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 첫 영화네요. 요즘 너무 두기봉판(?)이어서 잠깐 쉬어갈까 하다가 기껏 고른 게 이 영화입니다. 뿌리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ㅋㅋ 스포일러 없게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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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가 시작되면 되게 텅 비어 보이는 방의 풍경이 보입니다. 정확히는 거실인데, 따로 방 같은 게 없는 구조의 황량한 느낌이 드는 집이에요. 거기에는 침대가 있고 새장 하나가 덩그러니 있고 창문 둘이 보이죠. 그리고 침대 위에는 알랭 들롱님이 누워 계시구요. 그리고 '암흑가의 세 사람' 때마냥 오리엔탈리즘 쩌는 글귀 하나가 화면에 뜹니다. 대략 '세상에 사무라이보다 고독한 자는 없다. 정글의 호랑이 정도를 제외한다면.' ㅋㅋㅋㅋㅋㅋ

 

 한참 뒤에 남자는 일어나서 새모이를 주고, 정성들여 정장을 차려 입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차를 훔치고, 어딘가로 그 차를 달려서 번호판을 갈고 총을 구해요. 그리고 웬 여자를 찾아가고 사설 도박 모임을 찾아가서 알리바이 작업을 한 후, 라이브 재즈 무대가 있는 고급진 술집을 찾아가서... 한 남자를 쏴죽이고 달아납니다.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해서 깔끔하게 잘 해낼... 뻔 했습니다만, 문제는 사람을 죽이고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거기서 일하는 피아니스트에게 문자 그대로 '딱 걸렸'다는 것.

 잠시 후 '인권 따윈 필요 없어. 우린 범죄자 잡는 사람들이고 범인만 됨!' 이라는 스피릿으로 무장한 프랑스 경찰의 헉소리 나오는 무지막지한 수사로 알랭 들롱은 광속 체포되고. 미리 준비한 알리바이를 들이대지만 믿지 않는 경찰은 술집 직원들을 대면시키며 증언을 받아내는데...



 - 흔히들 '첩혈쌍웅'의 아버지로 많이 언급하는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혼자 사는 고독한 킬러. 완벽한 임무 수행을 망쳐버린 여성 뮤지션과 유대감 형성. 임무를 준 조직과 경찰에게 쫓기게 되어 복수를 꾀하게 되는 전개... 정도로 정리를 하면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정작 실제로 영화를 보면 전혀 달라요. 애초에 장 피에르 멜빌이 오우삼표 홍콩 느와르의 직계 조상으로 공인되어 있지 않았다면 조상이란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을 듯.

 하지만 어쨌든 멜빌 영화들이 홍콩 느와르의 조상이라는 건 그냥 교양인의 상식처럼 인정되는 분위기이니, 그걸 바탕에 깔고 생각해본다면 '첩혈쌍웅'이 멜빌의 이 영화에 오마주를 바치는 의미로 만들어진 오우삼 버전의 '고독'이라고 주장해도 무리수로 보일 건 하나도 없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기본 설정만 가져다가 80년대 홍콩 영화풍으로 만들어낸 팬픽이 '첩혈쌍웅'이라고 말해도 크게 과장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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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킬러!)



 - 두 영화의 차이점이 무엇일지는 영화를 안 본 사람들도 쉽게 짐작할 수 있죠. 이 '고독'에는 오우삼식 멜로 드라마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형사와 범죄자가 서로 느끼는 유대감이라든가, 비극적 사랑이라든가, 뜨거운 의리와 우정!! 등등 아무 것도 없죠.

