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명하기 게임, 인간의 본성

2019.08.10 15:25

타락씨 조회 수:1402

동네 아이들이 골목에서 노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가끔 가만히 듣다보면 '인간의 본성'이라거나 '사회'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죠.
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들은 유치원에서 배웠다거나 하는 책처럼(읽어보진 않았습니다만..;;;) 사회적 발달은 이미 그 시기에 완성에 가까워지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인생.. 의미.. 무엇..)

오늘은 너댓살 먹은 여자아이가 name calling으로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들었어요.
자기보다 두어살 많은 남자아이를 '똥파리'라 부르는 것으로 집단내 권력의 양상을 바꿔놓는 것이었죠.

---
대개 같이 놀곤 하는 아이들은 4명이 기본팩, 여기에 확장팩으로 아이들이 추가되거나 빠지곤 합니다.

기본팩을 구성하는 아이들을 나이순으로 정리하면 '- 여아a < 남아a < 여아b < 남아b +' 정도인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아이와 가장 어린 아이의 나이차는 너댓살 정도?
(호칭과 음성으로 짐작할 뿐이라 정확하진 않습니다.)
통상 팩의 우두머리 노릇, '놀이의 종류'나 '규칙'을 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남아b입니다.
각각 남아b는 대체로 공정한 편, 여아b는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고, 남아a는 남아b에 충성심이 강하고..
여아a는.. 재미있는 아이죠. 이 중에서 혼자만 미취학 연령인 것 같구요.

오늘은 뭐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여아a가 남아b에게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오빠를 똥파리라 부를거야'
남아b와 여아b는 이에 특별히 코멘트하지 않지만, (아마 이런 호명이 유치하다고 느껴서겠죠)
남아a는 여아a의 선언을 비웃습니다. (여기서 '호칭은 사회적으로 공인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남아a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서열이 위라 여겨지는 남아b와 여아b가 이를 묵과하면서, 상황은 여아a가 바라는대로 흐르죠.

호칭의 사회성에 대해 남아a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여아a는, 자신의 선언을 철회할 의사가 없고..
자기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한 구체적 실천을 즉시, 충실히, 그리고 꾸준히 이행합니다.
'똥파리 오빠, 블라블라', '똥파리! 똥파리! 똥파리!'..

처음엔 그저 무시로 일관하던 남아b도 이 상황이 지속되자 견디지 못하고 '내가 왜 똥파리인가?'를 묻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여아a의 답은 '내가 그렇게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죠. 흠 잡을데 없는 완벽한 답입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해 폭넓은 관용적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일까요, 남아b는 뭐라 대꾸하지 못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봤는데, 사실 저도 뭐라 해야할지 모르겠더란..)

그냥 바보같고 유치할 뿐이던 '똥파리'는 이제 모욕적이고 구체적인 위협으로 작용합니다. 호칭과 그 배후의 합리성, 상호존중에 관한 사회적 합의는 파기됐습니다.
암묵적으로 전제된 것으로 여기던 무엇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견과 함께 팩의 우두머리인 남아b의 권위도 위협받습니다.

'똥파리' 호명의 괴벨스적 훌륭함은 그 미묘함에 있습니다. 일단 사실 여부를 논할 여지가 없이 간결하고, 어딘가 모욕적인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그보다는 바보같고 유치하다는 느낌이 크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일도 바보처럼 느껴지죠.
그 미묘함으로 인해 제재받지 않으면서, '똥파리'는 구체적인 작용을 획득합니다.
그게 뭐가됐건, 상대가 원치않는 이름으로 호명한다는 그 단순한 사실,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호명을 관철시킬 수 있다는 것 만으로 권력이 됨과 동시에
이를 각인시킬 수 있죠. 미묘하게 모욕적이라면 더 효과적일테고.

'개새끼는 통하지 않지만, 똥파리는 통한다'는 걸 여아a는 어떻게 안 것일까?
결국 오래지 않아, 남아b는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똥파리라 부르는 일을 그만둘 것인가?'

남아b가 이 상황을 타개할 간단한 해법들이 몇가지 있죠.
기존의 권력관계를 이용해서 여아a를 제재해도 되겠고, 같은 방식으로 멸칭을 쓰는 것으로 보복할 수도 있겠죠.
물리적인 억지력을 행사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해법들은 권위의 정당성를 손상시킬 위험도 있거니와, 그보다 남아b 자신에게 유치하고 부당한 것으로 여겨져 채택되지 않았겠죠.
결국 놀이의 규칙은 여아a가 원하는대로 수정되었으며, 아이들은 '똥파리 없는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
'똥파리 없는 상태'가 '똥파리 이전의 상태'와 같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새로운 놀이의 규칙이 모두가 동의할 만한 최선의 것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경험으로 여아a와 남아b는, 아니 모두가, 뭔가를 배웠겠죠. 오, 다가올 미래의 세대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3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9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96
124591 아주 오랜만에 순대를 사봤는데 [1] 가끔영화 2023.10.27 217
124590 (금요일 바낭)요즘 호사가들 사이의 핫한 단어 '파라다이스' 왜냐하면 2023.10.27 400
124589 프레임드 #595 [5] Lunagazer 2023.10.27 64
124588 투혼 또는 죽음의 승부 [2] 돌도끼 2023.10.27 240
124587 파친코 (2022) [2] catgotmy 2023.10.27 242
124586 [뉴스]허우 샤오시엔 투병으로 은퇴 [5] staedtler 2023.10.27 467
124585 국정원, 선광위 시스템에 정체불명 파일 15개 남겨... [2] 왜냐하면 2023.10.27 295
124584 [왓챠바낭] 뭔 소린지 몰라도 재밌게 볼 순 있죠. '광란의 사랑' 잡담 [16] 로이배티 2023.10.27 427
124583 '더 프랙티스' 보고 있어요. [10] thoma 2023.10.26 315
124582 프레임드 #594 [5] Lunagazer 2023.10.26 75
124581 내일 저녁 꿈이룸 명동 (명동역 4번 출구)에서 < 하이미스터메모리 >미니콘서트&파티에 초대(무료)합니다. 젤리야 2023.10.26 154
124580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안내서 [1] 먼산 2023.10.26 212
124579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 나온 이탈리아/스페인 어 daviddain 2023.10.26 157
124578 (정보,에 후기 추가 했어요.) 데이빗 핀처의 <더 킬러 The Killer, 2023>가 개봉했네요. [1] jeremy 2023.10.26 380
124577 외계+인 2부 개봉확정 포스터 [3] 상수 2023.10.26 509
124576 [왓챠바낭] 아무 욕심 없이 평범해도 잘 만들면 재밌습니다. '살인 소설' 잡담 [8] 로이배티 2023.10.26 451
124575 너와 나를 보고 [4] 상수 2023.10.25 403
124574 더 킬러 [2] daviddain 2023.10.25 378
124573 술을 안마신지 3년이 지나고 catgotmy 2023.10.25 222
124572 프레임드 #593 [2] Lunagazer 2023.10.25 7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