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의 법과 규칙

2020.07.27 11:31

Sonny 조회 수:1055

http://www.djuna.kr/xe/board/13809870


인터넷 커뮤니티가 새삼 얼마나 고도의 선의와 미묘한 합의로 구성되어있는 공간인지 실감합니다. 여러 명의 사람이 모인 공간에서 별 다른 규칙없이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논쟁도 불사하며 금전적, 사회적 이익 없이 그저 자존심과 공동체의 인정이라는 작은 관계의 자기만족을 위해서 각자의 성실을 동원하고 있는 거죠. 서로 가치관과 금기가 다른 이들이 그 안에서 하나의 미묘한 선을 긋거나 지우며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것은 완벽하게 정치적인 현상입니다. 그 개인적 정치성이점멸하는 가운데 커뮤니티는 다수의 합의와 보편적인 공의(저는 사실 이 부분에서는 별로 확신이 없습니다만)를 실험하는 장이 됩니다.


이 게시판에서 인터넷을 짧게 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어찌보면 모두가 인터넷 제네레이션이고 더러는 피시통신 세대로서 온라인의 소통을 이미 체화하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대개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생리를 습득하고 있을 겁니다. 감히 제가 개인적으로 얻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마음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수다떠는 곳"입니다. 이걸 누가 모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곱씹어봐야 할 본질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놀면서 굳이 "이제부터는 이런 식의 대화나 언어적 행위를 하지 맙시다"라고 규칙을 정해놓고 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모두가 어떻게 대화를 해야하고 사람 사이의 예의나 보편적 규범을 알고 있습니다. 이걸 알고 있지 않거나 파괴하는 사람과는 굳이 대화를 하지 않고 자리를 피하죠. 온라인도 이건 똑같습니다. 규칙을 상기시키고 그걸 적용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규칙이 자꾸 새로 세워지고 호출되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그 커뮤니티는 이미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소통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경찰이 자꾸 출몰하는 지역은 치안이 좋은 곳이 아니라 치안이 안좋은 곳임을 의미합니다. 법이 새로 제정되고 법관이 자꾸 등장해야 하는 커뮤니티는 이미 회원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커뮤니티의 기능이 마비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이걸 가장 극단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디시인사이드처럼 유동닉들의 무질서한 소통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규칙이 없으면 싸움이 일어나도 "반칙"은 생기지 않습니다. 반칙이 없으면 뭘 해도 자유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됩니다. 이건 사실상 성숙한 커뮤니티라고는 보기 힘들죠. 일종의 슬럼가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그 어떤 제재나 규정도 필요로 하지 않는 무법자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번뜩이는 재치나 해학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회원 사이의 보편적인 소통이나 교류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안그런 갤러리들도 있지만, 그런 갤러리들은 최소한의 사회성을 담보하고 암묵적인 규칙을 갖고 있습니다. 디시인사이드는 듀나 게시판이 지향해야 할 공간은 아닐 것입니다. 쌍욕과 조롱과 영양가없는 자기주장만이 횡행하는 공간은 "굳이" 듀나게시판을 찾아오거나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죠. 


따라서 듀게 회원들은 게시판의 슬럼화를 막고 보다 양질의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쁜 말"을 하는 회원들을 다 벌주고 쫓아내면 될까요? 경찰을 많이 뽑는다고 범죄가 줄어들지 생각해봅시다. 토마스 무어가 유토피아에서도 지적했던 이 문제는 몇세기 후의 게시판의 문제에서도 유효합니다. 게시판의 질적 성장과 안정화는 근본적으로 좋은 글을 많이 쓰고 생산적인 대화를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도둑을 줄이는 방법은 도둑질을 할 필요가 없게끔 저마다 넉넉하게, 모자라지 않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게시판 내의 규칙을 엄격히 적용하자고 하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규칙은 필요하죠. 규칙이 명시되지 않았을 경우 모든 보편적 규정이나 예의를 파괴하는 사람들은 꼭 나타나게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회원간의 갈등을 이 규칙을 어겼으니 이걸 어긴 죄로 처벌하자고 하는 것은 이미 이 규칙이 필요해질만큼 황량해진 게시판을 더 망가트리기만 할 뿐입니다. 


위에서 제가 커뮤니티의 본질을 곱씹었던 이유는, 커뮤니티가 그런 법이나 규칙이 필요가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발생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법을 만들고 적용한다고 해봅시다. 현실에서도 최소한의 도덕과 사회유지를 위한 법은 너무 방대해서 법을 다루기 위한 십년 단위의 전문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게 게시판에 적용이 될까요? 제 아무리 구체적으로 명시를 한다고 해도 성문법은 반드시 추상적일 수 밖에 없고 해석의 다름이 충돌할 여지를 남겨놓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개 게시판에서 누구를 벌점먹이고 쫓아내기 위한 득없는 짓거리를 하기 위해 어느 누가 듀게 법령을 엄격하게 쓰고 검사, 변호사, 판사의 노릇을 성실하게 다 하겠냐는 거죠.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 작은 게시판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정확한 규칙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두루뭉실한 법을 현생을 살고 있는 회원들과 관리자가 적용합니다. 코걸이도 되고 귀걸이도 되는 이런 상황은 반드시 한계에 봉착합니다. 아주 극단적이고 대다수의 합의를 얻을 때에만 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시시한 말싸움으로 왜 내가 벌점을 받냐 어쩌냐 하는 상황이 커뮤니티 자체적으로 소모적입니다.


