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행운

2018.11.21 19:11

은밀한 생 조회 수:1298

순수한 호의를 받은 기억들이 있어요.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오래전 일들이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늘 따뜻해져요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상대에게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반사적인 행동으로 선의를 베푸는 것. 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보내는 행운과 기적.

가장 첫 번째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전 그때 친한 언니의 지도를 받으며 공설 운동장에서 자전거 연습을 하고 있었죠. 전 태어날 때부터 피곤했고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는 두려움이 많은 주제인지라 자전거 역시 어버버하면서 가르쳐주던 언니의 인내심을 실험할 뿐이었죠. 침착하고 맘씨 좋았던 언니가 제 주제를 충분히 배려하며 “은밀아 괜찮아, 언니 믿고 가봐, 괜찮아 내가 뒤에서 잡고 있어, 응응 그래 정말 잡고 있어” 하기를 수십 차례.... 오 드디어 자전거를 혼자 타고 있는 저를 만나게 된 거예요. 나란 인간도 자전거를 탈 수 있구나 들뜬 마음에 분위기에 취한 나머지 공설운동장 입구까지 내달렸죠. 그런데 그 공설운동장 입구는 도로변으로 바로 연결된 길이었거든요. 뭔가를 어렵게 성취한 비루한 겁쟁이가 대개 그렇듯 겁은 여전히 많고 의욕은 넘쳐서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사실에 취한 나머지 앞에서 자동차가 오는 걸 보면서도 멈출 줄 모르고 전 계속 달렸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멈추는 방법을 몰랐어요. 손잡이만 꾹 잡으면 자전거는 멈추는 건데, 세상에. 그게 떠오르질 않았던 거예요. 바보죠. 앞에서 달려오던 자동차 운전자는 분명 자전거 타는 초등학생이 옆으로 빠질 거라 생각했는지 그 자동차도 그냥 오던 대로 계속 달려오더라고요. 저와 거리가 너무 가까워진 때쯤에야 비로소 자전거 탄 초등학생이 뭔가 이상하다 눈치를 챘는지 급브레이크를 밟았는데. 그와 동시에 뒤따라온 언니가 “은밀아 손잡이!! 손잡이를 잡아 손잡이 잡아!!!! 악 !!!!!“ 소리가 들리길래 손잡이를 꾹 잡으며 저의 자전거 앞바퀴가 차 보닛에 맞닿은 상태로 멈춰 섰죠. 그때 차에서 내린 운전자 아저씨가 엄청 놀란 얼굴로 ”학생 괜찮아?“ 라고 묻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왜 자전거를 타고 돌진하냐고 나무라는 게 아니라 학생 괜찮냐며 진심으로 걱정 어린 그 음성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 아저씨 덕분에 살았고 그 위로의 한마디에 트라우마가 될뻔한 위험한 사고의 순간이 오히려 따뜻한 느낌으로 두껍게 덧칠됐어요.

두 번째 기억은 대학 2학년 때였어요. 당시 지하철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위치의 아파트에 살던 결혼한 큰언니네 집에서 제가 놀다가 다음 약속 시간이 촉박하길래 아파트 바로 앞에 정차돼있던 택시를 타고 지하철역을 갔거든요. “기사님 듀게역이요” 말하고서 눈을 감고 이어폰 끼고 음악 듣다가 듀게역에 다 도착했지 싶은 순간에 눈을 떠서 “얼마예요?” 하면서 미터기를 봤는데 음. 미터기가 없는 거예요... 그 차에. 순간 운전하던 아저씨가 “아가씨 다음엔 그렇게 아무 차나 집어타면 안 돼요.. 조심해야 돼요” 라고 조용히 웃으며 얘기를 하더라고요. 네 전 택시인 줄 알고 그냥 <아무 자동차>를 집어탄 겁니다. (에라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루한 인간아) 감사하다 연신 인사를 드리면서 내리던 저를 향해 아저씨가 싱긋 웃어주셨죠. 그런데 아직도 그 아저씨의 따뜻한 미소가 잊히질 않아요. 아무 자동차나 집어탄 저를 그대로 역까지 태워주면서, 음악 듣고 있던 저를 방해하지도 않고. 모종의 흑심을 내비치며 그걸 계기로 연락처를 달라거나 하는 그런 의도도 없었던 그 순수하고 선의의 배려가 잊히질 않아요.

