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일기...(협상장)

2019.11.06 15:35

안유미 조회 수:616


 1.화학 쪽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과 이런저런 얘기를 해보니 거래란 건 취급하는 물건만 다른 거지 대부분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는구나 싶었어요. 화학 물질을 수입하고 중개하는 회사끼리 가격을 부를 때 미리 가진 정보를 가지고 엄청나게 후려친다는 얘기를 들으니 재밌었어요. 그들이 '미리 가진 정보'라고 여기고 있던 정보가 상대도 이미 알고 있다면 역으로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에게 말해 봤어요. 내가 생각하는 거래의 정수에 대해 말이죠.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부르는 가격은 높을수록 좋아. 왜냐면 맨 처음 부른 가격에서 값이 내려가면 내려갔지, 더이상 올라갈 순 없거든. 맨 처음 부른 가격에서 더이상 올리려고 들면 그 거래는 대개 파토나는 법이야.'라고 말하자 그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높은 가격'은 정말로 높을수록 좋다는 거죠. 스스로도 황당하다고 여겨질 만큼 높게 불러야 해요. 하지만 이 점이 문제인거죠. 아무리 황당한 가격이어도 1% 정도는 납득할 수 있는 가격이어야 하거든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서라도 1% 정도는 상대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수준의 가격이어야 하는 거죠. 그러지 못할 정도로 높은 가격을 부르는 건 상대를 황당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분개하게 만드니까요.


 

 2.이건 그냥 해보는 소린데, 거래란 건 뭘까요. 거래란 건 협상이 되기도 하지만 다루는 물건의 대체불가능성에 의해 갑을관계가 되기도 하죠.


 문제는 이거예요. 나는 협상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경험이 별로 없어서요. 그리고 인간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이런 내가 인간을 대면해서 인간을 상대하려고 하면 협상을 잘하는 놈에게 말려들게 되죠. 기본적으로, 나와 협상하려는 놈들은 협상을 잘하는 놈들이니까요.



 3.하지만 결국 내가 이기는 이유는 이거예요. 나는 나와 협상하려고 '찾아오는' 놈들하고만 협상을 한단 말이죠. 사실 거래를 하기 위해 나를 먼저 찾아온 시점에서, 상대가 협상을 존나게 잘하는 놈이든 말든 전혀 상관이 없거든요. 상대가 나를 먼저 찾아왔다는 그 사실이 발생한 순간, 난 이미 이겨 있는 거죠.



 4.휴.



 5.이런 종류의 거래나 협상에서의 문제는 이거예요. 내가 이미 이기고 시작하는 거래에서 얼마만큼 배짱을 부릴 것인가...얼마만큼 배짱을 부려도 되는가...상대가 어디까지 배짱을 용인해 주느냐죠. 이기고 지고의 문제는 이미 떠났고, 상대가 얼마나 져주려고 마음먹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왜냐면 상대가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가버릴 정도로 배짱을 튕기면 그곳엔 나밖에 안 남게 되거든요. 상대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는 점에서 내가 갑이긴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협상 테이블을 떠나 버리면 그때는 갑도 을도 없는 거니까요. 내가 갑질을 계속 하려면 을이 도망가지는 않도록 만들어야 해요.


 물론 여기까지 읽었으면 눈치를 챘겠지만 부동산 얘기예요. 누군가가 내가 가진 땅을 사려고 '찾아왔을' 때 얼마를 불러야 할까요? 그야 많이 부를수록 좋죠. 상대가 황당해할 정도로 많이 불러도 좋아요. 



 6.왜냐면 그렇거든요. 위에도 쓰긴 했지만 아무리 내가 갑이더라도 일단 맨 처음 부른 가격이 최고 가격이 되어버려요. 협상이 진행되면 그 가격에서 가격이 내려가면 내려갔지, 더 올려 부를 수는 없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나중에 후회할 거리를 만들지 않으려면, 상대가 '얼마쯤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볼 때...맨 처음 가격을 부를 때 가능한 높게 불러야 하죠. 이러면 누군가는 이럴지도 모르죠.


 '그럼 그냥 닥치고 높은 가격을 부르면 되는거잖아? 평당 7억원이라던가.'


 ...라고요. 하지만 그건 아니예요. 상대를 황당하게 만드는 가격은 얼마든지 불러도 되지만 상대가 화나게 만들면 안되거든요. 부동산이란 건 사주는 사람이 있어야 가치가 있는 거니까요. 아무리 갑이더라도 돈을 들고 땅을 사러 온 사람을 화나게 만들면 안돼요.


 그러니까 땅을 팔 때는 배짱을 어디까지 부리느냐와 어디서 멈추느냐가 중요해요. 배짱을 너무 덜 부리고 적당한 가격에 팔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고, 배짱을 너무 부려버리면 상대가 떠나 버리니까요. '상대가 져주기로 마음먹은 최후의 마지노선'을 잘 짐작해야하죠.



 7.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협상의 가액이란 건 사실 협상장에 들어서기 전, 매우 오래 전부터 메이드되고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해요.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가격을 관철할 수 있고 공급이 충분한 물건만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가 생각하는 가격에 밀려버리니까요. 


 그리고 부동산이든, 노동력이든, 화학물질이든간에 '좋은 것'은 협상장에 들어서기 수십년 전부터 마련되고 있던 것들이고요. 연봉 협상을 하는 사람이든 물건 가격을 협상하는 사람이든 협상장에 들어서면 결국 문제는 이거거든요. 내가 가진 물건이나 기술이 얼마나 공급되고 있느냐죠. 아무리 말빨이 좋아봤자 공급량이 많은 물건 또는 기술에 금칠을 할 수는 없거든요. 


 결국 무슨 소리냐면...열심히 살아야 한단 거예요. 열라 꼰대 소리 같겠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아직 어린 사람이 있다면 진짜 열심히 살아야 해요. '협상장'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빼도박도 못하게 된 상황이거든요. 상대가 생각하는 가격에 좌우되어버린 상황이라면요. 그러니까 협상장에 들어서기 전에 미친듯이 노력해서 가치를 올려놔야 해요. 



 8.뭐 이런 꼰대 소리를 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나 자신의 가치에는 이미 마침표가 찍혀버렸거든요. 


 어렸을 때 우습게 본 기성 세대들이 왜 그렇게 아파트 값, 그린벨트 땅값에 목을 맸었는지 조금 이해가 돼요. 그들의 가치에는 이미 엄정한 마침표가 찍혀버렸으니까요. 그들에게 남은 가능성이라곤, 그들이 그나마 가진 것들의 가치가 오르는 거거든요. 자기 자신은 떡상할 수 없지만, 자신이 가진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건 떡상이 가능하니까 그것에 미칠듯이 목매고 이익을 지키려는 거죠. 시위나 폭동을 일으켜서라도요.


 어른들은 존나 불쌍하다 이거예요. 자기 자신의 가치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의 가치로 평가받는 시기가 그들에게 와버렸다는 점에서요. 그들은 더이상 바이올리니스트나 우주비행사가 되는 꿈을 꿀수가 없거든요. 슬프게도, 그들에게 그나마 허용된 꿈이라곤 부동산이나 주식이 오르는 것뿐이죠. 



 9.원래 하려던 얘기에서 어긋나더니 이상한 데까지 와버렸네요. 


 원래는 오늘 저녁 번개를 해보려고 글올린건데 오늘은 도저히 무리겠네요. 내일 디큐브피스트에서 점심먹을건데 같이 먹을 분 있나요? 점심뷔페 ㄱㄱ할 분은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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