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함이 블라블라

2019.07.07 22:13

Sonny 조회 수:2136

게시판에서 논쟁을 보다보면 의아해요. PC함을 지지하는(이 문장조차도 이미 상당한 어폐지만) 사람들은 늘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들고 와서 논지를 펼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샐 틈이 없어요. 대부분의 사건들은 비인간적이고 폭력 그 자체여서 변호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PC함을 피로해하는 사람들은 항상 두루뭉실합니다. 추상적인 관념, "PC"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련의 반응들만 가지고 와서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해요. 그 결과 문장들이 결국 발화자의 호오뿐입니다. 뭔가 뭉뚱그려지는 커다란 개념이 있기는 있는데, 그것 때문에 싫고 짜증나고 그 지지자들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푸념에서 그쳐요. 그걸 볼 때마다 친척 할아버지의 분노가 생각납니다. "어디 젊은 여자들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찍찍 피고 있더라!!" 그러니까 그게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일말의 논지 없이 그냥 자기딴에는 안되고 보기 싫다는 감정만이 주를 이루는 그런 문장이요.


모든 인간이 항상 정치적일 수는 없습니다. 가끔은 정치적 올바름이 낯설게 다가올 때 그에 적응하기 싫을 때도 있고 굳이 의견을 표명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논쟁에 발을 담그면, 그 때부터는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피력할 의무가 생기지 않을까요. 최소한 성인이라면, 본인의 옳음을 관철하거나 보호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태도가 당위의 측면 뿐 아니라 효율의 측면에서도 필요할 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무엇이 옳다고/그르다고 생각한다, 라는 주장은 당연히 근거가 있어야 할 거에요. 그런데 PC함에 대한 피로를 토로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전혀 인정받을 수 없는 선각자의 태도를 취하며 결국 자신의 기분을 근거로 내세우는 데 급급합니다. 그 주장을 조금만 밀고 나가도 우리는 일베를 욕할 수 없게 되고 황교안과 박근혜씨를 비판하기 곤란해지는데도요. 각자의 옳음, 자기 나름의 생각은 세상 누구에게나 있는데 그 옳고 그름의 정합성에서 만인의 평등함을 전제로 내세우는 건 무슨 배짱장사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정연한 의견은 분명히 가를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논쟁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내 말에 꼬투리를 잡느냐는 이런 태도는 욕먹기 싫다는 자존심말고는 아무 근거도 없어보입니다. 깊게 들어가기 싫으면 얕은 생각으로 말을 하면 안되는 법인데도.


게시판에서 일어나는 PC 논쟁은 그렇게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최근 들어 베스킨라빈스의 광고는 미성년자 여자의 입술을 클로즈업하고 어른의 성적 포즈를 취하게 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용납을 하면 안되는 광고였습니다. 그런데 그 비판에 뒤따르는 반론들은 오로지 진영논리에 의거한 비아냥이나 욕 뿐이에요. 그러니까 토론이 이뤄지기는 커녕 오히려 쌍욕과 조롱의 흙탕물 속에서 다 구르자는 논의의 평균적 하락을 도모하는 셈이 되는데, 엉뚱하게도 그 책임은 다 PC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향합니다. 왜 그렇게 싸우냐, 왜 날을 세우냐, 너네들은 다 남들을 깔아뭉개는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느냐 등등. 아니오. 안그렇습니다.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하고, 그 잘못된 걸 문제없는데 트집이나 잡는 사람 취급하는데에 동등한 반격을 날리는 것 뿐이죠. 저는 이 게시판을 적극적으로 이용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매번 알맹이 없는 디시인사이드 식 비아냥을 주무기로 삼는 레토릭 파산자들에게 굉장한 실증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게시판에 오래 상주한 사람들은 얼마나 더 하겠어요. 대화의 의지는 없고 항상 "ㅋㅋㅋㅋ"같은 비웃음으로 정신승리만을 거두려는 온라인 아큐들에게 예의와 친절을 갖추고 설득하고 설득하라? 현대인에게 그런 다정불심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굉장한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엑스맨 영화가 왜 흥행하고 매그니토 캐릭터는 왜 인기가 있겠어요. 말이 안통하는 상대들을 절대적 힘으로 찍어누르는 게 과정을 생략하고 정의를 관철하는 일종의 "혁명"과 관통하기 때문일텐데.


