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일기...(모임, 탈출)

2018.04.01 19:17

여은성 조회 수:859


 1.아 지겹네요. 이건 어쩔 수 없어요. 나는 아픔에 대한 내성이 없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를 겪으며 익숙해지거나 면역이 생기지만 난 아니예요. 아주 조금이라도 지겹거나 아주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미쳐 날뛰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지겹다고 말해도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1그램의 지겨움만 있어도 투덜거리니까 심하게 지겨워 보일 뿐이죠. 99%의 사람들과 비교하면 훨씬 덜 지겹게 살고 있어요.


 배고픔은 뭔가를 잔뜩 먹으면 몇 시간은 느낄 일 없어요. 하지만 지겨운 건 식욕을 해결하는 것과 다르거든요. 노는 동안만 잊을 수 있을 뿐, 아무리 신나게 놀아도 차를 타고 돌아와 앉으면? 다시 미칠듯이 지겨워지는 거예요. 지겨움이라는 감정은 태워 없애려고 해도 절대 타 없어지지 않는 장작과도 같은거예요. 지겹지 않으려면 밖에서 체력을 다 쓰고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잘 수 있도록 세팅해야 하죠.



 2.요전엔 자연인들 모임을 갔어요. 일반인이라고 쓰면 늘 느낌이 이상해서 고민하다가, 앞으론 자연인이라고 쓰기로 했죠. 이 모임에 가게 된 일은 나중에 써보죠.


 여러분도 알겠지만...솔직이 일상적인 건 재미가 없어요. 왜냐면 뻔하잖아요. 대부분의 일상적인 상황 하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남자가 여자에게 들이대야 해요. 껄떡쇠라고들 하죠. 그렇게 들이대는 건 여자 입장에서 귀찮게 여겨질 수도 있고 짜증나게 여겨질 수도 있고 섬뜩하게 여겨질 수도 있고 가소롭게 여겨질 수도 있겠죠. 물론 좋게 여겨질 수도 있고요. 어쨌든 남자의 접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여자가 몽땅 결정하는 거예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두려워하는 남자들은 여자에게 껄떡대기를 포기하는 거고요.


 그래서 일반인들 모임을 가면 어떤 남자들은 여자에게 껄떡대거나, 어떤 남자들은 2차 3차로 노래방에 따라와서까지 무심한 척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거나...뭐 그러는거죠. 



 3.하지만 이건 내게 매우 심심한 거거든요. 그야 이게 정상적인 상황이란 건 나도 알지만, 정상인 게 반드시 익숙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정상적인 모임에 가면 처음엔 신선하다가 곧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이게 뭐야! 여자들 쪽에서 내게 껄떡거려야지, 내가 여자들에게 껄떡거려야 하는 곳이라니?! 뭐 이딴 곳이 다 있어? 이건 잘못됐어!'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정말 다른 옵션이 없는 경우를 빼고는, 내 쪽에서 여자에게 먼저 접근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거든요. 특히 미투운동의 탄환이 이곳에 빗발치게 된 후로는요. 흠. 그야 난 미투운동 탄환에 맞아도 별 대미지가 없겠지만, 조금은 따끔거릴 테니까요.



 4.휴.



 5.어쨌든 모임에서 이런저런 걸 먹어봤어요. 태어나서 두번째로 막걸리도 먹어봤죠. 굴전이란 것도 먹어봤어요. 물론 그게 굴전이란 건 줄 몰랐기 때문에 실수로 집어먹은 거고 다시는 굴전을 안 먹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갈비찜이란 것도 먹어봤고...뭐 그럭저럭 유익했어요. 


 하지만 한 시간쯤 지나자 매우 지겨워지기 시작했어요. 여자들이 내게 껄떡거리지 않고 있는 이 상황이 말이죠. 그래서 모임 1차에서 식사를 했으니 이곳에서 이탈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사람들이 일어나서 2차를 가자고 했어요. 그리고...도저히 그걸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2차를 당연히 가야 한다는 듯...질서 정연하게 2차 가게로 향하는 거예요. 그래서 따라가며 고민했어요.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빠질까 하고요.


 그러나...내가 거짓말 하는 걸 싫어한다지만, 말해봐야 어그로만 되는 말을 할 필요는 없거든요. '이거 미안한데 말야, 여러분은 재미가 없네? 그러니까 난 더 재미있는데다 더 예쁘기까지 한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봐야겠어.'같은 말 말이죠.


 게다가 나는 거기서 막내라서요. '막내야'라는 기분좋으면서도 기분나쁜 호칭으로 불리고 있죠. 그래서 이곳을 떠날 뭔가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내야 했어요. 그냥 이곳에서 떠나지 않고 2차를 따라간다...라는 선택지는 절대 선택하기 싫었어요.



 6.고민 끝에 술에 취한 척 하기로 했어요. 사실 여기서 술에 취했다고 하면 2차를 가기 싫어서 핑계대는 거라고 눈치채일 것 같았지만...그래도 해야만 했어요. 술에 취한 척 하자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어요.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취할 수 있냐고 말이죠.


 '어제도 술을 진탕 먹어서요. 컨디션이 안 좋네요.'라는 핑계는 이미 지난 정모에서 빠져나올 때 써먹은 참이었어요. 새로운 핑계를 대야 했죠. 그래서 방금 전에 막걸리를 마신 걸 떠올리고 말을 만들었어요. 꾸벅꾸벅 졸다가 정신차린 척 하면서요.


 '아, 이거 정말! 소주랑 막걸리를 섞어먹었거든요!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이게 말이죠. 제가 한 가지 술만 마시면 정말 잘 마시는데 섞어먹으면 금방 취해요!'


 말하면서도 '정말 이런 말에 사람들이 넘어가 줄까.'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곳에서 어시스트가 들어왔어요. 앞자리에 앉았던 여자였어요.


 '그러게. 니가 쎈 술을 마시다가 약한 걸 마시더라고. 섞어 먹을 거면 약한 것부터 마시다가 쎈 걸 마셔야 하는데. 그래서 금방 취한 거야.'


 여자가 하는 말을 들으며 '정말 쎈 술을 마시다가 약한 술을 마시면 취하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하지만 어쨌든 그 여자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7.마침 거긴 가로수길이었어요. bmt 가로수길점이 있는 곳이죠. 자칭 스튜어디스나 자칭 레이싱모델들이 많이 일하는 가게예요. 간만에 가볼까 하고 있었는데...누군가가 밖까지 바래다 주겠다며 따라나왔어요. 문제는 bmt 가로수길점은 바로 앞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조금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거기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길래 bmt를 가는 건 포기하고 딴 곳으로 갔어요.



 8.여기서 약간 무서운 건...그 모임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듀게를 하면 어쩌죠? '가로수길' '굴전' '갈비찜' '2차' 'bmt' '막걸리'같은 키워드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당사자들은 보자마자 알 수 있는 글이니까요.


 혹시 모임에 있던 누군가가 이 글을 봐도 이해해 주겠죠. 심심해서 빠져나가려고 그런 거지 나쁜 짓 한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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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를 처음 먹은 날의 일기도 나중에 써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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