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안내자2)

2017.06.04 06:01

여은성 조회 수:835


 1.마이너스의 인간들을 만나는 얘기를 하다 말았죠. '마이너스의 인간이란 게 뭐지?'라고 한다면 나만의 용어이긴 해요. 이 용어를 만들기 전엔 '마이너스의 인간'대신 '좀비'라는 표현을 썼었죠. 알기 쉽게 예를 든다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나온 개념인 '빛의 세계'의 반대인 '어둠의 세계'의 인간들이예요.


 다만 헤세의 묘사는 약간 틀렸어요. 헤세는 어둠의 세계가 질서가 없는 혼돈, 절망감의 세계라고 썼지만 오히려 규칙과 질서는 어둠의 세계가 더 강하게 강요되고 있어요. 뭐...나는 2017년에 살고 있으니 그 동안 어둠의 세계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죠.


 하하, 그야 어둠의 세계라고 해봤자 뭐 엄청나게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는 건 아니예요. 내게 적당한 의외성을 체감시켜주는 정도의 사람들일 뿐이예요.


 

 2.저번에 썼듯이 어딘가에서 일하는 직원을 통해 마이너스의 인간들과 연결돼요. 여기까지는 뭐 쉬워요. 여기까지는 어렵게 진행되는 게 없으니까요. 여기서 어려워지는 부분은 안내자를 통해 실제로 마이너스의 인간들을 만나는 부분부터예요.


 왜냐면 모두가 알다시피 사실 나는 착한 사람이잖아요.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인거죠. 그리고 마이너스의 인간들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됐어요. 그들은 정말로 합리적이지 않다는 거요. 착하고 안 착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사회화 될 동안 이 녀석들은 대체 뭘 한 걸까? 냉동되어 있었던걸까?'라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 날것의 모습이죠.


 어쨌든 그들은...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내가 도저히 제어할 수 없을 야만성과 비합리성, 무계획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들을 제어할 유일한 방법은 일단 안내자를 통해 그들이 나에 대해 착각하도록 만드는 거죠. 선전과 선동으로 나의 본질을 미리미리 조작해두고, 실제로 마주했을 때는 약간의 연기력을 발휘함으로서요. 물론 몸에 맞지는 않는 연기예요. 


 그래도 뭐...여기까지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3.어렵지 않은 이유는 만나는 사람들이 마이너스 여자였거든요. 애초에 내가 남자를 만날 리가 없잖아요. 여자는 어쨌든...내가 실제로 이동하는 수고를 들여서 실제로 만나는 외모를 가진 여자라면, 그건 대결의 상대로 여겨질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잘 지내거나 아예 안 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어요. 여자만 만났다면 쓸 거리가 없었으니 이 일기가 쓰여지지 않았겠죠.


 하지만 어느날 마이너스의 남자를 만나게 됐어요. 피하고 싶었지만 그가 쓸모가 있는 남자라고 들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만나야만 하는 마이너스의 남자 인간...을 생각해보니 좀 걱정이 됐어요. 나는 그런 녀석들과 아무런 레버리지도 가지지 못하고 만나는 상황을 겪어본 적이 거의 없거든요.



 4.휴.



 5.이 일기를 죽 읽어온 사람은 이러겠죠. '잠깐, 지난번엔 틱톡이나 라인에 밀어넣는 마이너스의 남자들을 많이 안다고 했잖아?'라고요. 하지만 그들은 어딘가의 사장이나 실장이었어요. 아무리 따로 만나거나 술이 올라도 그들이 내게 건방지게 굴거나 나를 어떻게 해 보려는 시도를 할 일은 없어요. 나는 그들에게 자연인이 아니라 손님이니까요. 물론 그들이 그걸 깜빡하려는 것 같으면 우리의 관계를 상기시켜주는 정도의 어필은 하지만요. 


 그러니까 나는 마이너스의 남자를 맨땅으로 만나 본 적은 없는 거예요. 그러나 호기심 또한 들었어요. 내가 마이너스의 인간 남자를 만나서도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요. 정확히는 '잘 어울리는 척을 할 수 있을까'겠죠. 나는 친구를 만날 때랑 정말 친한 직원들을 만날 때를 빼고는 몽땅 다 연기니까요. 내가 모르는 나의 어떤 부분을 알게 될 것 같아서 기대가 됐어요.



