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0여년간 미라맥스-와인스타인 컴퍼니의 대표로 할리우드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던 그 인간의 본색을 폭로하여 몰락시키는 것에 크게 일조를 했던 뉴욕 타임즈의 기사를 작성했던 두 여기자가 당시 자신들의 탐사보도 과정을 기록한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하여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그 이후 지난 5년간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였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미투운동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 소재인지라 관심이 안갈 수가 없었고 제가 인상적으로 봤었던 넷플 시리즈 '베를린에서'와 영화 '아임 유어 맨'을 연출했던 마리아 슈레이더 감독에 캐리 멀리건, 조이 카잔이라는 투톱 캐스팅이 더해지니 개인적으로 개봉날짜만 손꼽아서 기다려왔었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너무나도 훌륭한 저널리즘 영화이면서 앞으로 성폭력과 그 피해자를 다루는 모든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받아야할 미덕을 갖춘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보도자료를 보면 나오는데 애초에 제작에 들어갈 때 두 가지의 연출 방침을 세웠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성폭행 당시 상황을 실제로 보여주거나 센세이셔널하게 묘사하지 않는 것이며 두번째는 그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첫번째는 제 아무리 의도가 좋고 관객들에게 어느정도 간접체험을 시켜줘야한다는 나름의 필요성이 있어서였다고 하더라도 정말 제대로 신경써서 연출하지 않으면 결국 피해자들에게는 트라우마를 자극하게 되며 해당 씬들만 하이라이트로 편집된 영상이 온라인을 통해 매우 불쾌한 방식으로 소비되는 결과를 낳아왔죠. '한공주', '귀향' 등이 그 예가 되겠고 시간상으로 2016년의 폭스 방송사 폭로사건을 다룬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에서도 똑같이 범했던 실수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이 작품과는 작중 시간상으로도 그렇고 일종의 연작처럼 볼 수도 있는데 비슷한 소재와 테마를 얼마나 다른 톤과 매너로 다뤘느냐의 비교가 흥미롭습니다. 참고로 전자는 피해여성들의 폭로이야기이지만 남성 각본가, 감독이 맡았고 이번에는 반대입니다.



두번째는 사실 비슷하게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설정이 들어간 줄리아 가너 주연의 '어시스턴트'라는 작품에서 이미 쓰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배후에서 절대적인 권력으로 갑질과 위계적 성폭력을 저지르는 그 인간에 대한 일종의 신비스러움,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에 연출의도가 있었다면 이번에는 그 인간만도 못한 인간에게 혹시나 해당배우의 감정이 이입된 열연으로 인해 관객입장에서 아주 쥐꼬리만큼이라도 인간적인 공감을 할 가능성 자체를 원천차단하고 그냥 한심하고 혐오스러운 가해자로서만 존재하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출로 보입니다. 작중 내내 실제 녹음한 음성자료와 배우가 따로 재연한 통화상의 목소리로만 존재하다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딱 하나 나오는데 여기서도 얼굴을 가리고 체격과 헤어스타일이 비슷한 대역배우가 연기합니다. 캐리 멀리건이 맡은 주인공이 해당씬에서 보여주는 리액션 연기와 연출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가 진짜로 신경써서 묘사하고 존중해주고 있는 캐릭터들은 마땅 그래야할 직접 발로 뛰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가며 힘들게 탐사보도를 한 두 주인공 기자와 그들을 믿어주고 올바른 보도방향을 제시하고 지켜준 상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안타까운 일을 겪었지만 용기를 내서 고백하고 증언하러 나서준 피해자들입니다. 물론 나서지 않은 피해자들도 다 그럴만하고 이해해줘야하는 처지였음을 빼놓지 않고 보여주고 있고요. 뉴욕 타임즈의 첫 기사가 나올 당시 유일하게 실명을 밝히고 참여하여 힘을 더해준 모 여배우가 이 영화에도 직접 출연하여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모습도 아주 반가웠습니다. 직접 출연하진 않았지만 유달리 자주 언급되는 모 유명배우와 거기에 대한 그 인간의 집착(?)은 매우 진중한 이 작품에서 뻘하게 웃음을 자아내는 부분입니다.



