라고 쓰고 싫어)했죠. 둥글둥글하지 않았으니까요. 듀게에 어떤 분이 쓰신 글처럼 ‘멀리하게 되는 타입의 사람’ 의 조건에 큰 몇 가지가 제게 해당된다는 것을 알고, 옛날 생각이 나면서 당시의 심각성(?)을 깨달았지만……지금도 저는 변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신경질적이고 노여운 게 많고 저 자신과 타인들의 빈틈을 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귀찮아요……. 더욱이 몇 년간의 공백의 후유증으로 저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엮여야만 연명될 수 있는 지금의 일상에 대한 공포로 가끔 숨이 막힙니다. 사실 요 몇 년 동안 저는 싫으면 안 봐도 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다 거절했으며, 크든 작든 누구에게 무엇을 도와 달라 부탁해 본 적도 없이, 누구를 쥐락펴락 하지도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좌지우지 당하지 않는 참으로 독립적이고 건조한 생활을 해왔고 그 견고하고 폐쇄적인 삶은 저에게 너무 잘 맞았어요. 내키지 않으면 피차간에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공존하는 방식의 삶이라고 못할 게 없을 만큼, 혹자는 ‘너에겐 바늘 하나 꽂을 틈이 없다’ 는 말로 저를 한탄했지만 사실 저는 괜찮았어요. 당신이 그런 만큼 누군가들은 희생했겠지 라는 논리가 적용될 타이밍이겠지만, 과연. 어쨌든, 어째요.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고 덕분에 저는 너무 많이 늙었고 하나도 즐겁지 않습니다.

 

  한 달 전에 누군가를 근 5년 만에 만났어요. 그 유명하다는, 그러나 처음 가 본 탑클라우드 33층은 제겐 별다른 감흥은 주지 못했고 그냥 산만하고 시끄럽다는 감상 뿐, 그 날 저는 너무 지쳐있었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에게 늙고 지친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최소한의 체면마저 상실하고 있었어요. 내가 늙은 만큼 상대방도 늙은 것이 뻔히 보이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은 척하고, ‘사는 거 하나도 재미없고 고통스럽다’ 라는 대전제에 ‘그래서 사람들은 뭔가 다른 것들을 찾는 거다’ 라는 부연 앞에서 저는 뭐라고 말했던가요. 저는 이상할 만큼 고통을 마주 대하는 뻔뻔함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이렇다보니 남들도 다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요. 대개는 피하거나 외면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무척 놀랐지 뭐예요. 그런데 이 놀라움이 뒤늦은 깨달음처럼 아 그나마 편리한 방법이 있었군 이라고 자각되는 게 아니라, 무슨 자기기만처럼 비겁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죽을 줄 알면서도 살잖아, 라던 현빈의 대사도 떠올랐지만, 저는 그냥 늘 직시하고 싶었어요. 내가 누구인가.

 

  2. 제가 일하고 있는 곳의 대부분의 구성원은, 미스코리아 뺨치는 외양에 기싸움은 청도 소싸움 같은 살벌한 곳이에요. 아름답고 우아하기 그지없(었다고 믿)는 이 장르 직업군의 속성이 얼마나 전쟁터 같고 정치적이고 열악한 지 깨달아가며 놀라고 있는 중이죠. 요즘은 도망가고 싶을 만큼, 분과 능력에 넘치는 일을 동시 진행하느라 맨땅에 헤딩하면서 날마다 마빡이 까지고 있죠. 그런데도 저는 누구에게 뭘 묻거나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아요. 학연으로 똘똘 뭉쳐 텃세가 장난 아닌 이 동네에서 저는 분명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뼈다귀냐’ 라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고 있고 이따금 사람들 앞을 지나칠 때마다 뒷통수가 후끈해요.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1과 같은 성격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다 귀찮아요……. 야심을 갖는 순간부터 적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저는 이 일에 아무 욕망도 없고 야망도 없고 스스로에게 비전을 제시하지도 동기를 부여하지도 않아요. 무미건조하게 그냥 일을 해내고 있어요, 그런데 일이 재미있어요. 재미보다는 흥미에 가깝겠지만. 고만고만한 틈에서 경쟁에 찌들고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빡세게 살아남아야 하는 이 분야의 다른 분들에겐 미안하지만 저는 앞으로도 이 일을 언제까지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계획도 없어요. 그런데도 일은 꽤 할 만 해요. 제가 지금까지 했던 어떤 시덥잖은 일보다. 이 나이에 이 분야의 실무는 생전 처음인데, 믿을 수 없이 노련하고 능숙하다는 사람들의 평가를 들으며 저는 이 일을 취미삼아 하고 있어요. 돈은 턱없이 안 되지만, 내적 외적인 허영심을 채워주는 간판들에 혹해서, 한 시간 다 되는 출근길에 시달리며 아침부터 지치다가도 “이번 정류장은 *****입니다.” 라는 안내방송에 맞춰 우아하게 버튼을 누르는 속물. 현실적인 조건들을 보면 열악하기 그지없는데, 그러고보면 저는 늘 이런 일 근처를 맴돌았던 것 같아요.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도 필생에 가장 하고 싶었던 두 가지 분야 중 하나였는데, 한때 그렇게나 몸살을 앓았던 이 분야에 이 나이에 그것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곳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 신기할 지경으로 사람 일이란 알 수가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하다가 정 싫어지면 저는 다시 원래의 제 포지션으로 돌아가면 그만이고, 이 일을 하면서 느꼈던 환멸을 밑천 삼아 더 예리하고 성숙한 심미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무상함으로 야근을 하는 요즘입니다. 피곤하지만, 다 늦게 어두운 거리를 걷는 느낌이 아주 나쁘지는 않아요. 그런데 가끔 눈물이 날 것 같아요. 그저 계절이거나 분위기 탓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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