저는 이 게시판에서 임신중단 이슈와 한국의 중년 남성에 대한 이슈에서 반론을 펼치는 사람들의 레토릭을 거의 다 흝었기 때문에 딱히 그런 싸움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설득한다 한들 저에게 남는 것도 없고 제 시간을 그런데에 소모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그런데 질낮은 주장들이 어떤 주류 의견을 형성하고 사유를 차단하는 집단적 현상을 일으키는 걸 보면서 좀 위기감을 느끼긴 해요. 그러니까 이런 것 하나는 좀 공통의 규칙으로 세워지면 좋겠다 싶어요. 나는 PC 함이 필요하다 / 피로하다 같은 주장에서 PC함의 무엇이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형성하는지 구체적 사례와 현상에 대한 최소한의 분석을 곁들이는 거요. 이 세상에서 맥락 없이 성립하는 정치적 주장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일제치하 시대의 한국인이 일본고위 관리나 군인을 죽이면 그건 독립운동으로서의 맥락이 형성되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PC함의 무엇이 싫고 짜증나고 그걸 외치는 사람들을 비웃을 수 있는 근거는 뭐란 말인가요? 공중파 방송에서는 대참사 유족들을 비웃는 자막과 영상이 송출되고, 한국의 탑 연예인 남자들은 집단강간과 불법도촬을 즐기면서 낄낄대는 이 나라에서, PC 함이라는 건 얼마나 잘 지켜지고 누가 얼마나 극성이길래 무슨 피로를 느낀다는 것일까요. 베스킨라빈스의 광고 논란이 정말 광고나 표현의 자유만으로 끝나는 문제일까요? 미성년자가 자발적으로 술을 먹고 30대 남자와 섹스를 했을 거라며 재판부가 성인남자에게 강간죄 죄목에서 집행유예를 주는 나라인데? 정말 궁금합니다. 이런 맥락을 겪으면서도 그래도 나는 너네들이 시비 안걸고 내가 뭐라든 보기 싫은 싸움은 안했으면 좋겠다는 것인지.


이제야 시작되고 반복되는 싸움에서 어차피 관중으로 남아있을 거라면,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은 혼자만의 사치로 고이 접어두는 게 예의일 거라 생각합니다. 누군 싸움 하고 싶어서 하고 누군 키배 뜨고 싶어서 뜨나요. 베스킨 라빈스 광고가 무엇이 잘못되었고 거기에 반론을 펼치는 사람들의 논리와 태도는 어떤지 좀 정확한 저울이라도 갖다놓고 잰 다음에 이야기를 좀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에서 옳고 그름의 맥락을 삭제한 채 무조건적인 평온과 고요를 강요하기 전에요. 그거야말로 아무말이나 하며 생각과 언행의 평등을 주장하는 빻은맨들의 소망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회적 현상들에 대해 우리는 과감히 존중을 포기해야 하고 빼앗긴 존중을 되찾기 위해 가혹하리만큼 배제해야해요. 아직까지 한국의 메이저리티가 일베에 표면적으로 취하고 있는 그 태도처럼요. 그게 아니라면 분명히 말을 합시다. 이 이슈에 대해서 이런 PC 함을 누군 주장하던데 현 사회에서 PC 함은 이 정도로 충분히 지켜지고 있고 나 역시 그걸 열심히 실천하고 있으니 그만 좀 시비걸었으면 좋겠다 하는 식으로라도요. 날을 세우고 쳐낼 걸 쳐내며 한발짝이라도 공의를 끌어와야 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태도일 것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하품과 기지개 타령으로 중단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요.


그러니까, 왜 어떤 분들은 안티 PC 를 자처하고 있는 건가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요? 혹은 나른한 무관심, 치기어린 시니시즘이 올바름이라 믿나요?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전 진지한 사람들의 편에 서고 싶어요. 화를 내고, 진절머리를 내면서, 열심히 고민하려는 사람들 말이에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389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231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0709
124388 [넷플릭스] 도적....보시는 분 계신가요? [1] S.S.S. 2023.10.03 320
124387 이야기 듣기의 힘듦, 이야기 하기의 시대 [15] thoma 2023.10.03 484
124386 삼국 - 무영자 (2018) catgotmy 2023.10.03 118
124385 아샷추가 뭔지 아세요? [7] 정해 2023.10.03 568
124384 [왓챠바낭] 뱀파이어로 철학하는 영화, '어딕션' 잡담입니다 [2] 로이배티 2023.10.02 319
124383 황금을 놓치다 상수 2023.10.02 145
124382 소림목인방 돌도끼 2023.10.02 196
124381 유권자들이 피곤해지는 2024 미 대선 리턴매치(again 바이든 V 트럼프) 상수 2023.10.02 339
124380 프레임드 #570 [4] Lunagazer 2023.10.02 90
124379 [왓챠바낭]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이던 시절, '네트워크' 잡담입니다 [10] 로이배티 2023.10.02 432
124378 고교생 일기 1회, 강수연 주연 [6] 왜냐하면 2023.10.01 303
124377 웨스 앤더슨 넷플릭스 신작 기상천외한 헨리슈거 이야기 외 3편 연작 [2] 상수 2023.10.01 437
124376 AI 활용도 상당히 높네요. [4] theforce 2023.10.01 413
124375 [연휴바낭] 연휴동안 본 영화&시리즈2 [4] 쏘맥 2023.10.01 244
124374 청춘일기 1화, 정윤희 주연 [1] 왜냐하면 2023.10.01 209
124373 프레임드 #569 [4] Lunagazer 2023.10.01 68
124372 "왕좌의 게임" chaos is the ladder 몇 시즌 몇번째 에피소드인가요? [2] 산호초2010 2023.10.01 237
124371 강원도의 힘 (1998) [4] catgotmy 2023.10.01 269
124370 잡담 - 항저우 아시안게임, 진심을 너에게, 명절의 고난 [1] 상수 2023.10.01 195
124369 한국판 사망탑 [5] 돌도끼 2023.10.01 40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