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 뒷마당'

2022.07.01 17:59

thoma 조회 수:699

< 내 생각에, 그는 나를 기다려. 내 생각에, 그는 나를 보고 싶어 하고, 나도 그를 보고 싶어 해. 우리는 매일 영국식 뒷마당에서 만나.

  무섭지 않아요?

  내 생각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열세 살이었어. 경희는 한동안 침묵하며 물끄러미 책을 들여다보다가,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무섭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면서.

  나는 경희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내 깊은 사로잡힘은 내 믿음을 이겼다. 나는 홀린 듯이 경희를 올려다보면서 대답을 졸랐다.

  내 생각에, 난 오늘도 영국식 뒷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놀았어. 이것은 모두, 그 사람이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야. 그는 내가 영국식 뒷마당에 가서 그네를 타고 놀 것임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경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책의 한 페이지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더듬거리며 덧붙였다. 내 생각에, 너도 그렇게 될 거야.

  뭐라구요?

  내 생각에, 너는 영국식 뒷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놀았어. >    

  

윗 부분은 배수아의 단편 '영국식 뒷마당' 후반부를 조금 옮긴 것입니다. 

경희는 할머니의 배다른 막내 여동생입니다. 

어릴 때 뇌수막염을 앓은 후 일생 동안 클리닉에 살았고, 자신의 집도 없고 결혼을 하지 않아 가족도 없는데 어떤 사정이 생겨 클리닉에 못 있게 되어 친척들이 몇 달씩 돌아가며 맡아야 합니다. 

'나'는 아파서 학교를 쉬는 날 가정부가 뒤처리를 해줄 뿐, 가족 전체가 없는 사람 취급을 해오던 경희와 마주칩니다. 경희는 책읽기에 집중해 있고 내가 보니 그 책은 빈 종이의 묶음입니다. 리듬을 타며 작은 종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글자 없는 책을 읽고 있는 경희와 나는 이상한 대화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위에 옮긴 부분에서 평생 외출하지 않은 경희가 '영국식 뒷마당'으로 가는 길을 찾은 이후 매일 거기서 논다는 얘기를 시선도 안 마주치고 혼잣말하듯 하다가 갑자기 '너도 그렇게 될 거야'라고 합니다. 마치 신탁을 내리듯이.


이 소설집의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영국식 뒷마당', '부엉이에게 울음을' 이렇게 세 편의 단편은 서로 물리는 측면들, 겹치는 인물사 같은 게 있어요. 발표 시기는 다른데 세 편을 함께 묶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해설을 쓴 신수정 평론가가 그 물려 있는 면들을 잘 보이게, 하지만 평론가의 언어라 쉽지만은 않은 표현을 써서 풀어놓고 있습니다. 신수정 씨는 배수아 작가가 등단할 시기부터 그 신선함과 정서에 공감하며 지지의 뜻을 담아 평을 썼던 이입니다. 두 분이 나이도 같은 게 기억나네요.

이 작가의 소설이 자주 그렇듯 현실과 환상이 분명하게 나뉘어지지 않는 장면이 있어 페이지를 넘기다가 다시 읽기의 필요를 느끼곤 합니다. 저는 '영국식 뒷마당'만 되풀이 읽었어요. 가장 짧고 가장 시적이며 아름다웠습니다.  


여기에 수록된 세번 째 단편 '부엉이에게 울음을'에 보면 글이라곤 써본 일 없는 '나'는 이십 대 후반의 어느 날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배수아가 작가가 되고자 결심했던, 여러 매체에서 밝힌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 개인 생각이지만 이 소설집은 배수아 작가에게 책이란 무엇인지, 이분이 생각하는 작가란 무엇인지에 대한 자전적 탐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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