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사랑한 나무들을 읽고

2023.04.15 18:09

Sonny 조회 수:218

이 책은 저에게 두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나무"라는 것은 어떤 존재인가. 그 나무를 각기 다르게 표현하는 미술은 어떤 식으로 세계를 재해석하는가. 이 책을 읽은 뒤 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차창 너머로 여러 나무들을 조금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미술에 문외한인 저조차도 여러 그루의 나무에서 미술적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보게 됩니다. 저 나무의 나뭇잎들은 어떻게 점점이 찍을 수 있을까. 저 정도로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라면 보다 추상적으로 뭉갤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무들이 자라는 이 세계는 이미 신의 화풍 아래 완성된 한 폭의 캔버스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화가들은 '아름답다', 혹은 '푸르다'는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해석을 맹렬히 거부합니다. 인기가 높은 화가인 클림트와 고흐의 나무들이 이 책의 앞장에 배치된 이유는 보다 유명한 재해석들로 나무를 새로 보라는 초대장인 것 같습니다. 이들의 그림 속 나무들은 신이 그려놓은 나무들을 대범하게 뒤틀어놓았습니다.

클림트의 <배나무>는 나무가 빛을 머금은 존재처럼 보이게 그려놓았습니다. 중간중간 노랗게 칠해진 배들은 과실이 아니라 보석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나뭇잎의 짙은 원색과 어우러지면서 명멸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나뭇잎들과 배 그리고 수많은 색들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의 모든 공간을 점령해놓았습니다. 클림트는 자신의 다른 작품에서도 보이는 극도의 화려함과 번쩍거림을 나무에도 적용했습니다. 그가 그린 나무는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가득한 재물의 이미지를 풍깁니다.

고흐의 <사이프러스>는 빛을 배제한 것처럼 사이프러스 나무를 구현해놓았습니다. 누가 봐도 첫눈에 아지랑이 혹은 불꽃을 연상시키는 고흐의 나무는 나무 자체의 내부적 에너지가 전체공간을 왜곡시킨다는 느끼마저 듭니다. 그 나무는 하늘로 상승하려고 꿈틀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흐의 눈에 사이프러스 나무는 고정되어있고 반응이 미약한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솟아올라가는 에너지의 결집체였던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이 나무를 볼 때 그 자체로 보고 멈췄을 해석을 두 화가는 훨씬 더 밀고 나아갔습니다. 한명은 빛이 반사되며 규모가 과장된 모습으로, 다른 한 명은 빛을 배제한 채 연속으로 일그러지는 형태가 과장된 모습으로 나무를 표현했습니다. 화가의 자기 세계를 만났을 때 나무는 완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피사체로 돌변합니다.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은 계속해서 각기 다른 화가들의 나무를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한편으로 각기 다른 화가의 나무들이 모여있는 숲을 산책하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열대기후의 숲에서 갑자기 메마른 숲으로 건너뛰는 것처럼 화가들이 재창조해놓은 완전히 다른 숲들을 탐험한다고나 할까요. 하나의 소재로 다른 표현들이 묶여있는 이런 책은 오히려 소재 자체에 대해 깊은 생각을 유도하더군요. 특히 그 표현의 추상성이 전혀 다른 나무그림들 혹은 나무라고 하기엔 심하게 짓뭉개진 어떤 그림들을 보면서도 왜 나무인 걸 알 수 있는지, 나무의 어떤 시각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추적하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제가 제일 흥미롭게 봤던 화가의 나무는 클레어 켄식과 르네 마그리트입니다. 클레어 켄식은 일반적으로 '녹음'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나무들의 배경에 노을을 덧입히면서 불길하고 비밀스러운 기둥들처럼 나무들을 그려놓았습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나무들은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뻔뻔한 연막같습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나무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해독불가의 프랙탈 기호처럼 그려진 게 신비롭더군요. 가지들의 끝이 하나의 점을 이루면서 완벽한 형태의 도형을 이룬다는 점에서 나무가 사실 얼마나 이상한 자연인지를 다시 곱씹게 됩니다. 그 두 화가의 나무들을 보면서 저는 일상 속의 나무들이 어떤 불안과 암호를 숨기고 있는지 혼자만의 미스테리에 빠져들게 됩니다.

@ 그림 파일 첨부가 어려운 관계로 책이 있으신 분들은 책을 참조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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