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을 기억함

2021.02.15 17:10

어디로갈까 조회 수:1037

- 아버지도 듀게 눈팅하시나봐요. 대딩 때 쓴 이 글을 오전에 보내주셨어요. 저는 기억에도 없는 글인데 읽노라니 뭔가 뭉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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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인사동 '평화만들기'는 한 시절 문학동네의 사랑방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가봤던 이십년 전에는 아직 문단의 외로운 섬인 신인작가들에서부터 이미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있는 기성작가들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듯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들이 마주치고 확인되고 나누어지던 장소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그들의 파격, 그들의 나르시시즘, 그들의 허장성세, 그들의 자괴감, 그들의 후안무치...... 를  그곳에서 절감했고 멀미까지 느꼈던 것 같다.


유럽을 떠돌며 살다가 한국으로 잠시 돌아온 아버지(와 나에게) 친구분이 그곳에서 첫 환영주를 샀다. 그 자신이 문화부 기자였으므로 그곳이 그의 신문사 밖 거처였다. 추억을 포개며 드나들만한 장소들이 사라지고 없었던 탓에 아버지도 금방 그곳에 정을 붙이고 날 데리고 다니셨다.


까페 주인은 막 등단한, 작가로서의 폐활량이 달랑 단편집 한 권인 Y였는데  어린 내 눈에도 자긍심과 친화력이 똑같이 큰 사람이었다. 그곳에 온 가장 어린 손님이어서였는지  나에게 특별대우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저녁,  아버지가 일 보시는 동안 아이 특유의 자세대로 바에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카운터 안쪽에 연결된 주방 쪽문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세수라도 하고 나온 것인지 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구조 탓에 그의 얼굴이 바로 내 코 앞에 있게 되었다. 눈이 굉장히 큰데다, 이쪽의 이마가 저절로 숙여지도록 공격적인 눈빛이었다.

"아가, 나는 맥주를 소금하고 마신다. 것도 이렇게 손등에 올려놓고 혀로 살짝 찍어서. 멋있지?"

        

한 자리 건너 옆에 앉아 있던 혼불의 최명희 작가님이 눈을 부라리며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제어하셨다. 그러자 그가 내게 목례를 보냈는데, 실은 인사도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먹 하나를 내 앞으로 내밀며 그 손등에다 소금을 올려 놓았다. (아이에게 다음 잔의 안주로 쓰라는 의미였을까. ㅋ)


그의 비상한 글도, 글만큼 특별하던 성질도, 사표를 반복하던 고집도, 고집 속에 있던 결벽도 내가 전혀 모르던 때였다.

그가 운전을 못하는 희귀한 기자라는 것. 최명희를 국보처럼 아낀다는 것. 천상병에게 가지지 않아도 좋을 이상한 부채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 컴퓨터도 타자기도 만년필도 아닌 연필로만 글을 쓴다는 것. 연애하듯 마음을 기울여 단어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 가부장제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어한다는 것. 견딘다는 이디엄을 입에 달고 산다는 것 등등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내 직업이 그의 직업과 가까이 닿아 있었던 몇년 동안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책이나 잡지를 통해 멀리서 김훈을 본다. 특별히 마음에 인각된 사람이 아니므로 객관적인 관심 정도이다. 그런데도 그가 곤경에 처하면 신경이 쓰이고, 세간의 비난을 스스로 버는 어떤 위악엔 마음이 아프다.

어제 십 년만에 한 케이블 방송 대담 프로에서 우연히 그를 긴 시간 지켜볼 수 있었다. 변한 모습은, 세월이 내려앉은 흰 머리와 깊어진 주름만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속없이 부러워할 수 없는 느낌의 따뜻함이 있었다. 상처를 입을수록 따뜻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그런 사람인 듯싶다.


어린아이처럼 어눌해진 발음으로 그러나 거침없이 정직하게 그는 인터뷰어의 질문들에 답했다. 무너짐이 오히려 정당한 시대가 있다고. 시대가 무너졌는데 어떻게 개인이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추상화된 언어, 정치적인 언어의 뻔뻔함을 증오한다고.구체적인 언어로 살겠노라고. 나에게 소중한 건 보편성이나 원리가 아니라 나의 편견과 오류들이라고. 나의 편애를 유지하며 살겠노라고.

그리고 (이미 그렇게 살고 있겠지만) 집 안에서 여생의 시간을 혼자 살겠노라고. 혼자의 삶처럼 건강하고 건전하고 발랄하고 힘찬 삶이 없다는 확신 때문이라고.


그의 호를 어제 처음 알았다. 아름답고 쓸쓸한 의미였다. '봄에 몸이 마르는 슬픔' <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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