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자의 추적을 따라가면 독자인 우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grit을 통해 자신을 극복해낸 것처럼 보였지만 그 grit으로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한 탓에 타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 부분을 조금 조심스레 읽어야되는 것은 "사실은 나쁜 사람이었어!"라는 위선자 판정보다는 한 인간 안에서 복잡하게 드러나는 양면성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인간의 어떤 성질이나 발자취가 꼭 그를 어떠한 사람으로 단정짓지는 않는 것이야말로 이 책에서 화자가 내내 이야기하는 "혼돈"의 개념과 더 맞을테니까요. 어쩌면 그를 그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일생을 매달려왔던 신의 질서를 반복하는 실수에 더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한 인간이 보이는 것처럼 (자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우월하거나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 혼돈의 이치를 인간의 선악이나 우열의 판단만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 자체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개념으로 화자는 놀라운 전복을 이야기합니다. 물고기라는 분류가, 어류라는 분류 자체가 아예 틀렸다는 학계의 발견을 소개합니다. 금붕어도 상어도 넙치도 잉어도 우리는 다 물고기라는 한 종류 안에 들어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분류가 전혀 아니라는 거죠. "물고기"라는 분류 자체가 그냥 물에 사는 어떤 생물체들의 가시적인 공통점만 묶어놓았을 뿐 사실 같은 부류로 묶일 수 없다는 과학적 발견이 나옵니다. "물고기"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의 편의를 위해 구분된 단어일 뿐 포유류나 유인원같은 하나의 공통적 체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연구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고기"라는 가장 거대하고 포괄적인 테두리 안에서 나머지 세세한 차이점들을 발견하고 구분하려는 그의 노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요. 이것은 한편으로는 물고기 분류에서 우생학으로까지 나아간 그의 도덕적 실패에 천벌이 내린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고소함을 잠시만 만끽하고 나면 다시 한번 인간의 무의미와 자연의 자유로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죠. 인간이 자기들끼리 이건 이것이고 저건 저것이라고 나누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혹은 실체적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것인지. 물고기라 불리는, 혹은 아주 어려운 학명을 띈 그 생명체들은 인간이 뭐라고 부르고 뭐랑 엮던 그냥 살던 대로 살 뿐입니다. 오로지 인간의 학문만이 틀렸을 뿐이고 인간의 편의만이 사라졌을 뿐이죠.


자연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이 책이 그 반전에 가까운 과학적 발견을 통해 알리고 싶어하는 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의미와 우열을 인간이 결정할 수는 없다는 그런 뜻일 겁니다. 자연을 이해하되, 자연의 혼돈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처절하게 실패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일 것입니다. 가장 궁극적인 분류에서부터 틀린 채로 시작된 나머지 분류와 이해에 그는 평생을 다 바쳤죠. 그것은 과학적 태도에도 경종을 울리는 것이 아닐까요. 신념을 과학에 결합시켰을 때, 있는 그대로의 과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사회의 질서에 편입시키려 할 때 우리는 가차없이 틀리고 말 때가 있죠. 예를 들어 인간의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놓기 위해 동물들의 암수 커플링을 이야기하지만 다른 동물들도 동성애를 한다는 과학적 사실 앞에서 무너지거나, 수컷이 암컷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자명하다고 하지만 여왕벌이나 암사마귀 앞에서 그저 정액운반만을 하는 수컷의 운명을 이야기하면 초라해지는 그런 믿음들 말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보고 배울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자연이 인간 세계를 본딴, 인간이 본따야 하는 그런 예시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살아있을 때 이 발견이 나왔다면 그는 과연 인정할 수 있었을까요. 괜히 상상해보게 됩니다. 그는 특유의 grit으로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건 표본실이 지진으로 무너졌을 때보다도 그에게 훨씬 더 지독한 고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물고기"의 존재와 분류는 그가 내면의 아름다움과 규칙으로 삼았던 "신의 질서"를 가장 확실하게 구현해놓은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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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추적하는 여정은 "물고기"란 분류가 없다는 발견까지 이어지면서 혼돈 그 자체인 자연을 되새깁니다. 그리고 정신질환자로서의 화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도 대략 가닥이 잡히죠. 그들은 이상하고 소외당해 마땅한 사람들인가. "정상"의 기준에서라면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상성에 대한 회의를 우리는 이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통해 발견했죠. 그렇다면 화자의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혼돈 속에서 인간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극단적 허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화자의 아버지의 그 믿음 또한 어느 정도는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자기 삶에서 아무 의미도 발견할 수 없고 혼돈 속에서 찰나를 보낼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전지적인 신 혹은 영원의 시간을 가진 우주에서 바라봤을 때나 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이죠. 화자는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grit과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허무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는 방법을 터득해나갑니다. 불임화 수술의 폭력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생존자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꼈듯이, 우리 자신을 개별적인 개체이자 그 의미를 가진 우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우리들이 '남들보다' 특별하다는 뜻이 아니라, 모두가 그런 것처럼 자기 자리에서 의미를 가지고 살아나간다는 뜻일 겁니다. (여기서 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시시해보이는 식물들의 학명을 외우고 그들의 특성을 이해하며 반가워했던 것을 떠올리고 씁쓸해졌습니다...)