 6.어쨌든 만나는 날이 왔어요. 마포구의 호프집에서 세 명을 만났어요. 한 명(이하 mw)은 남자(이하mn)를 소개시켜 준 사람이었고 한 명은 mn이었죠. mn이 유도를 했다는 말을 미리 들었는데...유도와는 관계없이 타고난 체격이 그냥 컸어요. 이 체격이라면 유도의 기술을 발휘하든, 그렇지 않든 꽤나 강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는 '뭐야, 초딩인가? 30년도 넘게 먹어서 왜 사람을 보자마자 싸움 생각을 하는 거지?'라고 하겠죠. 하지만 그때까지의 경험으로 보아...이 종류의 남자들은 문명 세계에 발을 반쯤만 걸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술이 들어가거나 역린을 건드려지거나 하면 그나마 걸치고 있는 한쪽 발도 망설임없이 빼버리는 걸 종종 봐 왔고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나는 지금 이 녀석에게 어떻게 여겨지고 있는 중인 걸까?'라는 점이요. mn은 겉옷을 벗고 뭐...말씀을 많이 들었다는 말을 했어요. mn의 팔뚝과 목 위로 '삐져나온 듯한' 문신이 좀 신경쓰였지만 애써 덤덤한 척 했어요. 


 왜냐면 여기서 '와? 문신이 많네요?'라고 하면 그건 문신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처음 봤다고 인증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래서 '어떤 말씀?'이라고 물어봤어요. '어떤 말씀?'이라고 말을 좀 줄여서 물어볼 때까지도 mn에게 존대말을 쓸지 반말을 쓸지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어요. mn은 '좀 대단하신 분이라면서요.'라고 대답했어요. 이렇게 나와 주는데 존대말을 써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착각할 사람들을 위해 말하자면 나는 별로 대단하지 않아요. 하지만 마이너스의 인간들은 그렇거든요. 술 한번만 마셔도 '평생 친구'가 됐다고 카스에 올리고 돈을 조금만 써도 큰손이라고 불러 줘요. 그러니까 마이너스의 인간들의 표현은 꽤나 나눗셈을 적용해서 들을 필요가 있죠. 하긴 이런 건 일반 회사원들도 그렇긴 하네요. 사람에 따라선. 



 7.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고 mn과 mw는 뭔가를 속닥거렸어요. mw는 '새로 한 거 보여줘'라고 말했고 mn은 티셔츠를 올려서 뭔가...위협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한 듯한 문신을 보여 줬어요. mn의 몸에는 문신이 아주 많았는데-


 '저 문신들 중 단 하나만 있어도 일반 직장에 취직하는 건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mw가 느닷없이 mn의 벗은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는데 매우 거북했어요. 왜냐면 주위에 사람들이 있어서요. 멀찍이 앉은 빛의 세계의 커플 둘이 이쪽을 유심히 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나는 이 순간 결정했어요. 반말을 쓰기로요.


 '모텔 잡아 줄까?'


 라고 멘트를 던지고...이 멘트가 갈등을 유발할 만한 멘트일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mw는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꺅꺅거렸어요. 그 익룡 같은 소리는 점원과 다른 고객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어요. 휴...


 그리고 위에 쓴 세명째가 이때쯤 왔어요. m1이라고 해 두죠. 닉네임 짓기도 귀찮군요. M1이 와서 남2 여2, 성비가 맞춰졌어요. 뭐 성비를 맞추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지만요.

 


 8.인간 수컷들은 그래요. 여자들과 함께 있으면 같은 자리에 있는 다른 남자를 공격해서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시도를 하죠. 아마 그러면 자신이 알파가 된다고 여기나 봐요. 이건 뭐...플러스들을 만나는 자리든 마이너스를 만나는 자리든 거의 그래요. 그리고 그들이 취하기 시작했고 슬슬 느껴졌어요. mn이 '그것'을 시도할 순간이 이제 오고 있다는 걸요.


 mn이 뭔가...성적인 농담을 하고 뭐 그러다가 나의 과거를 묻고 하는 걸 반복했어요. mn은 내가 학창 시절에 어떤 계급이었는지...브라만이었는지, 크샤트리아였는지, 아니면 그 이하였는지 알아내기 위해 계속 끈질긴 질문을 했어요. 어이가 없었어요.


