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헷갈릴 때

2012.05.18 16:58

yusil 조회 수:13790



 

저는 판소리 키드였어요. 배넷저고리 입고 누워, 다리 잡고 놀던 시절부터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할아버지 일제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춘향전, 흥부가, 적벽가 하는 것들을 줄곧 듣고 자랐으니까요. 이러쿵저러쿵해서 어린시절을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조부모님과 보냈고, 흥이 많으셨던 분들이어서 집안에는 늘 민요, 판소리, 대금 하는 우리 소리들이 흘러나왔죠. 제 유년의 브금이었던 셈이네요. 사랑사랑사랑 내 사랑이야 하는 사랑가를, 산도 하나 손에 꼭 쥐어주면 어깨춤 섞어 편곡하며 불렀고, 수궁가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의 세스펜스를 숨죽여 즐길 줄 알던 그런 아이였어요.

 

그런데 기억이란 게 참 이상해요. 그 좋았던 시절을 한동안 잊고 살았어요. 무심했죠. 어린시절 판소리를 줄곧 들으며 자랐다는 게 친구들과 대화 내용에 등장할만한 소재도 아니었고, 연애 상대에게 저 판소리 한 대목쯤은 줄줄 외울 줄 알아요(수줍) 하는 걸로 매력어필 할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휴일 아침, 티비 채널을 무심코 돌리다 국악채널이 걸리면 리모콘 쥔 채로 한참 보고 있는 동안에도 알아채지 못했어요. 어느 날 라디오 클래식방송에서 심 봉사 눈 뜨는 대목이 나오는데 '아,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대목이다' 하고 떠올리는 정도였죠. 황후가 된 심청이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연 맹인잔치에 제일 늦게 당도한 이가 도화동에서 온 심학규인 것을 확인하고, 버선발에 자진모리 스텝으로 뛰어나와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죠. 어서어서 눈을 떠서 소녀를 보옵소서"하고 오열하는 대목에서 할머니는 늘 우셨어요.

 

스무살 초반, 그 시절의 연애가 자주 그러하듯 맹목적이고 어리석었던 짧은 연애를 끝내고 허우적대던 때 한 남자를 만났죠.  제가 필드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뛰고 있는 길몽을 꾸었노라며 힘을 내라고 응원해 주던 그 남자와 데이트를 하던 어느 날, 우리는 바람좋은 국립극장 야외마당에 나란히 앉아 있었어요. 안숙선 선생님 공연이었죠. 운 좋게도 선생님 치마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면 이마에 닿을락말락 한 자리였죠. 소리를 시작하시기 직전의 숨죽임 속에서 선생님의 모습을 찬찬히 올려다 보고 앉아 있던 그 시간이 참 포근하게 느껴져서 베시시 웃음도 나왔어요. 정갈하게 빗어넘겨 곱게 쪽 진 머리에 꽂은 비녀가 꼭 할머니의 그것 같았어요. 그리고 곧 선생님께서 소울풀한 음성으로 쑥대머리 귀신형용 하고 소리를 시작하셨는데... 저는 그만, 첫 소절에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고 울어버리고 말았어요.

 

어린시절 임방울 국창의 목소리로 듣던 그 쑥대머리였죠. 그리고 한꺼번에 유년의 풍경들이 펼쳐졌어요. 할아버지가 어린 제 손을 잡고 한 손에는 삽을 들고, 물꼬를 트러 가실 적에 논둑길에서 "나물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허면 넉넉허리" 하고 노래하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죠. 초봄 들녁에 소박하고도 근사하게 울려퍼지던 할아버지의 음성이 너무 좋아서 어린 저는 스르르 눈을 감기도 했을테죠. 기억 하나가 솟아오르자 어린시절의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서 저도, 곁에 있던 남자도 당황스럽고 놀랄만큼 한참을 울었어요.

 

초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오고 얼마 뒤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왕복 60km가 넘는 길을 하루동안 자전거로 다녀오실 정도로 정정하시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삼개월을 누워계시다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던 때였어요.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이었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환영한듯 쓸 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하는 사철가를 '짐 자전차' 뒤에 올라 타 할아버지 음성으로 듣곤 하였지요. 추임새가 뭔지도 몰랐지만 흥이 나면 엉덩이를 들썩거렸고, 할아버지 음성을 따라 얼씨구 하던 그 시절이 떠올랐으니 어떻게 울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요.

 

마음이 어여뻤다가, 나빠졌다가를 반복하는 요즘, 자주 그 시절이 떠올려요. 맘에 들지 않으면 아앙-하고 울어버리고, 좋으면 얼굴 가득, 좋아요-하고 웃으면 그만이던 그 순하고 화창하던 어린시절을요. 컨디션이 좋지 않아 늦장을 부려 출근하던 어제, 시디장에서 젊은 명창들의 소리를 모아놓은 시디를 들고 나와 차 안에서 들으며 출근했죠. 울지는 않았지만 울고 싶은 마음이었고 사무실 책상에 가득 쌓여있는 문서들을 양 팔 휘저어 밀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그러다 듀게에 왔는데 어느 고은분이 '억척가' 공연 티켓을 벼룩으로 올려놓으셨더군요. 저는 선물이라도 받은냥 공손히 섬기는 마음으로 양도 받았습니다. (잘 봤습니다!)

 

이자람의 억척가는 검색해 보니 많은 분들이 후기를 남겨주셨더군요. 저도 거기 있었고,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박수치고 기립해서 환호하는 공연을 혼자 보러 간 건 처음이었어요. 자유석이란 얘기에 살짝 당황했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 책도 읽고, 언제나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하우스매니저님의 고상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재치있는 안내 음성으로 전혀 적적하지 않았어요. 소리꾼 이자람이가 극을 끝내고 가락을 담아 하는 인사말 중에 "어떻게 살어야 하는지 헛갈릴 때, 판소리 한 자락을 들으러 오시오"라고 하는데,  창자가 오열하던 그 모든 절정을 독하게도 견뎌내고는 그만 그 말에 울컥하고 말았죠. 무릎에 올려뒀던 가방 살포시 옆에 내려놓고 홀연히 일어나, '고마웁소~~~' 하고 화답하고 싶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음이 순해졌어요. 웃고 있었고 함께 웃고 싶은 사람을 떠올렸어요. 아무것도 결심하지 않았고 그저 그 시간의 스스로가 좋아서, 마음이 절로 착해졌어요. 그 마음이 벌써 저만큼은 달아날만큼 일상은 개미지옥이지만, 오늘 하루 성실하게 주말맞이 온갖 잡무를 말끔하게 처리하(지는 못했지만;)고서는 후기 아닌 후기를 씁니다. 한시간 가까이 쓰고 있는데 그 사이 업무 때문에 통화한 사람이  "지금 음악 뭐 듣고 계시는 거에요?" 하고 묻네요. 쑥대머리 여러 버전이 있지만, 저는 가끔 생각날때마다 임방울 선생님 소리나 팝핀현준의 그녀, 젊은 명창 박애리가 부르는 쑥대머리를 듣습니다. 지나치게 슬프지 아니하면서도 애절하고 판소리하는 음성으로는 드물게 맑고 청아한 데다 현대적으로 편곡한 게 아슬아슬하게 (제 기준에는) 촌스러운 맛도 있고, 또 좋아하는 해금 소리가 잘 어우려져 있어 저는 좋아하는 버전입니다. 

 

 

 

 

 

 

 

 

 

 

음, 그나저나 너무 길게 써서 어찌 마무리해야할지 어색어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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