세 번째 기억은 대학을 졸업하고 맹렬하게 연애하던 시절의 일이에요. 그 친구와는 좋을 땐 너무 좋고 싸울 땐 세상 둘도 없는 원수를 대하듯 싸우던 그런 연애를 했었는데요. 애증이란 단어의 뜻이 뭔지를 실감하게 해준 대상이었죠. 7월인가 그랬을 거예요. 즐겁던 토요일 저녁의 데이트가 토요일 한밤의 다툼으로 변질되던 그날 밤. 서교동 어느 주택가 골목에서 심각하게 싸우다가 헤어지자고 엉엉 우는 제 앞에서 당시 애인이 “이럴 거면 우리가 서로 놔주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래 네 뜻대로 내가 네 눈앞에서 없어질게”(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 말하고 자리를 뜬 후에.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싶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끼던 제 등 뒤에서 어떤 조용하고 침착한 음성이 들렸어요. “저기.. 괜찮으세요?” 제가 아무 대답 없이 주저앉아 계속 우니까 그 신사분이 다시 한번 “저기... 배가 아프세요? 119 불러드려요?” 라고 말하면서 제 옆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거든요. 울다 보니 몸은 피곤하지, 마음은 슬프지... 낯선 사람의 그 한마디가 너무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 순간 자리를 떠났던 애인이 되돌아와서 격앙된 목소리로 “당신 뭐야“ 하니까 그 신사분이 ”여자 울리지 마요. 죄 받아요.“ 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요. 근처에 사는 주민이었나 봐요. 음 그런데 이 얘기를 제 지인들에게 하면 당시에 그 신사분이 신사가 아니라 뭔가 안 좋은 짓을 하려던 사람일 수도 있다고 킬킬대기도 하는데요. 저는 확신할 수 있거든요. 그때 그 신사분 목소리는 정말 주저앉아 우는 한 사람을 걱정하고 도와주려는 목소리였어요. 그리고 그 기억은 아직도 제 마음을 흐뭇하게 한답니다.

네 번째 기억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요. 몇 년 전에 제가 허리가 갑자기 새우등처럼 굽은 적이 있어요. 아무 원인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더라고요. 일하던 직장에서 조퇴를 하고 병원으로 가려고 나왔는데, 세상에. 등이 굽어서 펴지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택시도 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허리를 펴야 택시가 오는지 안 오는지 보고 손을 흔들어서 잡잖아요? (바보같이 허리 아파서 우느라 콜택시 부를 생각도 못 하고) 그래서 길바닥에 등이 굽은 상태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한 손은 허리에 대고 한 손은 가방을 움켜쥐고 있는데 (네 그 꼬부랑 할머니 자세 맞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젊은이가 친히 이어폰을 빼고... 보통 이어폰 끼고 음악 들으며 길을 걸어갈 때는 누가 붙들고 길 물어봐도 이어폰 빼고 대꾸 안하기 마련인데. 그이는 친히 그 이어폰을 빼고서 “괜찮으세요? 도와드릴까요” 하는 거예요... 순간 눈물이 나더라고요. 너무 고마워서요. 그래서 그 청년이 잡아준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해서 내렸는데 맙소사. 병원까지 걸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허리를 못 펴고 그냥 그대로 구부리고 한 걸음씩 움직여보려고 하는데도 뜻대로 안되는 거예요. 그때 아주머니 세분이 저의 팔을 붙들면서 “에고 괜찮으세요?” “부축해드려요?” 세분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며 저를 병원 안까지 데려다주셨어요. 그때만 떠올리면 뭐랄까. 아 나도 착하게 살아야지부터 아 나도 꼭 도움이 되는 인간이 돼야지, 아 세상은 정말 살만한 거다 기타 등등. 그런 동화 같은 마음이 돼요.

그 외에도 엘리베이터에서 문을 잡고 기다려주던 분들, 편의점에서 양손에 짐을 든 저 대신에 문을 열어주던 분들.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하던 버스에서의 아주머니, 지하철 안에서 제 바로 앞에서 취객 주먹다짐이 일어나자 제가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게 자신의 몸으로 막고 길을 터준 그분. 참 고맙습니다. 어제도 즐겨 가는 카페 여사장님이 귤을 주셔서 맛있게 잘 먹었지요.

여러분이 낯선 이에게 받은 행운의 기억도 나눠주세요. 본인이 베푼 선행도 적어주셔도 좋겠어요. 날은 축축하고 싸늘한데 따뜻한 차 한 잔을 감싸 쥐듯이 감사히 읽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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