 '이 녀석에겐 10년도 더 된 옛날 일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이때쯤 mw와 m1이 나를 유심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어요. 사실 이 세 녀석은 친하거든요. 나는 안내자에게 이 세 녀석을 소개받은 사람일 뿐이고요. 그리고 마이너스의 인간들은 그래요. 자신이 타넘을 수 있는 인간이라고 여겨지면 어떻게든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려는 시도를 멈추지를 않죠. 이 세 녀석이 지금 나를 품평하려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들이 사람을 품평하는 목적은 한가지예요. 서열 정하기죠. mn이 뭔가 느물거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어요.


 '그런데 문신이 하나도 없으신가봐?'


 '문신이 하나도 없으신가봐?'라는 말은 마치 '넌 사실 다른 세계에서 온 스파이지? 우리 세계를 기웃거려보고 있는 중이지?'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어요. 



 9.그래요...어쩌면 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어요. 이 사람들은 나와 그냥 평소대로 얘기하고 있을 뿐인데 내가 괜히 레이더를 굴리는 중일 수도 있겠죠. 그게 얼마냐면...한 1%정도의 확률로요! 왜냐면 미리 만나본 mw와 m1을 몇 번 관찰한 결과 알게 됐거든요. 이 녀석들의 사고방식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멈춰 있다는 걸요. 이 녀석들에게 사회란 곳은 여전히 중학교 교실이나 마찬가지인 거예요. 약탈자와 약자와 방관자만이 있고 경찰은 절대 오지 않는 그곳 말이죠.


 어떻게든 이 질문을 잘 받아넘겨야 했지만 내가 아무리 캐릭터를 잘 잡아도 진짜 막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녀석들 앞에서 디테일까지 잡으려고 했다간 들킬 수도 있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냥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캐릭터를 빌려오기로 했어요. 거만한 미소를 지으-는 척을 하-며 대답해 줬어요. 


 '있으면 난리나지! 몸에 낙서하면 엄마가 용돈을 안 줘.'



 10.철없는 한량 캐릭터를 잡은 건...한량은 플러스의 세계와 마이너스의 세계에 다 먹히는 캐릭터라서요. 한량은 빛과 어둠...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박쥐 같은 녀석이지만 내가 플러스인 걸 들키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어요. 이 멘트는 먹힌 건지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어요. 호프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빗발쳤어요. mw와 어울리며 이미 몇 번이나 느끼는 거였지만- 


 '이 녀석들은 대체 공공 장소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mn은 눈썹을 올리며 '아하...금수저.'라고 말했어요. 격렬하게 '난 이 호프집 안에 있는 누구보다도 노력하면서 살았다고!'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미 나는 이곳에 잠입한 스파이였어요. 여기까지 해낸 이상 스파이인 게 들키고 싶지는 않아서 이 캐릭터 그대로 얘기를 진행했어요.


 쳇...아무래도 인터넷 게시판에는 모든 내용을 쓸 수 없어요. 전부 썼다간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테니까요. 어쨌든...계속 신경을 긁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mn은 술자리게임이나 하자고 했고 나는 이렇게 트인 장소에서는 안 한다고 했어요. 그러자 비꼬는 말이 날아왔고 나는 마음먹었어요. 이제는 사고가 벌어지든 말든 멘트의 수위를 맥시멈으로 가동해야겠다고 말이죠. 나는 곁눈질로 바로 집어들 수 있는 것들...기물...그런 걸 살펴두고 위치를 기억해 뒀어요. 그리고 설정을 자동연사로 설정하고 실탄을 마구 쐈어요. 여기엔 쓸 수 없는 말이지만...심각함이라는 감정이 꽤 결여되어 있는 mw와 m1의 표정이 불안해지는 수준의 멘트를 마구 갈겨댔어요.


