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중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지난 번 모임에서의 책은 노벨상 수상기념으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이 채택되었는데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감상이 '솔직히 좀 지루하다'였거든요. 그때 한 분이 그러시더군요.


"상을 받는 책들은 왜 다 재미가 없을까요."


개인적으론 이 <남아있는 나날>을 꽤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이전의 몇몇 수상작들이나 고전들을 떠올려 보건대 기본적으로 저 말에 꽤 동의가 되었습니다.

일단 저만 해도 이런 독서모임이 아니면 어려운 책 잘 안 읽거든요.

(그게 제가 독서모임에 가능하면 나오려는 이유이기도 하고...)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책은 대체 왜 재미가 없을까. 시대가 달라져서인가. 내가 어려운 걸 싫어하나. (아니 이건 맞는데!)

그러다가 책을 다 못 읽으신 분이 있어서 <남아있는 나날>의 재미있었던 점(?)을 잠깐 이야기했는데

다른 분들이 어, 그걸 그렇게 들으니 재미있네요. 라고 하시는 걸 보고 문득 ???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지점에 

(앞서 했던 질문과 관련된) 꽤 중요한 포인트가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기서 잠깐 <남아있는 나날> 이야기))


* 줄거리 : 원래 영국 귀족의 집사였지만 주인이 죽고 미국인 갑부에게 (집이) 팔리자 갑자기 달라진 예산과 일의 규모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휴가를 받아 처음 여행을 떠난 주인공이 과거 집사로서 얼마나 충직하게 헌신했는지를 회고하며 함께 일했던 첫사랑 - 이었지만 본인은 끝까지 인지못하는 - 을 다시 데려오려다 본인의 기대와는 달리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걸 깨달은 후 현타 맞고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믿거나말거나 / 그런데 출판사에서 제공한 줄거리와 달리 제 눈엔 이렇게 보였음.)



<남아있는 나날>은 기본적으로 좀 건조한 문체입니다. 

(처음에는 이게 번역의 문제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냥 캐릭터가 원래 그런 듯합니다.)

화자인 집사가 무미건조한 삶에 익숙한 인물이기도 해서 그게 어울리기도 하고요.

다만 이 화자가 말하는 대로 그대로 끌려들어가다 보면 독자도 상황을 무미건조하게 읽게 되는?

좀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서술하고는 있지만 주변상황을 다 읽어내지 못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책은 사실 텍스트만 놓고 보면 꽤 흥미로운 내용이에요. 개그가 될 법한 요소도 많고요.

전 일단 이걸 집사물로 읽었는데요...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집사?)

알고 보면 매우 웃기고 귀여운 모습이 산재해 있습니다.


가령 세기말(?) 집사로서 가져야 하는 도리라든가 (매우 장황함)

사람이 주인님에게 너무 비판적이면 충성심이 떨어져서 제대로 된 집사가 될 수 없다든가 

(그러니 적당한 주인을 만나게 된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 그러나 그 주인은 알고 보니 본의아니게 나치에 협력했다 명성 다 말아먹고 고소크리 터뜨리다 홧병에 죽음)

집사는 손님이 2명 올 때가 가장 까다롭다든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게 서포트해야 하기 때문에)

집사들끼리 은근히 매겨지는 서열이나 (뭔가 노예들끼리 자기 사슬의 원조와 역사와 금 함량분을 두고 경쟁하는 느낌)

열심히 닦아 둔 은식기를 손님이 알아보고 칭찬한 덕분에 주인님과의 대화가 스무스해져서 

결과적으로 세계평화에 기여했다고 자화자찬하는 등 (우리 주인님은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는 큰손이라능!)

집사라고만 안 했을 뿐 사실만 말하긴 했는데 결과적으로 남들이 엄청난 권력자로 오해하는 장면이라든가...


교양 있는 말투를 익히기 위해 로맨스 소설(아마도 제인 오스틴?)을 열심히 읽다가 여주(?)인 켄턴 양에게 들키질 않나,

주인공은 끝까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요. 왜냐. 나는 어디까지나 집사로서의 삶에 충실해야 하기 때무네...