화자는 자신이 계피냄새가 나는 첫사랑 남자와의 연애에 실패한 것을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애썼습니다. 그 지독한 좌절 속에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기도 했죠. 화자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첫사랑과 연애를 하던 도중에 해변에서 어떤 여자아이를 발견했고 그 아이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죠. 그래서 그는 왜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배신하면서까지 그 충동에 휩쓸렸는지, 왜 자신이 이토록 어리석었는지 "도덕적"인 자책을 계속합니다. 


그는 이 책의 말미에 깨닫습니다. 자신이 파티에서 만난 다른 어떤 여자에게 끌리고 그 여자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사실은 양성애자였다는 사실을 발견하죠. 여기에서 독자인 우리는 두가지 해석을 얻게 됩니다. 그 때 화자가 계피냄새 첫사랑남자와의 연애 중 다른 여자아이에게 끌렸던 것은 단순한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그 자신도 모르던 양성애자로서의 충동이 이끌었던 것임을. 그리고 "물고기"란 분류가 틀렸듯이 화자에게 씌워진 "이성애자"로서의 분류 또한 틀렸을 수 있음을요. 화자는 세계가 혼돈이라는 그 깨달음을 자신의 성 정체성에 고스란히 적용하고 적응합니다. 화자는 이전까지의 잘못된 분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신으로, 혹은 더 온전한 자신으로 거듭납니다. 자신이 무엇에 끌리고 행복해하는지를 발견했으니까요.


여기서 화자의 이야기는 조금 아이러니하게 흘러갑니다. 연애 도중 다른 여자아이와 바람을 피워서 화자는 이별을 당했고 고통스러워했지요. 그런데 같은 실수를, 다른 여성과 사귀면서 또 반복합니다. 여자친구와 여행을 간 화자는 서퍼 가게에 있는 에메랄드 빛의 눈동자를 가진 소녀에게 끌리면서, 그 여자와 같이 잠수를 하고 수영을 하면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죠. 만약 이 책이 도덕에 관한 책이었다면 이 부분은 아귀에 맞지 않습니다. 화자는 후회를 했고 깨달음을 얻은 뒤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면 안됐으니까요. 그런데 화자는 똑같은 짓을 합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죠. 어째서? 당시 사귀던 여자는 별로였고 화자는 이제 도덕적으로 망가져버려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나서는 건 자신이 무엇에 끌리고 행복해하는지를 깨닫는 것일 겁니다. 화자가 남자만이 연애대상이 아니라 여자 역시 연애대상이라는 걸 발견한 것처럼, 더 정확한 연애대상을 찾아내면서 새로운 자기자신에 급격히 적응한 것이겠죠. 이것을 과연 인간 사회의 도덕으로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연애 대상이 화자에게는 생물로서의 또 다른 환경이자 자신의 유전자 안에 들어있는 본능적 충동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물로서 더 정확한 행복을 발견하고 그것을 쫓아나가면서 화자는 "진화"를 해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인간 사회의 "질서"에 반대되는 "혼돈"으로서의 행보일지도 모릅니다. 화자의 변덕과 충동은 혼돈 속에서도 유의미를 잡아내려는 또 다른 혼돈스러운 도전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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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지독한 끈기와 열정이 어디에 도달했는지, 질서를 찾으려는 그 "신성한" 움직임은 얼마나 악하고 속된 결과를 빚어냈는지 이 책은 고스란히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는 늘 이러한 혼돈으로 가득차있고 때로는 선의를 부르짖는 그 일방적인 흐름이 많은 다양함을 파괴해버린다는 경고를 던집니다. 그리고 화자의 제멋대로의 연애와 행복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결함이 있거나 사회적으로 계도해야할 대상만은 아니며, 어쩌면 자신의 혼돈을 유난히 크게 가진 "어떤 사람"으로서 그저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요. 행복해질 자격에 대해 우리는 감히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달팽이가 느리다고, 소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우리는 그것을 열등하거나 귀찮은 것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존 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으면 그것이 또한 혼돈의 아름다움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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