 한데 나는 기분이 좋았어요. 왜냐면 이젠 걱정할 게 없잖아요. 내가 한 걱정은 갈등 상황이 있으면 어떡하나...갈등 상황을 어떻게 피해야 하나라는 걱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곧 갈등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받아들이니 마음이 매우 편했어요. 


 왜냐면 이 순간까지는 mn이 뭘 하든 걱정이 안 됐거든요. 그러나 걱정해야 할 상황이 곧 벌어졌어요.



 11.여자 둘은 화장실에 가서 자리를 비우게 됐어요. mn은 뭔가 고까운 얼굴로 남은 맥주를 마시고...일어나서 나가다가 나를 보고 두 가지 제스처를 취했어요. 주먹을 들어올리는 제스처, 밖으로 나오라는 제스처였어요. 이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어요.


 '잠깐만 뭐야! 이 녀석에게 밖으로 나가서 주먹질을 벌일 만한 인내심이 있었다니! 이건 아니잖아!'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예상 외였거든요. 이 녀석이 덤벼든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 덤빌 거라고 여기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해둔 참이었는데 그게 몽땅 물거품이 되어버린 거예요. 


 하지만...이 상황에서 도저히 계획을 새로 세울 수가 없었어요. 왜냐면 이 녀석이 여기서 덤벼들면 곧바로 받아치기 위해 손 주위에 기물을 모아 뒀었거든요. 그러면 우발적으로 근처에 있는 걸 집어서 한 행동이었다고 충분히 둘러댈 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내가 포크나 병이나 나이프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면? 이건 계획적으로 보일 거란 말이예요. 포크나 나이프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면 우연히 옆에 있던 도구를 휘두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사용할 의도로 가지고 나간'걸로 해석될 거니까요. 검사나 경찰에게요. 그럼 도저히 둘러댈 수가 없을 거고요.


 

 12.mn은 나오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먼저 밖으로 나갔어요. 내가 mn과 주먹싸움을 한다는 건 선택지에 없었어요. 우발적인 상황을 가장해서 mn을 병원으로 보내거나, 그냥 피해자 신분으로 경찰서에 가서 mn을 유치장으로 보내거나...둘 중 하나였어요. 난 주먹싸움은 도저히 할 수 없거든요.


 나의 마지막 희망은 볼펜이었어요. 볼펜이라면 '우연히 가지고 있었다'라고도 둘러댈 수 있으니까요. 만약 플러스인 사람들과 호프집에 왔었다면 이미 볼펜은 내 손에 있었을 거예요. 왜냐면 낙서를 위해 늘 볼펜과 메모장을 주문하니까요. 하지만 마이너스의 사람들은 애초에 내가 콘티나 그림을 그린단 사실조차도 몰라요. 철저히 숨기니까요. 그래서 볼펜 같은 건 주변에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빙 돌아서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카운터 안쪽에 있는 그나마 긴 볼펜을 하나 집었어요. 나중에 '볼펜을 우연히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한다면 경찰이 cctv를 돌려 볼까...돌려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어요. 


 '만약 지금 볼펜을 집는 장면이 cctv에 잡혔다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cctv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드는 행동을 하면 그건 더 수상해 보일 것 같았어요. 그냥 이대로 가기로 했어요. 만약 cctv를 돌려본다고 해도 볼펜을 집는 행동 자체는 '뭔가를 메모하려고 챙겼다'라고 우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13.마지막으로...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정신나간 짓을 다 그만두는 거죠. 그냥 반대쪽 문으로 이 곳을 조용히 떠나버리고 이 녀석들과 연락하는 메신저를 지워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요.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요. 그야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왜냐면 나는 요 몇 년 동안 지나치게 나대면서 살아버렸거든요. 지나치게 으스대고 잘난 척 하면서 살았단 말이죠. 어떤 사람은 그냥 그러면서 자신에게 취해 버리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아니예요.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다른 상황,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이렇게 나댈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의심해요.


