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낭에 대한 잡담이라니. 사실상 동어반복이지만 딱히 대체할 표현이 생각나지를 않아서 이대로 적어요. 뭔가 메타-한 느낌적인 느낌이 있지 않나요? 초사이어인 갓 초사이어인
짧은 시간동안 듀게에 서식하면서 제가 끄적인 글들을 문득 보면 '바낭'이라는 말머리가 부끄럽지 않을만큼 충실히 바이트를 낭비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최근의 이슈에 대해 끄적인 것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떠한 의견을 피력하기 위함이라기보단 수면 부족 혹은 알콜을 제물 삼아 소환해 낸 의식의 흐름 비슷한 거라...



2. 
어쨌거나 제가 바낭글을 쓰는 이유를 굳이 꼽는다면, 이건 모종의 연습같은 거에요. 
저에게 신변잡기적인 글을 쓰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레포트나 텀 페이퍼 같은 글을 쓰거나, 아니면 특정한 주제에 대해 논박하는 일이 훨씬 더 쉽게 느껴졌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딱히 자판전사의 성좌를 타고난 숙명의 파이터... 뭐 이런 건 당연히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성향에 가깝겠지요.


소위 '어려운 글'들은 쓰기 위한 제반 사항(용어에 대한 개념, 학문적 지식, 특정 이슈에 대한 성찰 등...)들을 갖추는 과정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막상 쓰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의외로 쉬웠던 것 같아요.
이렇게 순수하게 개인적인 글은 오히려 그 반대고요. 일상으로부터 소재를 포착해내는 것 자체는 참 쉬운데 그걸 스스로가 납득할만큼 글로 풀어서 쓰는 건 지금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듀게에 써놓은 바낭들을 보면 자식들 같아요. 아직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니라서 컬렉션이라 부르기엔 뭣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좀 더 근사해질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요.



3.
이번에는 제목에 써놓은대로, 기묘한 인연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해요. 
몇 가지 에피소드가 떠오르긴 하는데 재미있게 잘 쓸 자신이 없어서 저한테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에피소드 하나만...:(


저는 살면서 휴대폰 번호를 딱 두 번 바꿨었고, 지금 쓰는 번호는 9년째 쓰고 있습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가운데 4자리가 쉬운 편인데다가, 마지막 4자리 숫자를 집 전화번호가 아닌 생일로 해놓아서 딱히 바꿀 필요를 못 느꼈거든요.
(이전에는 010-XXXX-생일 이였다가, 지금은 010-OXOX-생일 4자리 뭐 이런 식으로요.)


때는 6년 전 딱 요맘때네요. '로타리 오락실 테트리스 챔피언'이 되기 위해 처음으로 2주 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으러 떠나기 하루 전의 일이었어요. 
처음 접하는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밤톨머리로 헤어스타일을 바꾸면서 오징어로 전락한 저의 못생긴 얼굴에 대한 한탄으로 뜬 눈으로 밤을 지샜더랬지요.
그렇게 한참을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문득, 빙구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 옛날 번호를 쓰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굴까?'


요즘이야 세상이 워낙 좋아져서 연락처 관리를 제때 안 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카톡에 우르르 추가가 되니 쉬운 일이지만, 그 때는 짤없이 부딪쳐 봐야 하던 시절이었잖아요.
이미 머리카락을 잃었으니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생각에 저질러버리기로 결심했죠. 처음엔 전화를 할까 하다가, 결국엔 문자부터 보내보자. 하고 문자 한 통을 무심한 듯 시크하게 툭 던졌어요. 


'자?'


...왠지 그 시간대엔 아는 사람인 척 해야 답장이 올 것 같았거든요. 
다행히 아무도 안 쓰는 번호는 아니었어요. '아니ㅎㅎ 누구?' 이런 식으로 답장이 오더군요.
처음엔 그 상황이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ㅋ... 날 모르다니 실망이네ㅜㅜ' 하면서 누군지 맞춰보라고 스무고개 식으로 장난을 치다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그냥 사실대로 말했어요.
내일 군대 비슷한 데(...)에 훈련 받으러 가는데, 잠도 안 오고 심심해서 내가 옛날에 쓰던 번호로 연락한 거라고요.


그 때가 되고서 비로소 알게된 거였지만 저랑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분이었는데, 그 짧은 몇 시간동안 어쩌다가 친해져서 통화도 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가 뜰 때 쯤엔 그 분한테 훈련소 주소를 가르쳐주고, 편지를 써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내버렸더군요. 
'아... 재밌게 놀았다! 이제 난 가볼게 안녕' 하고 전화를 끊고 입소해서 2주 동안 열심히 굴렀는데, 진짜로 편지가 왔어요. 그것도 거의 매일요. 


그 뒤에는 뭐... 고맙다고 밥이라도 한 끼 하자면서 불러내서 실제로 얼굴도 보고, 두어 번 더 만나서 술도 마시고...하면서 결국엔 사귀기 시작했어요.
가끔 친구들이 둘이 어떻게 만났냐고 물어보면 설명하기 귀찮아서 '꿈에서 만났다'고 둘러대던 기억이 납니다. 에. 그 이후에 좋았던 기억은 아주 잠깐뿐이었지만 어쨌든 그랬어요.



4.
사실 지금부터 쓰려는 이야기가 시기상으로도 그렇고 엄연히 메인인데, 과거 얘기가 어쩌다보니 분량이 길어져서 음...좀 난처하네요; 길게 써야 하나...


