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꾸민 생기없는 여자.

2010.07.04 23:41

이울진달 조회 수:7032

1.

 

낮에 사고가 있었다더니, 어째 저는 아직도 듀게가 느리게 느껴지네요.

다른 사이트보다 훨씬...다른 분들은 괜찮으신가요?

 

2.

 

늘 일이 많다고 징징대 왔지만, 어느 순간 아-이것은 나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저는 일을 좋아해요.

그것도 너무 너무 좋아합니다.

그런데 일이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를 또 받아요.

 

원래 바쁘게 사는 편이었어요. 학교 다닐때 부터.

다만 그 바쁘다는게 남들처럼 학점, 영어 그런 쪽으로 실현되지 않아서 그렇지..(.. )..

동아리, 아르바이트, 시민단체, 자원봉사, 정치단체, 인턴(거의 동아리 성격의, 같은 정치지향 하나만으로 모인 작은 회사였죠)..

대학교 1~2학년때의 다이어리만 봐도 10분 2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면서

한달 4~5권씩 책 읽고 취미생활하고 연애하고 고양이 키우고 

일주일에 술 안마신 날이 1~2일 뿐일 정도로 사람들 만나고 살았으니.

 

당시에 친구들이 저더러

'5분전에 경영관에 있더니 지금은 학관앞에 있다'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라고 놀려댔었죠.

 

취직을 하건 뭘 하건 그 생활은 쭉 이어졌어요.

아무 일 없는 상태를 스스로 못 견뎌하는 편이라서

늘 시간적, 체력적 여유 이상으로 일을 벌여놓고 종종거리며 다니는 타입.

 

지금 회사에 다닌 지도 곧 2년이 되어가는데

너무 많은 업무량때문에 압사하겠다-압사하겠다 노래를 부르고 다니다 문득

이 역시 내가 자초한 일이란 생각에 머리가 아파오네요.

 

일 중독자들은-특히 사람을 쓰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일 중독자들을 알아보는 법인가 봅니다.

늘 그런 사람들만 만났어요. 저는 그냥 막연히 내가 일복이 많아서, 혹은 우연히 일 좋아하는 상사들을 만나서-라고 생각해왔는데

회사 생활을 하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일을 쳐 내더군요.

물론 상사가 일 중독자인 경우, 과도한 업무를 쳐내면서 상사에게 찍혀서 관계가 틀어지는 일도 발생하지만

대체로 트러블은 속상하나 이런 경우는 받아들일 수 없다, 라는게 확고해 보였어요.

 

이게 저와 그 사람들의 차이점인것 같아요.

저는 일이 많은 상황에서 그 상황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립니다.

...일이 좋거든요.

 

단순한 노가다라도, 아, 난 신문 보는게 좋으니-책 보는게 좋으니-이런 것을 찾아보는게 좋으니-이 일이 재미있어, 라고 생각해 버려요.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단 한두가지의 마음에 드는 작업과정이 있다면 그것 하나로 버티고

이 일을 하는게 내 경력에 도움이 되겠구나 싶으면 아까워서 놓지를 못하고

열심히 하다보니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오면 또 그게 기쁘고 재미있어서 계속합니다.

 

심지어 평소 야근에 주말출근까지 해 가면서 일 하는데도

그동안 해 보지 못한 새로운 제안이 들어오면-업무량 치사율 경고가 뻔히 느껴지는데도 욕심이 나요.

어떻게든 스케쥴을 조정하고 타협을 봐서 그 일을 합니다.

아주 조금 참여하는 정도라도, 그 시스템을 파악할 수준으로만 참여할 수 있다면 하는거예요.

나중에 업무 평가 등에서 기여도가 전혀 반영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수준인데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그렇다보니 처음에는 일 많다, 많다 하며 징징댔지만 이게 전혀 제가 징징댈 일이 아니더군요.

제 탓인걸요. 내가 욕심부려 그런거고, 힘들어, 힘들어 하면서도 어떻게든 하는거예요.

심지어 아침 8시에 출근하다가 바로 응급실에 들러서 2시간 누워있다가 다시 출근한 적도 있어요.

다들 저더러 미쳤다고 하고, 부모님과 남자친구는 엄청나게 화를 내는데

사실 그런 상황에서 배 째라 한다고 누가 저를 잡아 죽일것도 아닌데 기어코 회사에 나가요.

 

선배들은, 저의 일 중독증을 회사에서 이용하는 거라고 합니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예요. 왜냐하면 내가 일이 좋고, 이게 다 내 꺼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남들이 '넌 이렇게 열심히 하니까 나중에 이 분야에서 성공할거야'라고 하면 갑자기 갸우뚱 해져요.