 하지만 결국 나는 이렇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마음만 먹으면 극도로 험악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이런 내게 뭐라고 못 하는 건 내가 그럴 수 없도록 하는 억제력을 손에 넣어서 그런 거라고요. 그렇게 믿고 싶었고, 결국 그렇게 믿어버리게 됐어요.  


 

 14.한데...사실은 이거잖아요. 내가 늘 쓰듯이 여긴 메가로폴리스예요. 내가 놀러다니는 모든 곳은 사실은 문명과 보호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 진짜 사실이죠. 그냥 우연히, 이 세상이 나 같은 타입의 인간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이예요.


 그리고 이런 상황은 모든 곳이 문명과 보호로 가득차 있는 이 도시에서 아주 잠깐 발생하는 사각지대일 뿐이고요. 그런데 이곳에서 잘난 듯 으스대며 사는 내가...몇 년에 고작 한 번, 아주 잠깐 발생할 뿐인 야만적인 사각조차 제어해낼 수 없다? 나머지 99.9%의 영역에서 으스대고 있으면서 이까짓 0.1%조차 제어할 수 없다면 나는 완전 광대나 마찬가지인 거예요. 내가 잘나서 으스대는 거라고 스스로 믿으며 살 수가 없게 되어버리는 거죠.  


 누군가는 이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그런 생각이 들자 도저히 피하고 싶지 않았어요. 여기서 피했다간 앞으로는 도저히 잘난 척하며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결론을 내렸어요. 나는 이걸 피해 가기엔 지금까지 너무 나대면서 살아왔다는 거요. 여기서 다른 문으로 나가서 피해 버리는 행동은 요 몇년 간 있는 대로 부풀려온 풍선...나의 자의식이라고 하는 풍선을 펑 하고 터뜨리는 것과 같다는 걸요. 


 여기서 돌아서서 피해가 버리면 그 풍선은 펑 하고 터져버릴 거고...그러면 앞으로는 나 자신을 좋아할 수가 없게 될 것 같았어요.



 15.볼펜 심을 나오도록 고정시켜서 주머니에 넣고 가게 밖으로 나갔어요. 아직 추운 날씨였지만 웃옷을 벗고 반팔만 입었어요. 이유는 두가지였어요. 첫번째는 움직이기 편할 수 있게, 두번째는 유도를 하는 녀석을 상대로 옷깃을 잡히면 그대로 끝이라고 만화책에서 읽었기 때문에. 


 일단은 좋은 싫든 무조건 선빵을 한대는 맞아야 경찰서에 가도 변명거리가 생길텐데...저 정도의 덩치를 상대로 선빵을 한 대 맞아주는 페널티를 안고 시작한다...? 라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해 본 어떤 시뮬레이션 게임보다도 어려운 것 같이 느껴졌어요. 파이어 엠블렘 헥톨편 하드모드 보다도.  


 마지막으로 그나마 시도해볼 수 있는 건 신발이 벗겨지지 않게 신발끈을 꽉 매는 것 정도였어요. 신발끈을 매다가 갑자기 웃음이 나왔어요. 자신보다 덩치도 크고 리치도 길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고 운동도 본격적으로 했고 싸움에도 익숙할 녀석을 상대로 정면으로 맞붙으러 가는 바보짓을 내가 하고 있다니 말이죠. 나는 늘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면서 살아왔거든요.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덜 똑똑한 사람들도 하지 않을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니...해야만 한다니. 그냥 그게 웃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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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써놨던 일기예요. 써놓고 도저히 올릴 만한 내용이 아니어서 못 올린 게 많은데 이 일기가 그것들 중 하나예요. 이렇게 3일 연속으로 새벽에 들어와서 맛이 간 상태가 되어야 올릴 수 있는 일기들이죠.


 제목에는 안내자가 들어가지만 정작 저들에게로 안내해 준 안내자는 이 글에 안 나오네요. 글이 너무 길어져서 도저히 다는 못 쓰겠어요. 또 새벽감성이 드는 날 이어서 써 보죠.


 쓰고 보니 너무 극적인 타이밍을 노려서 끊은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끊을 타이밍이 안 보였어요. 언제 쓸 지 모르니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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