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패니메이션, 그 영광의 시절을 문 닫고 나온 수작. 바람의 검심 <추억편> 이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는 소식 입니다.
2020년 (이렇게 쓰면 무지 먼 훗날 같아 보이지만 무려 내년;;) 여름에 개봉한다니 지금 한창 촬영 중이려나요?
납득하기 힘든 일본 영화판의 애니 실사화 수준에 정신이 아득해질 법 하지만,
니들이 웬 일이냐는 반응을 이끌어 냈던 실사화 1편의 주연배우와 감독이 작업 중이라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냥 기대보다는 우려의 시선으로 이 실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OVA로 제작 된 <추억편>이 막 공개가 되었을 때, 코믹 액션 활극이었던 TV판이 익숙한 팬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
그림체부터 일본 만화풍을 과감히 버린 감독이 시종일관 영화를 <히트>의 총격씬처럼 무채색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었고요.
꿈은 있으되 희망은 없었던 자객의 어두운 과거를 그리기 위해 액션 또한 최대한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게 연출 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이 작품은 그 이후로 재패니메이션을 수렁에 차 넣은 "모에"의 홍수 속에서
재패니메이션의 마지막 영광이라는 서글픈 영예를 안게 되었지요.

그러니, 다른 애니의 실사화와는 달리 실사화를 기대하는 팬들의 눈높이는 평균 그 이상을 상회.
어설프게 실사화 했다가는 잘 만들었다고 평가 됐던 1편의 명예까지 물귀신처럼 끌어 안고 침몰할 수 있어요.
감독은 스스로 시험대에 오른 셈입니다.

비슷한 예로는 덕후가 아니라도 한 번쯤은 들어 본 이름, 건담이 있습니다.
올드 건담 팬들 중에는 88년 작, 역습의 샤아와 함께 건담 시리즈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애초에 건담은 열도 빨갱이 토미노 감독이 아이들을 의식화 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괴소문도 가지고 있었는데요.
데모쟁이 집합소인 일본대 출신의 감독이 팬미팅 자리에서 심히 덕후스런 질문을 하는 팬에게
"그 딴 거 생각할 시간에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어라"라며 대놓고 디스를 하는 통에 괜히 소문이 증폭.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토미노 감독은 역습의 샤아의 마지막을 두 주연이 로보트에 탄 채
무려 아래로부터의 점진적 개혁과, 위로부터의 초합리적 혁명을 두고 설전을 벌이는 장면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다른 로봇물처럼 단순히 악과 선의 대결인줄 알았던 이 시리즈에서
나쁜 놈인줄 알았던 인간은 높은 혈통과 사회혁명의 신념을 겸비한 행동하는 지성이었고(샤아)
착한 놈은 구체제 옹호와 기득권 유지를 제1의 과업으로 삼는 수구에게 이용을 당하는 처지(아므로).

장난감이나 팔아먹고 애들이나 보라고 만들었던 작품이지만, 팬들은 자연히 60년대 전공투와, 메이지유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의식화교육을 위해 만들었다는 의심이 아니 날 수가 없었던 게지요.


하지만, 다수의 건담 팬들에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고, 올드 팬들이 역습의 샤아를 마지막 편으로 보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역습의 샤아까지 등장한 건담이라는 로봇은 망토를 두른 영웅의 조각상이 아닌, 탱크나 전투기와 같은 그저 하나의 병기.

다 큰 어른들이 감정을 이입하여 보기에 덜 겸연쩍었더란 말입니다.

그래도 만화는 만화. 결국 어쨌든 만화. 여러분도, 이렇게 만화 얘기를 수다스럽게 늘어놓는 제가 솔직히 좀 한심하지 않습니까? 전 제가 좀 창피해요. 어쨌든,

어른 건담팬들은 이에 스스로 자신들의 길티프레져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기 위해 온갖 짓들을 벌입니다.

있지도 않았던 설정들을 만들고, 건담의 역사를 머리 맞대어 지어 내고. 마른 오징어 비틀듯 당위성을 짜내어 자신들의 오덕오덕한 행위를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대환장.. 아니, 대오덕 시대의 시작이었지요.


이에 왕년의 데모쟁이 토미노 옹은 빡이 치시어, 이것들이 의식화 되어 일본사회 개혁의 초석이 되기는커녕 덕질이나 해?

자신의 팬 미팅 자리에 온 고객을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고,

건담 시리즈의 가장 큰 두 영웅이자, 주연인 샤아와 아므로에게 그리스 비극의 문법을 적용.

충격적이게도 역습의 샤아라는 작품의 말미에 아예 죽여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토미노 감독의 의도와 달리 캐릭터 자체에 과몰입했던 오타쿠들, 특히나 샤아의 팬들 중에는 급기야 샤아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다며 자살을 하는 이가 등장하고.

