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읽는 시

2017.05.05 02:51

underground 조회 수:1411

제가 바쁜 날만 빼고 휴일인 허무한 오월의 첫 주, 지친 마음을 쉬려고 시를 몇 편 읽었습니다. 


요즘 조지훈 시인의 시를 읽고 있는데 고요한 정취의 시가 많아서 밤에 읽기 좋네요. 











누구가 부르는 듯

고요한 밤이 있습니다.


내 영혼의 둘렛가에

보슬비 소리 없이 나리는

밤이 있습니다.


여윈 다섯 손가락을 

촛불 아래 가즈런히 펴고


자단향(紫檀香) 연기에 얼굴을 부비며

울지도 못하는 밤이 있습니다.


하늘에 살아도

우러러 받드는 하늘은 있어

구름 밖에 구름 밖에 높이 나는 새


창턱에 고인 흰 뺨을

바람이 만져주는

밤이 있습니다. 




 



 

파초우(芭蕉雨)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가야금

 

 

1

휘영청 달 밝은 제 창을 열고 홀로 앉다

품에 가득 국화 향기 외로움이 병이어라.

 

푸른 담배 연기 하늘에 바람 차고

붉은 술그림자 두 뺨이 더워온다.

 

천지가 괴괴한데 찾아올 이 하나 없다

우주가 망망해도 옛 생각은 새로워라.

 

달 아래 쓰러지니 깊은 밤은 바다런듯

창망(蒼茫)한 물결소리 초옥(草屋)이 떠나간다.

 

 

2

조각배 노 젓듯이 가얏고를 앞에 놓고

열두 줄 고른 다음 벽에 기대 말이 없다.

 

눈 스르르 감고 나니 흥이 먼저 앞서노라

춤추는 열 손가락 제대로 맡길랏다.

 

구름 끝 드높은 길 외기러기 울고 가네

은하 맑은 물에 뭇별이 잠기다니.

 

내 무슨 한이 있어 흥망도 꿈속으로

잊은 듯 되살아서 임 이름 부르는고.

 

 

3

풍류 가얏고에 이는 꿈이 가이 없다

열두 줄 다 끊어도 울리고 말 이 심리라.

 

줄줄이 고로 눌러 맺힌 시름 풀이랏다

머리를 끄덕이고 손을 잠깐 슬쩍 들어

 

뚱 뚱 뚱 두두 뚱뚱 흥흥 응 두두 뚱 뚱

조격(調格)을 다 잊으니 손끝에 피맺힌다.

 

구름은 왜 안 가고 달빛은 무삼일 저리 흰고

높아가는 물소리에 청산이 무너진다.

 

 






대금(大笒)

 

 

어디서 오는가

그 맑은 소리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데

 

샘물이 꽃잎에

어리우듯이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누나

 

영원은 귀로 듣고

찰나는 눈앞에 진다

 

운소(雲霄)에 문득

기러기 울음

 

사랑도 없고

회한도 없는데

 

무시(無始)에서 비롯하여

허무에로 스러지는

 

울리어오라

이 슬픈 소리





대금 소리가 궁금해서 한 곡  

박용호 - 청성곡 (청성자진한잎)  







산방(山房)



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단비 맞고 난초 잎은

새삼 치운데


볕바른 미닫이를

꿀벌이 스쳐간다.


바위는 제 자리에

옴찍 않노니


푸른 이끼 입음이

자랑스러라.


아스럼 흔들리는

소소리 바람


고사리 새순이

도르르 말린다.








마음



찔레꽃 향기에

고요가 스며

청대잎 그늘에

바람이 일어


그래서 이 밤이 

외로운가요

까닭도 영문도

천만 없는데


바람에 불리고

물 우에 떠가는

마음이 어쩌면

잠자나요.


서늘한 모습이

달빛에 어려


또렷한 슬기가

별빛에 숨어


그래서 이 밤이

서러운가요

영문도 까닭도

천만 없는데


별 보면 그립고

달 보면 외로운


마음이 어쩌면 

잊히나요. 








묘망(渺茫)

 

 

내 오늘밤 한오리 갈댓잎에 몸을 실어 이 아득한 바다 속 창망(滄茫)한 물구비에 씻기는 한점 바위에 누웠나니

 

생은 갈수록 고달프고 나의 몸둘 곳은 아무데도 없다 파도는 몰려와 몸부림치며 바위를 물어뜯고 넘쳐나는데 내 귀가 듣는 것은 마지막 물결소리 먼 해일에 젖어오는 그 목소리뿐

 

아픈 가슴을 어쩌란 말이냐 허공에 던져진 것은 나만이 아닌데 하늘에 달이 그렇거니 수많은 별들이 다 그렇거니 이 광대무변한 우주의 한알 모래인 지구의 둘레를 찰랑이는 접시물 아아 바다여 너 또한 그렇거니

 

내 오늘 바다 속 한점 바위에 누워 하늘을 덮는 나의 사념이 이다지도 작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묘망(渺茫): 아득하고 아득함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인생은 항시 멀리

구름 뒤에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워서

햇살 쪼이는 꽃조개같이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망령인 듯 

가련한 거이와 같이


언젠가 한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영상(影像)

 


이 어둔 밤을 나의 창가에 가만히 붙어 서서

방안을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

 

아무 말이 없이 다만 가슴을 찌르는 두 눈초리만으로

나를 지키는 사람은 누군가.

 

만상(萬象)이 깨어 있는 칠흑의 밤 감출 수 없는

나의 비밀들이 파란 인광으로 깜박이는데

 

내 불안에 질리워 땀 흘리는 수많은 밤을

종시 창가에 붙어 서서 지켜보고만 있는 사람

 

아 누군가 이렇게 밤마다 나를 지키다가도

내 스스로 죄의 사념을 모조리 살육하는 새벽에--

 

가슴 열어제치듯 창문을 열면 그때사 저

박명의 어둠 속을 쓸쓸히 사라지는 그 사람은 누군가.

 

 

 


 

 


아침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석류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파동! 아 여기 태고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래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석류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석류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풀밭에서

 

 

바람이 부는 벌판을 간다 흔들리는 내가 없으면 바람은 소리조차 지니지 않는다 머리칼과 옷고름을 날리며 바람이 웃는다 의심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이 나즉히 바람이 되어 흐르는 소리.

 

어디를 가도 새로운 풀잎이 고개를 든다 땅을 밟지 않곤 나는 바람처럼 갈 수가 없다 조약돌을 집어 바람 속에 던진다 이내 떨어진다 가고는 다시 오지 않는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기에 나는 영영 살아지지 않는다.

 

차라리 풀밭에 쓰러진다 던져도 하늘에 오를 수 없는 조약돌처럼 사랑에는 뉘우침이 없다 내 지은 죄는 끝내 내가 지리라 아 그리움 하나만으로 내 영혼이 바람 속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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