 화려한 총격전도 없구요. 이 영화에서 총질 장면은 딱 세 번 나오는데 매번 그냥 타겟의 코앞에서 슥. 하고 총을 꺼내서 곧바로 '빵빵!!' 하고 두 방 정도 총성 울리면 그걸로 끝이에요. 알랭 들롱의 캐릭터는 유능한 킬러이긴 하지만 그 유능함은 치밀한 준비와 조심성으로 표현되지 절정의 총솜씨나 발레 같은 액션으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근데 재밌는 건, 그런 홍콩 영화식 내지는 오우삼식 해석이 가능할만한 단서들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알랭 들롱을 쫓는 형사 캐릭터는 유대감 그딴 건 개뿔이고 명백한 과잉 수사를 저지르고 다니는 무자비한 놈이지만 어쨌든 알랭 들롱이 치밀하고 유능한 범죄자라는 건 처음부터 '감'으로 인정을 하구요. 들롱이 엮이는 두 여자와 들롱의 관계를 보면 뭔가 알 수 없는 묘한 유대와 믿음 같은 게 있어요. 만나면 늘 말 한 마디 없이 일을 진행하는 조력자와의 관계도 알 수 없게 매력적이구요. 또 중간에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가는 들롱 캐릭터의 능력 같은 걸 보면 인간의 경지를 살짝 초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그래서 다시 한 번, 첩혈쌍웅이 이 영화의 자식이라는 건 나름 설득력 있는 해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에서 맘에 드는 디테일들을 발굴해서 자기 스타일로 새롭게 창작해내는 것. 훌륭한 팬픽의 조건 아니겠습니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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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끝날 때까지 이름 한 번 안 나옵니다. ㅋㅋㅋ 그래도 스토리상 존재감은 주인공 바로 다음이구요.)



 - 계속 오우삼 얘기만 했는데... 두기봉스런 부분, 그러니까 두기봉 역시 멜빌의 영향을 받았구나 싶은 부분들도 많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등장 인물들의 구구절절한 개인사 같은 정보를 다 과감히 생략하는 것. 범죄자들, 그들과 대립하는 조직(경찰 내지는 범죄 조직)들의 전문성을 강조해서 그걸로 액션과 갈등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 부분들이 그래요.


 알랭 들롱의 킬러 캐릭터부터가 정체불명이면서 이 양반을 돕는 젊은 미모의 여성도, 그리고 피아니스트도 모두 명확하게 설명이 안 됩니다. 다들 스스로를 큰 위험에 빠뜨려가면서 무리수에 가깝도록 들롱을 도와주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죠. 하지만 그냥 쌩뚱맞은 게 아니라 '내가 몰라서 그렇지 뭔가가 있긴 한 것 같은데...' 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겨줘서 개연성 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은 또 안 들게 만드는 게 기가 막히구요. 그냥 흔한 조력자 A라는 느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각각의 확실한 캐릭터가 느껴지는 것도 훌륭합니다.


 전문성 강조 부분은 뭐... '암흑가의 세 사람'이랑 비슷합니다. 보통 액션/스릴러 영화라면 대충 빠르게 지나쳐갔을 부분들을 굉장히 느긋하고 차분하게 자세히 보여주는 거죠. 들롱이 첫 살인을 준비하는 장면이라든가, 경찰들이 들롱의 집에 도청기를 설치하는 장면들 같은 게 그렇구요. 특히 첫 번째 살인 후 들롱이 경찰에 연행 되어서 조사를 받는 장면은 참 대단(?)합니다. 체포된 후 경찰의 조사 과정, 그리고 결국 들롱이 풀려 나오는 과정을 거의 20분동안 그냥 통으로 보여줘요. 아니 이게 무슨... ㅋㅋ

 이 영화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부분인 경찰의 감시 따돌리기 장면 같은 것도 딱 그냥 '전문가 vs 전문가'의 대결로 느껴지도록 전개가 됩니다. 특히 이 부분은 그냥 '감시자들'의 1967년 프랑스 영화 버전처럼 느껴지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그 영화가 두기봉이 제작한 '천공의 눈' 리메이크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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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을 알기 힘든 조력자A씨. 연기한 배우는 당시 알랭 들롱의 아내였던 나탈리 들롱입니다. 되게 세련되게 예쁘시던.)



