싶다

2020.11.15 05:38

어디로갈까 조회 수:843

# 너무 심란한 꿈에 시달리다 깨어났습니다. 그럴 때 해보는 짓 중 하나가 좋은 것, 싫은 것, 무서운 것, 예쁜 것들을 죽 적어보는 거에요.
그러다보면 '싶은' 게 보이고 (하고)싶은 게 생겨나기도 하거든요. 가령 이렇게 듀게에다 무작정 주절거려보고 '싶은' 것. - - 

# 잠들기 전, 오랜만에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느닷없는 하소연이었는데 듣기만으로도 너무 힘 빠지는 상황에 처해 있었어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우린 아직 젊디 젊은 나이잖아. 판단되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일단 밀어부쳐봐야지~" 
그랬더니 그가 바람소리를 내며 웃었습니다 ."넌 나보다 높은 곳, 최소 해발 몇백미터에서 출발한 인생이라 나처럼 이렇게 수면 아래 침수된 채 시작한 사람의 절망을 모를거야... "
흠. 당연히 저는 절망의  흐름 속에 있는 그가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가 어떤 것인지 제꺼덕 알 수 있는 현자가  아닙니다 . 그럼에도 그렇게 말해볼 수밖에 없었어요. 막연한 젊음에의 예찬이 그 친구에게 가닿을 수 없었으리라는 건 이해가 됩니다. 알지만 기분은 울적하네요.

입학 후 첫 오리엔테이션에서 그는 " 내 안에 숨쉬는 괴물이 있는 놈"이라고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뭐 그 진술이 허풍이었다는 건 금세 들통이 났지만요. 지켜본 바로 그는 자제력이 뛰어난 UFO 형 인간입니다. 세상에 얻어맞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건체이고요.  그런 이가 얼마나 힘들면 저에게까지 고통을 토로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까요. 부디 그의 시간이 경계를 잘 넘어 순조롭게 흘러가기를...

# 다른 이들이 쓴 글을 읽노라면, 어떤 정서는 감상에 빠지게 하고 어떤 정서는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어떤 주장은 사회에 파급력을 행사하는 활동으로 보이고 어떤 견해는 머리속 생각의 정수가 주르륵 새어나온 밑빠진 문어항아리 같아 보이고요. 
어제 아버지와 바둑을 두던 중 그의 장고에 지쳐서 노트북을 힐끔거리다가 이런 말을 중얼거렸더니  번쩍! 질문하셨습니다.
"밑빠진 독이면 독이지, 문어항아리는 뭐냐?"

- (흠칫) 아부지~ 일본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가 민주주의와 근대 사이의 함수관계를 일본에 도입하기 위해 한 말이잖아요. 그렇게 자신의 학문적 실천을 진행했다던가 뭐라던가... 
그러다 실패하자 무엇이 그런 도입을 방해하는지 궁금해서 '일본 문화의 고층'이라는 고고학적 인류학을 탐구했댔잖아요.  의미있고 흥미로운 연구였다고 봐요.  하지만 그의 연구에서 이것저것 다 들어내고 핵심만 보면 '세상에는 두 유형의 문화가 있다'는 거예요.
이른바 문어항아리형과 부챗살형 구별이었어요.  그가 부챗살형으로 예로 든 게 서구 근대문명이고, 일본은 철저히 문어항아리형이랬어요. 대륙과 반도에서 떠내려온 것은 버리지 않고 신성하게 아카이브 하는 문화라던가 뭐라던가.

제가 이렇게 조잘재잘떠들거리자 아버지가 반문하시길 "중국도 문어항아리 아닌가? 일본이 대륙과 반도의 도래문화에 대해 굽신거린 건 사실이지만, 그것 역시 오규 소라이와 이토 진사이의 국학 운동으로 주체화된 것 아닌가? 태평양의 수평선 너머에서 전혀 다른 외생변수가 발생하자 부챗살형으로 퍼져 나간 것 아닌가? "
아아, 저는 아버지와 절대적 혈연관계여서 그의 까마득한 과 선배로서의 내공과 위력을 간과해버리고 말았던 거시었던 거시었던 거시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사오는 서유럽의 근대성을 전제로 삼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내세운 ‘근대의 초극’을 비판했지만, 서유럽의 근대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부챗살형일 경우도 있었고, 문어항아리형이었던 경우도 있었죠. 그런데 한국은 지정학적 복잡함을 감안하더라도  현실을 가상화하고 진실을 포스트모던화하는 짓을 남발하면서 모든 것이 헷갈리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조선 시절, 중국과 일본이 부분적이든 전면적이든 서구 열강과 교류를 진행할 때, 한국은 쇄국했습니다. 그리고 중화질서 그 바깥을 무시하고 눈감아버렸죠. 눈을 질끈 감고 현실을 가상화하는 그런 식의 문어항아리의 밑은 빠져 있을 수밖에 없는 거고요.

'밑'이라는 것, 저 바닥과의 접촉벽으로서 '밑'이 없다면 그 바닥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용기 속에 담겨 있던 생각의 정수가 줄줄 새버리기 마련입니다. '밑'의 변은 접촉벽으로서 항상 유지되어야 하는데, 고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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