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애초에 글의 형태로 작성해서 말투가 이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담겨있으므로 그것을 감안해서 읽어주시기를 바래요.)

테무 니키의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보기 드문 감동을 선사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애초에 감독인 테무 니키가 현재는 다발 경화증으로 인해 시력을 잃고 거동도 불편해져서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으나 과거에는 배우로 활동했던 그의 친구인 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을 영화에 출연시키고자 기획한 작품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시각 장애인의 입장을 고려한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테무 니키는 관객도 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이 연기한 주인공 야코와 동일한 위치에서 영화를 체험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 영화를 야코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도록 만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철저히 야코의 시야를 통해서만 주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카메라는 야코의 주변에서 벗어나는 적이 없이 시종일관 야코의 신체에 밀착되어 있다. 우리는 야코의 얼굴이나 손을 위주로 영화를 보게 된다. 야코 이외의 주변 인물이나 사물은 포커스 아웃이 된 상태로 보여질 때가 많다. 그러다가 보니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야코가 실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함께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야코가 눈으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주변의 소리들에 의지해야 하듯이 야코의 위치에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도 자연스럽게 이 영화에서 들려오는 온갖 사운드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휴대폰 AI의 목소리, 야코의 연인인 시르파와 방문 간호사와 야코의 아버지의 목소리, 이웃집 사람의 목소리, 주변에서 들려오는 일상적인 소음들까지 그 소리가 다양하다. <그 남자는…>가 야코의 시각에서 진행되는 영화인만큼 이 영화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야코를 고려해서 사운드 디자인에 매우 공을 들였다. 돌비 시네마에서 이 영화를 관람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은 검은 화면에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자막이 뜨면 그 점자를 <그 남자…>에서 등장하는 휴대폰 AI가 그대로 읽는 사운드가 나온다. 영화의 제목과 배우와 감독과 스태프의 이름들이 점자 자막을 통해 화면에 나타날 때마다 AI가 계속 그 자막을 읽는다. 이런 식으로 사운드를 통해 감독과 스태프의 이름을 소개하는 오프닝 크레딧은 장 뤽 고다르의 <경멸>정도가 유명할 뿐 영화사적으로도 드문 경우에 속하기 때문에 시각 장애인을 고려한 형식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신선함이 있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점자 자막이 스크롤이 올라가면서 점차 핀란드어 자막으로 바뀌는데 이러한 시도 또한 관객이 이 영화를 마지막 순간까지 시각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기를 원하는 감독의 의지가 느껴져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만약 <그 남자는…>가 시각 장애인의 관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영화적 형식을 도입한 새로운 시도를 한 것만으로 그쳤다면 이 영화는 한 장애인의 일상을 지리멸렬하게 나열하는 다큐멘터리적인 스타일의 극영화에 그쳤을 수 있다. 그런데 테무 니키는 이 영화에 뛰어난 장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각 장애인의 일상에 절묘하게 장르적 성격을 부여했다. 그것도 여러가지 장르를 다채롭게 버무린 재능을 보여준다. 

<그 남자는…>는 기본적으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장애를 가진 두 남녀의 멜로드라마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유머가 다분하게 포함된 경쾌한 톤의 대사들을 통해 로맨틱 코미디적인 요소를 부여했다. 두 연인이 전화 통화로만 소통하는 방식은 일정 부분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1인칭 시점으로 보여지는 시각 장애인이 연인을 찾아 떠난다는 간단한 설정으로 스릴러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이 영화가 야코의 관점으로만 진행된다는 것은 이 영화에 스릴러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데 유리하다. 관객은 영화 속에서 야코의 주변이 늘 포커스 아웃이 된 상태에서 야코가 아는 만큼만 알 수 있는데 이럴 경우에 우리는 야코 바로 앞에 있는 사물이나 사람도 감지하기가 힘들다. 야코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 지에 대해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 자체로 서스펜스가 만들어질 수 있다. 심지어 야코는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인데 이러한 그의 부동성 또한 관객에게는 계속 불안 요소로 다가올 수 있다. 이렇게 야코의 비가시성과 부동성이 영화의 서스펜스를 추동시키는 가운데 야코는 한 남자에 의해 한적한 곳으로 납치되어 협박을 당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 영화는 납치 스릴러로 변모한다. 야코가 시각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을 두 남자에게 그가 협박을 당할 때 관객이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이 영화가 철저하게 야코의 시점에서만 진행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야코가 납치된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이 장소 주변에 사람이 지나다니는지, 그를 납치한 두 남자의 인상착의는 어떤지 등에 대한 정보가 차단된 상태라는 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관객과 야코가 동일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야코가 납치범에게 끌려가는 가운데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져 화면이 블랙으로 되는데 이때 관객도 야코처럼 사운드만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잠시나마 야코와 완전히 일치된 상황에서 그가 느끼는 공포를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게 된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카메라가 야코의 집 안에서만 머무는 실내극처럼 진행되다가 중반부터 야외에서 본격적으로 야코의 모험이 펼쳐지는 식으로 극을 구성한 것도 영화적으로 훌륭하다. 야코와 함께 야코의 집 안에만 머물면서 야코의 심정이 되어 답답함을 느끼던 관객이 카메라가 야코의 집 밖으로 나가게 되자 야코가 느꼈을 해방감을 야코와 함께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의 삶을 경험하게 해주는 이 영화의 형식의 탁월함을 높게 평가할 수 있겠으나 그에 못지 않게 이 영화가 관객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그 남자는…>가 영화에 대한 사랑을 듬뿍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남자…>라는 이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타이타닉>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감동의 기폭제가 된다. 