 - 근데...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엔 이런 부분들보단 그냥 딱 한 가지에 굉장히 강렬하게 꽂히게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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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습니다. 이거슨 알랭 들롱 리즈 시절 절정의 비주얼과 분위기를 박제해 놓은 한 시간 사십분 분량의 알랭 들롱 화보집이었던 것이었던.... ㅠㅜ

 극중에서도 유난히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캐릭터로 나와서 정말 시종일관 단 한 순간도 굴욕이 없는 100분을 선사해주십니다. '암흑가의 세 사람'에서도 멋졌던 이 분이지만 이 영화와는 비교가 안 되네요. 진짜 끝내줍니다. 얼굴이 개연성, 얼굴이 흡인력, 얼굴이 재미와 감동. 뭐 이런 느낌. ㅋㅋㅋ

 이러니 그렇게 인성이 개차반이어도 시대 풍미하고 잘 먹고 잘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죠. 이 더러운 세상 같으니!!!!!



 - 대충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이게 '암흑가의 세 사람'보다 먼저 나온 영화인데. 이야기의 규모나 스케일도, 긴장감과 액션 면에서도 훨씬 소박하고 심플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황량하고 고독한 분위기 자체는 오히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고. 또 소박한만큼 더 정갈한 느낌이 들어서 취향에 따라 그보다 훨씬 맘에 들어하는 사람도 많겠다 싶었네요. 완성도도 아주 훌륭하구요.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간지'는 이 쪽이 더 낫습니다. 뭔가 이 두 영화에서 맘에 드는 부분들을 골라내서 화려한 동양적 멜로드라마 스타일로 완성한 게 홍콩 느와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만 제목에서 '첩혈쌍웅' 드립을 쳐놓은 것과 다르게 영화의 성격은 오우삼보단 두기봉 스타일에 훨씬 더 가까운 범죄물이었네요.

 어쨌든 뭐, 화려한 액션과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반전의 반전!! 같은 걸 기대하지만 않는다면 대부분 재밌게 보실 수 있을 좋은 범죄물이었네요. iptv에 vod로도 다 있는 것 같으니 관심 있으시면 한 번 챙겨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한국 비디오 표지는 이랬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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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름 영화를 보고 적은 카피인 건 분명합니다. 영화 속에 미녀가 세 명 나오거든요. ㅋㅋ 마지막 한 명은 비중이 영 아니긴 하지만 예뻐서 카피 작성자 기억에 남았나봐요. 근데 저 박스까지 쳐 놓은 'Good sympathy'는 무엇이며... 들롱 어깨 뒤에 합성해 놓은 저 남자는 중요한 캐릭터도 아닌데. ㅋㅋ



 ++ '고독'이라는 번역제에 대해서 생각해봤는데. 원제와 워낙 관계가 없으니 쌩뚱맞긴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나름 분위기를 잘 표현한 제목 같기도 합니다. 오프닝 자막에서 강조하는 게 '고독'이기도 했고, 뭣보다 그 시절에 '사무라이' 같은 제목은 좀 쓰기 그랬겠죠. 



 +++ 참 말이 없는 영화로 유명합니다. 확인해보니 영화가 시작되고 첫 대사가 나오기까지 10분이 걸리더군요. 



 ++++ 보는 내내 영화 속 경찰이 수사하는 모습이 당시 프랑스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고 얼마나 벗어난 것일지 궁금했어요. 아니 진짜 무자비하거든요. ㅋㅋㅋ 용의자 집에 맘대로 침입해서 도청장치 설치하는 거, 용의자 주변 사람들을 대놓고 협박하고 다니는 건 그냥 그러려니 하더라도. '코트에 중절모 쓴 키 큰 남자'라는 힌트에 맞는 사람을 바로 길거리로 뛰쳐나가 수백명을 검거해와서 줄을 세워놓고 무슨 오디션 프로 마냥 무대 위에 줄세워 놓고 심사위원석(?)에 경찰과 목격자들이 앉아 대화를 나눈다든가. 아예 그냥 용의자와 대면을 시켜 놓고 '얘 맞아요?'라고 묻는 거라든가. 진짜 상상을 초월하는 수사가 쭉 이어져서 좀 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ㅋㅋ



 +++++ 근데... 알랭 들롱처럼 생겨서 암살자를 직업으로 택한다는 건 참 바보 같은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아니 이건 뭐 슬쩍 스쳐지나가도 한 10년은 기억날 얼굴인데요. 그 얼굴로 범죄자로 살고 싶다면 사기꾼 정도로 만족해야죠. 킬러는 아닙니다 진짜로.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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