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땐가 고등학교땐가 집에 혼자 있는데
케이블에서 나쁜 남자가 하길래
뭣도 모르고 봤습니다. 아마 기억하기로는
유명세와, 그 높다는 선정성에 대한 호기심때문에
그래서 봤지 싶습니다.
몸을 파는 사람들, 사는 사람들
말아쥔 전단지로 칼침을 놓고,
형님의 여자를 사는 동생,
팔리는 모습을 엿보는 형님
한참 후에는 화면이 해변을 향하고,
트럭은 짐칸이 덜컹거리고,
남자는 길바닥에 앉아만 있습니다.
이해해야 되나?
내가 어려서 그런가. 어른들은 이해하나.
혼자서 짐짓 아닌척은 해봐도 아니라고 할수 없는, “선정적 장면”에 대한 기대는
예저녁에 낭심을 걷어차이고 구석에서 낑낑거리고
난 왜 이걸 계속 보고 있나 까짓거, 채널 하나 돌리면 그만, 하는데
말안듣는 못난 동생을 줘패던 형님이, 영화 내내 침묵하던 형님이, 영화 처음으로 입을 엽니다.
말의 뜻, 말의 소리, 말이 담은 울분
뭐가 그리 울분에 찼는지, 뭐 그리 한이 사무친지
이 광경을 사랑이라 고집부리고 싶은건지
집착인건지
아니 집착이면 왜 그렇게 슬픈척인지
그런데 척이라고 하기엔 진짜로 슬퍼보여서
의문은 다시 돌아갑니다. 뭐가 그렇게 슬픈지. 뭐가 그리 울분에 찼는지
어쩌다 그 모양 그 꼴이 됐는지
시궁창을 오래 들여보다가, 시궁창을 연민하는 마음으로
그래도 결국은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 세상에 살 수는 없어서
이후로 이 감독의 영화를 굳이 찾아서 본 일은 없습니다.
어쩌다 다른 작품이 케이블에 나오면, 채널 돌리다 어쩌다 거기서 멈추면 들여다보고
외국에서 큰 상 받았다는 영화도 소식만 듣고, 보진 않았습니다.
어떤 영화일지 알것도 같았고. 결국엔 이해할수 없을것도 같았고
구태여 찾아보기엔 역하고 쓰리지만, 어쩌다 보일땐 들여다 보아주겠다 하는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그래도, 이 영화속 남자가 처음이자, 기억하기로는 아마 마지막으로 입을 뗐던 그 순간의 충격이 쉽게 잊혀지지가 않아서
지금에야 쑥스럽게나마 말해보건데, 어린 나이에 느꼈던 “예술적 충격” 이라고 할만 합니다.
그래도, 이 논란과 구설수의 작품이
누군가에겐 혐오를 던지고, 누군가에겐 어떤 중고딩 꼬맹이에게 처럼 답답한 충격을 던진
이 영화의 예술적 가치라는 것이
그 폭력과 구속과 집착과 비뚤어진 군상의 표현이라는 것들이
호불호가 있을 지언정
온전한 예술가의 온전한 예술적 지향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사실은
뒤틀린 예술가의 무도한 본성과, 용납할수 없는 파괴적 욕구
그 위에 덧칠을 얹은 것뿐이라면
누군가는 그 안에서 가치를 보고, 혹은 감동을 하고
그렇더라도 그 예술의 근원이 되는 것이
그렇듯 불의하고 괴악한 심성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깟 예술은 그냥 없는 것이 세상에 낫지 않나
예술가의 그 무도한 본성과 함께
그로 인해서 해 입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그냥 애초에 없었던 편이
세상에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소식이 항상 늦는 저는
지지하던 안희정의 소식을 들었을때보다
조민기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때보다
더 많은 줄담배를 태우면서
해봅니다.
당시 저는 뒤늦게 들어간 학교에서 졸업논문을 쓰느라 애를 먹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논문 주제가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다 보니 19세기 서양 근대미술에 대한 적지 않은 자료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양근대미술에서 묘사하는 여성 캐릭터 대부분이 '창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길, 당시 여성참정권 주장과 같은 페미니즘이 대두되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었죠. 아마도 당시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대두되던 여성 운동에 대한 혐오 감정이 미술에 그런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김기덕의 나쁜남자를 비롯한 그의 영화에 열광하는 서양 평론가들이나 그 팬이라는 사람들, 이런 심리하고 뭔가 통하는게 아닌가 싶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