상대 닉네임을 본인이 직접 명시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단어 하나를 빌미로 특정인을 가리켜 비난하는 글이고, 글을 읽는 사람이면 그 특정인이 누구인지 대부분 알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의 저격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누군가를 신고한다는 이 글의 주된 논지를 봅시다. "특정인을 가리켜 비난하면 안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왜 안됩니까? 아니 나쁘다는 단순한 이유를 대기 전에, 이 게시판에서 왜 그 행위가 유달리 금지되어야 하고 그것이 첫번째 일벌백계가 특정 회원이어야하는지 그 어떤 구체적인 사항도 없습니다. 누가 나쁘다? 그럴 수 있죠. 그런데 도덕과 금기는 늘 사회적인 평균을 따라갑니다. 디시에서는 반말이 그냥 일상입니다. 반말하니까 저 사람 쫓아내주라고 하면 그냥 다 웃을 겁니다. 보다 공적인 커뮤니티에서는 반말이 그 집단 내에서 반사회적인 행위로 간주되겠죠. 그러니까 듀나게시판에서 왜 "갑자기" 누군가를 가리켜 비난하면 안되냐는 겁니다. 여태까지도 일상적으로 해왔고, 그걸 당연한 룰로 인지해왔잖아요. 그것이 나빠서 변화가 필요하다면 누구 하나를 족치자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변화를 논의하고 구체적인 사항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비난은 어디까지가 비난이고 어디까지고 비판이며 지적인가, 저격의 구체성은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가, 저격을 금지했을 때 어떤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가, 이런 문제들을 아주 길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어떤 명분을 빌려서 혼내주겠다는, 괘씸함만이 있죠. "비난", "특정인을 가리켜 비난", 이런 행위들을 처벌한다면 실질적으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이 저 링크글이 지목하고 있는 회원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편의적이고 진영론에 가깝죠. 법의 최대핵심은 형평성입니다. 그런데 당장 있지도 않은 법을 제안하면서 처벌을 예고하는 이 글은 그 형평성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입니다. 심지어 이 글 자체가 "누구를 특정해서 비난하면 안된다"는 논지에서 모순을 일으킵니다. 


이걸 그대로 "입법"해서 적용한다고 해봅시다. 저격이 금지되면, 그 다음부터는 이 게시판에서 저격행위가 완전히 사라질까요. 커뮤니티의 법은 친고죄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고를 안하면, 그 법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리고 신고에 부지런한 사람이 반대진영을 엿먹이는 목적으로 악용할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의 법은 모두가 성실한 경찰, 검사, 판사가 되어야 한다는 근본적 한계가 있습니다. 신고를 하는 회원들이 그렇게 공명정대한 사람들인가요? 당장 저만 해도 그렇게 열심히 신고하거나 항소하거나 변호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듀게에서 아무도 못합니다. 진짜 할 일 없는 사람을 빼고는요. 혹은 게시판에서 분풀이에만 할 일 있는 사람이 가능할 겁니다. 그건 게시판의 본래의 목적과 완전히 어긋납니다. 그 어떤 커뮤니티도 신고를 열심히 해서 불량회원을 축출하자는 목표를 삼지 않습니다. 더 양질의 글을 더 많이 올려서 더 많이 소통하고 작은 즐거움을 얻는 게 목적이죠. 컨텐츠의 생산과 소비에서 규정과 처벌은 아주 부수적이고 필요악에 가까운 행위입니다. 


저격을 처벌하자는 이 법의 근본적 문제를 제가 말해볼까요. 저격을 금지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회원간에 상호비판이 어려워집니다. 그럼 누가 가장 이득일까요? 비판 받을 소지가 다분한 글을 쓰는 회원들이 제일 이득입니다. 비판을 받을 각오를 하고 쓰거나, 비판받을 여지를 최대한 줄이고 쓰려는 회원들은 손해입니다. 자기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조리 저격으로 몰아버리면 됩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댓글로는 직접적으로 공격을 해도 되는데, 글을 따로 파서는 공격하면 안됩니다. 이건 트위터로 치면 인용알티냐 댓글달기냐 알티 하고 따로 타임란에 쓰는 거냐 하는 형식의 차이만 있거든요. 이런 규칙이 듀게에 실제로 적용될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정도로 게시판의 수준이 단순해지고 어떤 고찰도 없는 처벌장땡의 사고가 점점 횡행하는 현상은 좀 걱정스럽습니다. (비판을 악으로 치부하는 한국 특유의 토론맹 증상과 개인화 탐닉은 나중에 더 자세하게 써보겠습니다) 듀게만큼은 조금이라도 더 정교해지면 좋겠으니까요.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이런 규정이 이렇게 별다른 논의없이 제시되는 것 자체가 게시판의 퇴화를 가리킵니다. kibun에 따라 게시판을 공개처형장으로 만드는 건 비생산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엄격해져야 할 것은 주장과 논쟁이지 이런 법안 제출은 아닐 것입니다. 듀게의 이 이슈는 검열이라는 주제에서도 충분히 생각해볼만 합니다. 세상에 어느 하나도 그 자체로 악인 것은 없습니다. 명백한 정치적 목적만을 가지고 단순한 정의를 표피에 두르고 있죠. 너무 단순한 것은 그 자체로 해악을 발생시킵니다. 단순한 법칙은 늘 기분에 따라 일관성을 잃게 마련이구요. 커뮤니티는 툭하면 쉽게 다수의 편향에 좌우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용자 개개인이 보다 성숙해지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저는 커뮤니티의 선기능과 효과를 믿는 쪽이라서 어떻게든 게시판을 생산적을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 이 글을 썼다고 해서 제가 이 게시판의 모든 규정이나 처벌에 반대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도 규정을 반드시 적용할 수 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은 듀나게시판에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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