당신은 지금 사랑에 빠진 거야! 라는 걸 주변인도 알고 켄턴 양도 알고 독자도 아는데 주인공인 너님만 모르는 환장(?)하는 상황...

자기들끼리 열심히 썸을 주고받고 심지어 켄턴 양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혼자만 눈치 못채고 딴소리하며

엉뚱한 데다 신경질내고 있는 이 둔탱이 남주(???)를 대체 어쩌면 좋습니까...


짠한 부분도 많지요.


나이가 들어 제대로 서포트하지 못하게 된 집사인 아버지가 

밤새 실수했던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아들인 주인공이 멀리서 내려다본다거나,

세계평화라는 큰일(!)을 위해 아버지의 임종보다 집사로서의 직분에 더 충실했는데

정작 그 주인님은 본의 아니게 히틀러에게 봉사해 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든가...


심지어 한 미국인은 그런 (세계평화를 위한) 비공식 모임에서 너네들 다 탁상공론임 하고 비웃기도 하고

또 다른 미국인 부부는 저택과 주인공 집사를 둘러본 뒤 '잘 만들어진 가짜' 같다는 말도 하지요.

게다가 주인공은 집사로서의 정체성에 매달리느라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것조차 끝까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요.

(본인만 자각 못하고 주변만 다 아는 그 부분이 또 독자 입장에서는 매우 환장스러운 아이러니...)



그런데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읽다가 지루해서 나가떨어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음... 솔직히 전 이 책이 애초에 좀 더 장르소설스럽게 나와서

1인칭 착각물 방식으로 쓰여진 세기말 집사물(...)이었다면 대중적으로 꽤 반응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좀 더 능청스러운 문체였어도 재미있었을 거예요. 그 편이 독자가 호기심을 갖고 따라가기 쉬우니까.

하지만 이 소설은 영화로 비유하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연출이 너무 잔잔하기만 해서

보다가 조는 관객이 속출하는 예술영화 같았습니다. (하지만 연출만 좀 바꾸면 대박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영화도 있는 걸로 아는데, 아마 예전에 제가 앞부분 좀 보다가 지루해서 껐던 기억이 나네요ㅠㅠ)


하지만 이 소설은 재미없고 밋밋한 스타일이 또 정체성이기도 하죠.

저런 성격인데 문체가 발랄하다면 그것도 좀 가벼워 보이긴 할 겁니다.

(아마 이 부분에서 일반소설과 대중소설이 갈리는 것 같단 생각이...)

그런 잔잔한 무거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저처럼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아마 그런 거겠죠.


일반소설은 읽을 때 좀 더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독자는 여러가지 자극에 익숙해서 지루한 과정을 다 감내할 수 있을 만큼

인내심이 강하지 않아요. 게다가 무엇보다 피곤합니다. 그냥 일상이 피곤하거든요.

어려운 책에 몰두하고 있을 에너지가 별로 없습니다.

적은 에너지로도 더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매체들이 얼마든지 널려 있으니까요...


따라서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건 매우 당연해 보입니다.

(동시에 웹툰이나 장르소설 시장이 커지는 것도 당연해 보임... 

단 SF는 별개. 이쪽은 기본적으로 진입장벽이 있어요.)


장르소설을 읽을 때 힘이 덜 드는 이유는,

애초에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단순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묘사보다는 사건 중심이고

문체 자체도 좀 더 전달 쪽에 신경쓰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수단이란 느낌이 강해서인 것 같습니다.


반면 일반소설은 문장 자체에서 전해지는 정보가 또 있어요. 

그래서 내용과 문장에서 분산된 정보를 자체적으로 취합해서 분위기와 맥락까지 곱씹어 읽어야 합니다. 

사전지식이 필요한 경우도 많고요. (<남아있는 나날>도 1차대전에 대해 좀 알고 봐야 모임에서 오가는 대화가 이해됨.)


그리고 그런 정보취합 능력은 기본적으로 많은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하고요... (독서량)

그래서 <남아있는 나날>은 확실히 문자 취향의 독자...에게 어울리는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평론가들은 나이가 어느 정도 있고 당연히 문자 세대이고...)