저는 '클럽'을 굉장히 좋아해요. 음... 밴드들이나 MC들이 공연하는 곳 말고, 춤추고 술마시러 가는 그 클럽을요. 
여러가지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여태껏 부모님께도 제대로 말씀드린 적은 없지만, 또래 모임 혹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좀 편한 자리에서는 취미 중 하나로 '클러빙'이라고 말하는 편이지요. 
좋아하는 게 어느정도인가 하면 혼자서, 맨정신으로도 잘 다니는 편이라... 홍대에 'XX시 이전 무료입장' 제도가 정착되고 나서부터는 평일에도 학교 도서관에서 죽치고 있다가
오후 9시 반 쯔음에 정리하고 나와서 도보로 홍대까지 이동해서 출근 도장을 찍고, 두어 시간 빡세게 놀다가 12시 쯤 나와서 막차를 타고 집에 가는 게 일상이었어요. 
(요즘은 이걸 '신데렐라' 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12시 땡 하면 집에 가니까 그런가 봅니다.)


어쩌다 흘러흘러 커뮤니티에 가입하고, 아는 사람이 늘어나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이 클럽 저 클럽 놀러다니고 하다보니 그것도 나중엔 일종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더라고요.  
주말만 되면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클럽에 이름만 대면 웨이팅 없이 바로 입장이 가능해졌어요. 들어가면 늘 보는 얼굴들과 정답게 인사하고, 매니저와 스태프 형들이 마구 퍼주는 공짜 술에 취해서 돌아오곤 했죠.
지금 생각하니 좀 쑥스럽지만, 어렸을 땐 한편으로는 그게 남자답고 멋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네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지면서 몇 년동안 뜸했다가, 졸업 즈음하여 좀 여유가 생기고 나선 종종 방문해서 처음 그 문화(?)에 맛들렸을 때처럼 혼자 가서는 두어 시간 설렁설렁 노래도 듣고 술도 마시고 옵니다.
특히 홍대의 N 모 클럽은 평일 11시 이전에 입장하면 투 프리 드링크 티켓을 5천원씩에 팔거든요. 만원 어치 사면 칵테일이 4잔, 아니면 맥주가 4병이니까 잠들기 전에 캔맥주 사서 마시는 돈이랑 그렇게 차이도 안 나서 금전적 부담도 적거든요 :)


요 몇 년간은 일렉트로니카 클럽이 대세라 홍대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순수한 '힙합' 클럽은 몇 없고, 대부분 일렉과 힙합을 섞어서 틀어줍니다.
그래서 일렉 타임 땐 바에 앉아서 멍 때리며 주변을 구경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이것도 나름 재미있어요.
무리를 지어서 '내가 이 구역 통이다!'라는 듯 춤추고 있는 애들을 보고 있으면 그 자체로 귀엽기도 하고, 옛날 생각도 나고 그렇거든요.
아주 가끔씩은 '아, 이 노래엔 저 춤을 추는 게 아닌데...' 혹은 '아 그 핸드사인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닌데...'같은 꼰대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



5.
그 애도 죽순이 그룹 중의 한 명이었어요. 만순이야 뭐 예나 지금이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오랜 시간동안 없어지지 않을테니 그 자체로는 별로 신기할 게 없지만... 
판관 포청천마냥 부리부리하게 눈화장을 하고, 자기 몸통만한 가방을 짊어지고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나름 흥지게 노는 모습이 인상 깊었거든요.


지난 일요일 오후, 금/토 이틀동안 술을 말 그대로 위장에 때려붓고 하루종일 골골대다가 해장이라도 하려고 콩나물을 사러 집 앞 마트에 갔다가, 거기서 마주쳤습니다. 
어...음... 제가 '흠칫' 하고 놀랐다면 그 애는 '화들짝' 하고 놀라더라고요. 평소에 의식하고 있던 건 저 혼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애도 절 알고 있었나봐요. 하긴... 흔치 않죠. 꽤 자주 오는데, 대부분 혼자 놀다가 가는 아저씨라는 건 :)
거의 민낯에 해수욕장에서나 입을 법한 헐렁한 반바지를 입고, 패딩을 대충 걸친 상태에서 어중간하게 면식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제가 그 애 입장이었다고 해도 싫을 것 같긴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눈인사도 없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건을 고르는 척 하면서 서로 멀어졌지요. 장을 보고 계산을 할 때 흘깃 스캔해보니 아마 그냥 그 길로 마트를 나간 것 같았어요.



6.
그 다음날인 어제, 친구와 잠깐 그 클럽에 들렀어요. 네. 당연히 그 애랑 또 마주쳤죠. 씨익 웃어줬어요. 풀 메이크업 상태라 그런지 이번엔 그 날처럼 '화들짝' 놀라진 않고 '흠칫'하더라고요. 
그 애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딴 데로 돌리려는 틈을 타서 다가가 귀에 대고 뻔뻔스럽게 얘기했어요. 


"아니 어젠 왜 도망가고 그랰ㅋㅋㅋㅋㅋㅋ 사람 민망하게ㅋㅋㅋ"
그랬더니 그 애도 빵터져서는 "아뇨...제가 쌩얼이어갖고요..." 하면서 막 얘기하더라고요.  
그냥 이것도 인연이니까 앞으로는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하자고 얘기하고는 술 한잔 사줬네요. :) 덕분에 재밌는 동생이 생겨서 기뻐요.
여전히 마트같은 데서 마주치면 뻘쭘할 것 같긴 하지만요...:(


어...음... 마무리를 어떻게 하지...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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