야코는 기존의 영화 속 장애인 캐릭터와 비교해볼 때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야코역을 맡은 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의 놀라운 연기력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야코가 냉소적인 유머를 구사하는 영화 덕후라는 것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야코가 마냥 착하기만 해보이는 캐릭터였다면 지금과 같은 매력은 감소되었을 것이다. 야코의 낙천성은 그가 영화 덕후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야코는 그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모두 영화와 관련짓는다. 예를 들어 그는 전화로 연애를 하고 있는 상대인 시르파의 외모를 <에이리언>의 리플리로 상상하고 그를 도와주는 간호사를 <미저리>의 미치광이 캐릭터인 애니 윌크스라고 부른다. 야코와 시르파의 대화 도중에 빌리 와일더의 <뜨거운 것이 좋아>의 마지막 대사도 등장하고 야코는 실의에 빠지게 될 때 <브레이브 하트>의 ‘프리덤’이라는 대사를 외치면서 삶의 의지를 표명한다. 심지어 이 영화에서 야코는 그를 납치한 사람들과도 코엔 형제의 <파고>의 유괴범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더 놀라운 것은 납치범들마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테무 니키가 이 영화 속에서 얼마나 영화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자 했는지에 대해 알게 된다.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의 세계에서 영화는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다. 

야코의 집에는 DVD와 비디오 테이프가 잔뜩 있으며 그가 시력이 떨어져서 존 카펜터의 영화에서 커트 러셀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게 될 때쯤에야 영화 보기를 단념했을 정도로 그는 이전에는 영화광의 삶을 살았다. 어떻게 보면 야코는 그가 다발 경화증으로 인해 시력을 잃고 걸을 수 없게 된 비참한 현실을 그가 예전부터 좋아했던 영화의 환영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러한 환상성은 테무 니키가 야코와 시르파가 음악을 틀어놓고 사랑의 언어로 소통하며 교감을 나누는 장면을 초현실적인 방식으로 연출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이 장면에서는 야코 곁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야코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환상 장면은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아코의 모습과 함께 뮤지컬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뮤지컬에서 주인공이 현실에서는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춤과 노래를 통해 표현하듯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야코와 시르파의 사랑을 보다 애틋하게 표현하고 있다. 

야코가 주로 꿈 속에서 보게 되는 이미지는 빠른 속도로 뛰고 있는 어떤 사람의 발의 움직임이다. 야코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야코의 꿈은 그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야코는 이 영화를 통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전부 본다.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은 병에 걸리기 이전인 과거의 야코일 수도 있고 시르파에게 가고자 하는 마음이 투영된 미래의 야코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래의 야코를 상징할 경우에 이 이미지는 미래에 야코가 시르파와 만나게 되는 것에 대한 복선일 수 있다. 그의 바램이 미래인 엔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꿈에서는 과거에 멀쩡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야코가 장애를 앓고 있는 현재의 그를 보기도 한다. 

이 영화는 또한 영화광이 만약 시력을 잃게 되고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 영화광은 야코와 같이 영화를 현실에 적용시키며 위안을 찾고 그 환상으로 삶을 버틸 위안과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한편으로 가장 놀라운 것은 야코가 시력을 잃고 움직일 수 없게 된 상태에 놓인 것이 관객 입장에서는 그 자체로 경이적인 시네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야코는 더 이상 영화를 볼 수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 그는 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그의 얼굴과 몸짓과 말과 움직임을 통해 그 스스로가 ‘시네마’가 되어 버린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나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가 떠오를 정도의 깊은 감동을 준다. 야코는 겨우 납치범으로부터 벗어나 시르파에게 찾아가고자 움직이지만 중심을 잃고 그만 쓰러지고 만다. 결국 야코의 모험은 실패하는 것인가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갖고 화면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프레임 밖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고 야코는 이에 반응해서 개를 부른다. 테무 니키가 개 주인에 의해 구출된 야코가 차에 타고 있는 단 한 컷만을 보여주고 바로 시르파의 집 앞에 야코를 데려다놓기 때문에 이러한 급작스러운 시르파와의 만남은 어떤 은총과 같이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불현듯 다가오는 일상에서의 은총과 같은 순간 말이다. 야코와 시르파의 만남이 어떤 은총으로서 주어진다는 감각이 이 영화의 엔딩을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더 깊은 체험에 도달하게 만든다. 사지가 멀쩡한 두 남녀가 서로 만나는 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일상의 한 순간일 뿐이다. 그런데 두 남녀가 병을 앓고 있다는 이 영화의 전제가 이들의 만남의 순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엔딩이 감동적인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 삶의 은총과도 같은 아름다운 순간일 수 있다는 것을 야코와 시르파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체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코가 그렇게 보고 싶지 않았던 <타이타닉> DVD를 시르파에게 건네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은 종국에는 어떤 숭고함에 도달하고야 만다.

P.S: 이 영화는 연말까지 가더라도 개인적으로 올해 해외 개봉영화 베스트 10에 포함시킬 예정이에요. 82분이라는 러닝 타임이 부담없고 재미와 감동이 있어서 N차 관람을 하기에도 적당한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를 많은 분들이 보시기를 진심으로 바래요. 긴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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