 

이 일은 제가 미래를 걸고 있는 일이 아니예요.

대학 1학년때부터 원했던 일이 있고 지금 하는 일 배워서 나중에 그 분야로 돌아가 접목시킬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게 어느 수준이 되었을때 충분하다 느낄지, 놀던 물이 편하다고 계속 이쪽에 있게 되는건 아닐지

지금 뭔가 다른 인생의 큰 가치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모르겠어요.

 

다들,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 만으로도 흔하지 않은 경우라고 하는데

아마 저는 어디서 뭘 하건-심지어 복사를 하면서도 해상도 체크하면서 즐거워하는 인간이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4~5시간 정도이고, 주말에 14~20시간씩 몰아서 잡니다만

하루가 36시간이라면 아마 놀지 않고 다른 일을 더 하겠다고 할거예요.

일이 많아서 불만인게 아니라, 일이 많으니까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져서 효율이 나지 않는게 불만이라는 게

제 감정에 대한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데, 문제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 스트레스 받으면 저녁시간에 빠져서 롯데월드가서 총 몇발 쏘고 조금 후련해하면서 돌아오는게 낙인데

얼마 전에는 총 쏘고 다시 회사로 돌아오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어요.

정신없이 일하다가 어느순간 어, 하고 보니 사실은 목표가 없었다는 느낌..

 

3.

 

자주 못만나서 안타깝지만 연애는 즐겁고 큰 무리 없어요.

일을 열심히 하는건 제 사정인데 남자친구에게 그것 때문에 서운한 감정을 주고 싶지도 않고

반대로 남자친구 만난다고 집중력 떨어져서 일을 못하는 것도 싫어서

초반에는 이 와중에도 주 2~3회씩 만났던 것 같고요. 대신 하루 수면시간 3~4시간이었지만..

 

최근에는 남자친구도 일이 생겨서 그냥 주말에만 만나는데, 헤어질 땐 안타깝지만 아직 트러블은 없어요.

아마도 남자친구가 많이 이해를 해 주기 때문이겠죠.

 

다만 친구를 못만나고, 책을 못보고, 전시회도 못가고, 봉사활동도 취소됐어요.......................

 

4.

 

어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어요. 한 석달동안 벼르고 벼르다 만난 거였죠.

 '너는 언제나 잘 꾸민 여자같아 보여' 라고 친구가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랐어요.

그거야말로 저와는 거리가 먼 인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회의가 있는 날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 회사 근처 옷집으로 가서

20분~30분만에 내 취향과 관계없이 점원 추천을 받아 정장풍 옷을 급조해온 나날들.

 

도무지 귀찮아서 발톱관리를 할 수가 없어서, 샌들을 신는 계절이 오다 보니

어두운 색 패티큐어로 창백한 발톱을 가리고 있어요.

출퇴근은 편한 슬리퍼를 신지만 회사에는 정장용 구두가 놓여있고요.

 

귀걸이 아침마다 바꿔 하는게 귀찮아서 무난한 피어싱 형태로 늘 같은 것을 하고 있고

반지는 커플링이고 팔찌는 남자친구가 준 거라 그냥 빼지않고 하고 있을 뿐이고.

  

머리는 미장원 갈 시간이 없어서 그냥 생머리를 늘 둥글게 묶고 있지요.

머리끈 하나에 실핀 두개면 면접st 어느 옷에나 어울리는 머리가 완성돼요.

수면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초췌함을 가리기 위해서 언제나 화장은 풀메이크업이예요.

이 모든게 합해지니까 친구가 보기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미고 있는 여자처럼 보였나봐요.

 

대학 2학년때, 저는 딸기 반스타킹 친구는 체리 반스타킹을 신고 나란히 학교에 가서

사람들을 경악케 한 적이 있었죠. 저는 원래 그런걸 좋아하는데...

지금의 저는, 입고 바르고 걸친 것 중에 아무것도 반짝반짝 생기있는게 없어서 슬퍼요.

그럴듯하게 보이는데 껍데기 뿐인건 아닐까..

이번 달 초부터 시작하기로 했던 봉사활동을 시간상 이유로 못하게 된 것도 너무 안타깝네요.

 

잘 꾸민 생기없는 일 중독의 여자, 가 지금 저의 자화상인것 같아서 조금..

내일도 새벽에 출근해야 하니, 수면시간 4시간 30분을 목표로 버닝해야겠어요.

하루를 이틀처럼, 삼십분을 한시간처럼, 4시간 숙면 후 8시간을 잔 듯한 개운함을 목표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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