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며느리를 본 후의 단상

2018.01.24 23:56

하늘보리 조회 수:4678

나름 장안의 화제인 ‘B급 며느리’를 보러 갔다가 운 좋게 감독과의 대화까지 얻어걸려서 구경하고 왔습니다.

끝난 뒤의 감상은, “선 감독님, 어머니께 좀 더 잘 하세요”.

내용은 감독의 말마따나 “전형적인 고부갈등”입니다. 시어머니 조경숙은 체면을 중시하는데 새로 들어온 며느리 김진영은 본인이 정한 선을 넘은 요구에는 절대로 응하지 않습니다.
시비는 김진영이 먼저 걸었으나 조경숙은 김진영의 일보 후퇴에도 굴하지 않고 완벽한 굴종을 요구합니다. 김진영이 이에 반발하여 조경숙이 내뱉은 ‘앞으로 우리 보지 말고 살자’ 소리를 낼름 받아서 “예 어머니 어른이시니까 하신 말씀은 꼭 지키십쇼” 라고 질러버리고 시댁 행사에 대한 파업에 돌입합니다....

며느리 입장인 김진영이 이 후천적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로 인하여 얼마나 큰 희생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부당하며 등등은 영화를 본 사람마다 하는 이야기이고, 인터뷰마다, 감상평마다 나오는 말이니까 저는 생략하겠습니다. 참고로 정말 부당하고 정말 희생이 큽니다.


저는 시어머니 조경숙이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물론 쉽게 동정할 만한 분은 아닙니다. 영화 내에 등장한 내용만 하더라도, 임신한 예비 며느리의 직장에 전화를 걸어서 우리 아들과 결혼하려면 키우는 고양이를 버리고 오라고 한 시간 동안 전화를 하는 캐릭터입니다. 김진영의 거듭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조경숙이 전화를 매듭짓는 말은 “그러면 그 고양이 보낼 데는 내가 알아봐줄게”. 시작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GV에서 감독의 입으로 나온 뒷이야기는 더욱 범상치 않습니다. 손주가 예쁘다고 어머니가 아무때나 집에 쳐들어오셔서 진주하고 앉아있던 것이 고부갈등의 직접적인 원인이고, 전화를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걸거나, 아예 집으로 찾아와서 왜 연락을 받지 않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2주에 한번씩 아이고 내가 죽겠다, 또는 네가 잘못했다며 화를 내는 분이랍니다.


이런 조경숙이지만 아들에 대한 사랑만은 진짜입니다. 아들인 선호빈은 다큐멘터리 감독입니다. 항상 돈에 쪼들립니다.
자식까지 낳은 다 큰 아들이지만 조경숙은 선호빈에게 영화 제작비와 생활비 조로 추정되는 돈을 빌려줍니다. 계-속. 김진영은 남편이 시댁에서 돈을 빌려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자 선호빈은 조경숙에게서 김진영 몰래 돈을 꿉니다.

조경숙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체면입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다가 2차에서 불합격하고 딱히 고정적인 직업이 없는 채로 며느리가 된 김진영에게 조경숙은 ‘친척들에게는 네가 7급 공무원 공부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해두었으니 말을 맞춰라’고 합니다.
김진영이 명절 불참을 선언하자 조경숙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식들이 내려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외국에 나가 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 싶어합니다.

그런 조경숙이 선호빈의 다큐멘터리 제작에 동의했습니다. 찍어도 된다, 만들어도 된다, 상영해도 된다. 심지어 조경숙의 롤은 메인 빌런입니다. 집안의 치부가 까발려지는 것은 물론이고 조경숙 본인이 상식적이지 않은 짓을 하는 것이 필름에 고스란히 담겼을 뿐 아니라 아들과 며느리가 인터뷰를 하면서 필름에 안 들어갔던 조경숙의 비인격적 처사들을 폭로하고 다닙니다.

조경숙은 떨려서 영화를 아직 못 봤답니다. 전주국제영화제에 부모님 석을 마련하고 초대를 했는데 자리에 앉았다가 영화관 불이 꺼지자 용기가 없다고 나갔답니다.
그리고 요새 정식 상영이 되면서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고 연락을 주니까 걱정이 되는지 아들한테 이틀에 한 번씩 전화를 해서 걱정을 한다고 합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선호빈 감독은 조경숙에게 엄마가 돼서 아들이 잘 되는데 그거 하나 못 참냐고 그만 좀 하라고 짜증을 냈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했습니다.


역시 감독과의 대화에서 선호빈 감독은, 고부갈등이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 보면 사회적 갈등 구조가 작용하고 있다며, 부모 세대보다 적게 버는 자식세대이기 때문에 부모님한테 온전한 발언권이 없었다고 합니다. 청년 실업과 구조적 빈곤이 문제라고 하면서요.

고부갈등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의 개인적인 잘못이 아니고 시스템적인 문제라는 부분에는 동의하지만, 과연 이것이 청년실업이 불러온 문제인지, 청년실업이 해결되면 해결될지, 젊은 아들에게 수입원을 줘서 노모의 발언권을 박탈하면 고부갈등이 끝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그리고 감독의 이 얄팍한 현실인식에 짜증이 납니다.


고부갈등은 가부장제에,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들에게 퍼붓고 투자한 나이 많은 여자가 아들을 키워낸 값(아들에게 쏟았으나 돌려받지 못한 애정, 사랑, 관심, 존중, 경제적 여유)을 나이 적은 여자에게서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들들이 알아서 갚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입니다. 조경숙은 나이를 먹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가면서도 선호빈한테 생활비 조로 돈을 쥐어주는데 선호빈은 조경숙의 생일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김진영은 선호빈과 함께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데 풀타임 양육을 맡고 있는 것은 김진영입니다. 영상은 촬영기사가 찍은 풋티지와 선호빈이 카메라를 직접 잡은 풋티지가 섞여 있는데,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선호빈이 양육에 참여하는 장면은 시댁에 갈 때 운전을 하는 것이 유일합니다. 기타 아이의 목욕 아이의 식사 선호빈의 식사 아이의 놀이는 모두 김진영이 맡습니다. 감독 본인의 말에 따르자면 선호빈이 일이 많이 없어서 집안에 있는 시간이 긴 편인데도 그러합니다.

고부갈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구조는 청년실업이 아니라 가부장제일 것이고, 가부장제는 여자가 가진 것을 뽑아서 남자에게 몰아줍니다. 조경숙은 많은 희생을 하면서 선호빈을 키웠습니다. 김진영은 많은 희생을 하면서 선호빈을 보필하고 선해준을 키웁니다.
선호빈은 청년실업의 피해자로서의 본인을 그만 보고 가부장제의 수혜자로서의 본인을 빠르게 인식하고, 김진영에게 추가적인 피해가 오지 않도록 조치하고 조경숙의 그간의 노력에 대해 정중히 보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엄마 영화 많이 걱정되지,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이라고 물어보는 전화 한 통부터 어떨까요.

그리고 이 아사리판에서 교통정리를 해 낸 김진영씨의 투지와 능력, 그리고 너그러움에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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