스폰서사가 장사를 이어나가기 위해 제작한 건담 시리즈는 말 그대로 만화영화.
고함을 지르면 전투력이 올라가는 심히 마징가스러운 연출을 납득할 수 없었던 올드 팬들은 봇짐을 싸 쓸쓸히 건담과 작별을 하며, 바로 그 작품, 기동전사 역습의 샤아를 건담의 마지막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마치 일부 MCU의 팬들이 열 작품 제쳐두고 <윈터 솔져>를 최고작으로 뽑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올드 팬들이 떠났다고 장사가 끝이 날까요?

아니요. 건담은 덕후를 낳았고, 땅에 발이 닿지 않게 된 작품에 납득할 수 없었던 올드 팬들이 떠난 자리에는 덕후들이 남아 애니판을 점령해버렸습니다.

그들이 딱히 악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것과 유사한 양상이 벌어져 스토리가 아닌, 캐릭터에 집착하는 기현상이 출현하기에 이릅니다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됐습니다.
일본애들은 도대체 왜 실사화를 그따위로 하고 있을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구로사와 아키라의 나라인데.
봉만대 감독이 출발이 에로여서 그랬지, 장편 잘만 만들지 않습니까?
걔들은 눈이 없을까요? 일본 영화 역사가 몇 년인데?

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한 것이라 새로울 건 없지만, 저 역시 일본 영화판의 수익원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일본 박스오피스를 보면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매우 큰 파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스타 감독의 작품을 제외하면 극장판 애니가 박스오피스 10위 권 안에서 항상 선전을 하고 있어요.
문제는 이 애니판을 90년대 이후로 오타쿠들이 점령을 해버렸고, 이 오타쿠들이 설정이라는 개념에 과하게 집착 한다는 겁니다.

이는 분명 있지도 않았던 건담 세계의 역사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창조해냈던 건덕후들의 유산.

자신이 애정을 쏟은 대상에 과몰입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뇌리에 한 번 각인 된 캐릭터와 이야기가 변화하는 것을 못 견뎌 합니다.
하물며 만화의 컷 바이 컷으로 조금만 다른 점이 발견이 되도 아우성을 치는 오타쿠들이니,
실사화를 했을 때 만화나 애니에서 보았던 컷, 설정, 심지어 인물이 차고 있는 액세서리 하나까지도 다름을 용납하지 못 한답니다.

재밌는 건 이 오타쿠들은 일반 관객들과 달리 작품이 나오면 반드시 지갑을 여는 존재들이라
제작사들은 좋은 작품 한다고 모험을 하고 시간과 돈을 쏟느니, 차라리 이 오타쿠들의 턱을 긁어주는 데 품을 들인다는 거예요.

한 명의 예술가이자 창작자인 감독에게 자신의 색을 넣어 각색을 하기 보다는, 원작을 그대로 재현할 것을 넘어, 오타쿠들의 민원을 철저히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배우들에게 말도 안 되는 가발을 씌우고, 영화와는 엄연히 다른 만화의 문법을 그대로 필름에 이식하게 하고.

이렇게 되면 관객들이 영화 꼬라지가 저게 뭐냐며 등을 돌려야 자본주의라는 거름망을 통해 정화가 되는데, 

이러한 실사화 된 작품의 절대 다수 관객이 오타쿠들이고, 지갑을 여는 오타쿠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관철이 되었으니 작품을 박스 오피스 10위 권으로 밀어 올린다는 겁니다. 

마치 AKB48 씨디를 사서 투표권을 쟁취하듯.

상황이 이러니 자연스레 극영화에 돌아갈 투자는 줄어듭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이미 있는데, 뭐 하러 금광을 캐겠습니까?

그렇다고 마냥 비웃을 일만은 아니에요.
마치, 우리가 90년대 말에 정말 되도 않는 조폭 코미디를 양산했던 거와 비슷한 거지요.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한 때 소주방이 유행이었다가 실내포차가 유행이라니 미련 없이 소주방 버리듯 조폭 코미디를 버렸지만,
그들은 100년 된 우동가게 이어가듯 쭉 가고 있다는 거.


하여, <추억편> 감독은 원작을 성경처럼 떠받드는 오타쿠들과, 일본 실사화 영화를 가볍게 비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타국, 그리고 미래의 일본 관객들의 기대감.

이 양자를 어떻게 잘 충족시킬 수 있을지 큰 과제를 스스로 떠안은 겁니다.

그야말로 잘 해야 본전.

흔히들 얘기를 하지요.
<올드 보이> 는 일본에선 만들어질 수 없었던 작품이라고.
봉준호 감독은 제작사랑 의견 안 맞아서 <컨택트> 감독 제의를 미련 없이 거절하고.
이 쪽으론 어쨌든 여러모로 우리식의 곤조가 도움이 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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