기사에 가장 결정적인 도움이 된 미라맥스에서 일했던 피해자들 중 둘은 연기력으로 정평이 나있는 여배우들이 맡았는데요. 이들의 사건당시를 들려주는 씬은 이 작품의 가장 돋보이는 하이라이트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성폭행을 영상으로 직접 재연하지 않아도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피해자에게 공감되게 와닿을 수 있는지에 대한 증거입니다. 일명 아카데미 스타일의 열연이 아닌 끈기있고 뚝심있게 취재하며 피해자들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는 튀지 않으면서 모범적인 연기를 펼친 조이 카잔에게도 찬사를 보내고 싶고 캐리 멀리건은 상대적으로 분량이 약간 적은데 왜 더 스타라고 할 수 있는 그녀에게 이 역할을 맡겼는지 알 수 있는 포인트에서 강한 임팩트를 남겨줍니다. 패트리샤 클락슨 등의 믿음직한 조연들도 자연스럽게 섞여있고요.



그 외에 워킹맘이기도 한 두 여기자가 가정생활을 병행하면서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해도 제법 비중있게 다루기도 했고 일단 지금으로서는 크게 흠잡을 부분이 보이지 않네요. 이미 어떻게 됐는지 결과를 다 알고 보는 스토리이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을 얻어내고 기사에 신빙성을 실어줄만한 자료와 어떤 소스 제공자를 통해 증거를 얻어내는 과정이 정말 순탄치 않았기 때문에 막상 관람하는 도중에는 자꾸 조바심이 생기고 의외로 스릴러적인 재미가 있습니다. 아마 가장 많이 비교로 언급되는 작품은 같은 저널리즘 영화로서 오스카 작품상까지 받았던 '스포트라이트'일텐데 정말 훌륭하고 존경받을만한 작품이긴 했지만 좀 더 최근 사건이었고 여러가지로 감정이입이 더 쉽고 깊게 되는 이번 '그녀가 말했다'가 주는 감흥은 전혀 뒤지지 않네요. 안타깝게도 호평에도 불구 현지 흥행이 많이 부족한 것 같던데 이 소재에 관심있는 분들은 꼭 늦기 전에 극장에서 관람하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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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그 인간이 그렇게 꼬리 잡히지 않고 기나긴 세월동안 그런 짓들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잘못이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크지만 그 인간을 여태 보호해준 할리우드 권력자들의 시스템도 컸는데 결국 이런 작품조차 할리우드에서 제작했다는 것이 웃지못할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죠. 실제로 IMDb나 레터박스드, 레딧 등의 온라인에서 해외 유저들 사이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것이 작품 자체의 완성도 못지않게 활발히 거론되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완벽히 이상적인 세상에서 살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고 이렇게 잘 만들어진 작품일 경우 그런 모순도 이럴 때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씁쓸한 뒷맛이 아예 남지 않는 것은 아닌 것도 맞고요.



또 한가지로 Plan B가 공동제작으로 참여했는데 아시다시피 브래드 피트가 설립한 프로덕션 회사이죠. 피트의 전여친이었던 기네스 펠트로와 전부인 안젤리나 졸리 모두 그 인간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는데요. 피트는 펠트로의 사건 당시 그 인간에게 직접 맞서기도 했었으나 나~중에는 졸리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킬링 뎀 소프틀리'라는 영화를 제작해달라고 그 인간에게 가서 부탁했었는데 이번엔 그 인간의 몰락을 다룬 영화의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연달아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추가로 졸리가 결혼생활 당시 피트의 알콜중독과 가정폭력을 저질렀다는 얘기를 밝히기도 했죠. 또 하나의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안그래도 홍보 도중에 브래드 피트에 대한 질문도 나왔는데 일단 마리아 슈레이더 감독은 제작과정에서 그의 직접적인 관여는 없었고 본인은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고 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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