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압도적입니다.

2017.12.28 18:13

일희일비 조회 수:2197

1. 예고편을 봤을 땐 왠지 뻔한 연출일 것 같았습니다만... (저는 그 예고편만 보고도 펑펑 울었지만요.) 놀라울 정도로 감정 분출이 매우 절제된 영화였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결국 꺽꺽대며 울고 있었고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까지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천만은 가볍게 넘기겠고, 올 타임 명작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가끔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는데 제가 본 상영관의 문제인지 영화 자체의 문제인지 일부러 의도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김윤석 역할은 실제 인물이 평안도 사투리가 심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더 무서웠다고 하네요..) 내용 따라가는 데 문제는 없었습니다.

 

2. 김윤석은 정말 압도적입니다.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처음 봤을 때 가드 올리고 상대를 주시하고라는 대사 치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배우가 아니라 진짜 무능하고 폭력적인 변두리 동네 가부장을 데려다 실사로 찍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죠. 이번에도 배우가 아니라 그냥 박 처장이 되어버렸어요.. 무시무시합니다.

 

3. 문성근이 무려 장세동 역을 맡았습니다. 경찰 치안본부장 역할의 우현 배우는 알고 보니 이한열 열사 장례식을 진행했던 당사자더군요. 김윤석도 학번이 학번이니만큼 1987년에 거리에 많이 섰다고 하고요. 자신을 탄압했던 적들의 역할을 맡으면 배우로써 짜릿한 긴장감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대한 소름끼치게 연기하여 우아하고 예술적인 복수를 완성하는 거죠. 문성근은 젠더 감수성도 떨어지고 정치적으로 저랑 결이 같지는 않지만, 언제나 배우로서는 참 매력적입니다. 젊은 관객 중에는 그 나쁜 안기부장놈 누구야! 하는 사람이 있으려나요? 마지막에 나오는 문익환 목사님 아들이라는 걸 알고 놀라는 사람 분명히 있다에 한 표.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님이 즉흥적으로 했던 연설을 안 들어보신 분은 들어보시길... 전태일 열사여! 로 시작하여 이한열 열사여!로 끝나는 명연설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m7eYQVpFNo

 

4. 배우들 연기는 고르게 다 좋습니다. 잠깐씩 나오는 동아일보 부장 역할 배우만 좀 어색했어요. 하정우 나올 때마다 피식피식 웃었습니다. 그가 웃기는 연기를 잘해서라기보다는 아니 어쩜 저렇게 모든 영화에서 시종일관 뻔뻔한 상남자의 오버 연기를 하나 싶어서요. 이제 하정우 캐릭터는 고정된 상수고 캐스팅도 그에 맞춰진 건가 싶네요. 촐싹대는 촉새 캐릭터로 나오는 박철민 배우처럼요. 얼굴 표정으로 고통을 표현한 조우진도 잠깐이지만 강렬했어요. 배우를 못 알아보고 나중에 캐스팅 확인하고야 아, 조우진이었나 했네요.

 

5. 호모 사피엔스는 다 그렇겠지만, 한국인은 특히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나쁘게 말하면 남의 이야기 하기 좋아하고요. 1987은 이야깃거리가 정말 풍성한 영화입니다. 실화 기반의 영화여서 캐릭터들이 실제 인물이었던 데다가, 배우들까지 실제 87년 공간과 연결되어 있어서 세 층의 인물들이 넘나들면서 계속 화제가 될 여지가 있어요. 게다가 30년의 시간차를 두고 2017년의 광장과 연결된다니, 흥행 운이 좋은 셈입니다. 기획 단계에서는 정권 바뀌기 전이었는데.

 

6. 이 영화가 어떤 면에서 잘 만들여졌나 곰곰이 따져 봤어요. 87년을 직접 겪은 사람들,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들, 전혀 몰랐던 사람들 모두 끌어들일 수 있는 영화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두 번 세 번 봐도 디테일이 더 자세하게 보일 것이고요. 87년을 알던 사람도 의외의 영화적 장치에 놀라게 됩니다. (반전..이랄까요?) 87년을 모르던 사람도 연희의 시선을 따라가며 이입할 수 있고, 작년-올해 촛불집회와 연결지어 해석할 수 있고요.

 

7. 주연을 맡던 배우들이 단역으로 담담하게 나오는 모습이 영화 내용과 맞물려 의미심장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는 자기가 주연배우일 텐데, 민주주의의 작디작은 불쏘시개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귀한 생명을 던진 수많은 역사의 단역들과 겹쳐지네요. 꼭 민주주의라는 이념 때문이 아니라, 단지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 아니면 그저 외면할 수가 없어서 자신이 대신 스러져갔던 그 마음들. (그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 박종원.. 젠장)

 

8. 제가 접한 일본 영화는 잔잔한 감성 영화 아니면 잔잔한 코미디 영화뿐인 것 같네요. 일본에서도 이런 정치물이 있나요?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에서 천안문이라는 시대극 영화가 제 살아 생전 나올 수 있을까요? 중국, 일본, 북한, 대만과 비교했을 때, 남한은 해방 이후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 자꾸 들어섰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일본은 지배층이 주도해서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켰고 이후 그 세력이 쭉 자민련 장기집권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중국도 사회주의혁명에 성공한, 그리고 당시에는 민의를 얻었던 공산당 일당독재를 하고 있고요. 북한도 개판 삼대세습을 하고 있지만 아무튼 항일투쟁집단이 집권해서 정통성이 있는 정권이지요. 대만도 그 나라에서는 망명정부로서 정통성이 있고요. 그런데 한국만 괴뢰정권,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가 다시 잠깐 (최장 10)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가 이명박근혜 괴뢰도당이 다시 집권했습니다. 모든 정부는 타락하기 마련인데, 그나마 정통성이 없는 정부는 타도될 여지라도 있어서 오히려 나은 건가 하는 우울한 생각이 듭니다. 정통성을 갖고 출발한 정부는 타락하고 독재해도 정권교체가 어려워 한참 지속되는 것 같아요. 제가 죽기 전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천안문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 아래 내용은 긁어야 보입니다. 스포 아닌 스포가 있거든요.



강동원은 늑대의 유혹의 우산씬, 러브레터의 역광 커튼씬, 응답하라1994의 선우를 오마주한 것 같은 모습이네요. 내가 예고편에서 강동원을 놓쳤나 하고 영화 본 뒤에 다시 확인하니 역시 빠져 있었고 포스터에도 없고 네이버 등장인물소개에도 없네요. 물론 제작기나 배우 인터뷰를 아주 꼼꼼히 읽은 사람이라면 알고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그의 역할을 모르고 볼 거라 생각합니다. 이 역시 효과적인 연출이었다 생각합니다. 마지막엔 누구나 연희와 같은 마음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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