게다가 저기서 말하는 아스라한 슬픔이나 늙음에 대한 고찰 같은 것은

나잇대가 어느 정도 있지 않으면 쉽게 공감하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리면 공감보단 지루할 듯)


누군가에게는 예술로 보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냥 지루한 관념으로 보이는?

(누구에게는 등산이 매우 즐겁고 상쾌한 운동이지만 누구에게는 어차피 내려올 거 왜 올라가나 싶은 것처럼)

가끔 일반소설 읽다 보면 나한텐 정말 의미 없는 부장님 개그 같은데 

본인은 저게 되게 통찰력 있고 예술적이라고 생각해서 쓴 건가 싶을 때도 있고요...;;;


사실 고전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거든요.

인간의 본성을 짚어내는 통찰력은 수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감탄할 만하지만 

한편으론 저 내용들이 지금 편집자 손에 걸렸으면 반 이상 편집되거나 싸그리 동강났겠다 싶은?

뭔가 있으니까 고전이겠지 싶어서 열심히 주석까지 찾아 읽고 난 담에 드는 생각이

아, 내가 이 시간에 이거 보려고 이렇게 열심히 읽었나...하는 자괴감일 때도 사실 없지 않아서요.

(내용의 엑기스만 보려면 요즘은 잘 된 편집영상도 많으니까.)


물론 원본을 보는 것과 엑기스만 흡입하는 것은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내가 논문 쓸 것도 아닌데 이걸 알기 위해 이 시간과 이 정성을 들이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는 게 문제인 겁니다. 전 바쁜 현대인이니까요. 더 재밌는 것도 볼 것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데 굳이 이 길고 지루한 내용을 상을 받은 작품이란 이유만으로

분명 뭔가 있겠지 기대하며 에너지를 소모해가며 읽어내야 하는가...라면 역시 고민이 될 밖에요.

(<남아있는 나날>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고...;;)


그런데 또 그런 작품에서만 읽을 수 있는 어떤 통찰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해서...


하지만 한편으론 너무 낡았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좋은 엑기스의 포장이 너무 낡았는데,

- 그 낡은 것 자체가 좋은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 한편으론 저 엑기스를 좀 다르게 포장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면 안 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전 <드래곤라자>를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ㅠㅠ// 영도님 복귀 환영!!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이것도 요즘 나왔다면 과연 그렇게 화제가 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임...)



장황하게 떠들었는데...

그래서 제목에 대한 (자체적인) 결론은 


1) 상을 받는 책들은 기본적으로 문자 세대.

2) 나이가 들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있음.

3) 내용을 파악하려면 배경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많고 독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함.

4) 그런데 독자들은 삶이 너무 피곤하고 주변에는 더 쉬운 통로가 많음...

(+5) 상 받은 일반소설이라고 그 안에 꼭 뭐가 있는 건 아니더라... 

그냥 나랑 안 맞는 걸수도 있고, 혹은 나한테 안 중요한 걸수도 있고.)



이건 좀 딴소리이기도 한데 제가 일반소설에서 기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통찰력인데

(장르소설에 기대하는 건 재미(+통찰력도 있으면 좋고)

최근 읽어본 것들은 통찰력 자체도 얄팍한데 재미까지 없는 게 많은 것 같아 좀 슬픕니다...

오히려 장르소설 읽다가 건지는 게 더 많은 느낌이에요.


수상작들은 너무 무거워서 쉽게 손이 안 가는 것도 있는 것 같고요.

사는 게 힘드니까 더 힘들어지고 싶지 않은? 그런 방어적인 심리인 듯한데, 

어찌 보면 이건 좀 슬프군요...


덧붙이면 정유정 작가의 약진은 아마 이런 세태에 힘입은 것 같고...

하지만 김애란 작가 책의 판매량을 보고 있노라면 

'진짜'는 어떻게든 결국 통한다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편으론 책을 산 사람들이 과연 내용을 끝까지 다 읽었을까 싶기도...)

(- 이건 저도 사놓고 고사지내는 책이 하도 많다 보니 드는 생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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