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이야기...

2015.03.15 03:11

여은성 조회 수:1954


 지난번 일화에 이어서 쓰게 되는군요. 혼자 술 배우러 간 일화를 써본다고 했었죠.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가만히 고민해 봤어요. 그나마 있는 사람들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하거나 그러다가 점점 아쉬운 사람으로 포지션이 맞춰지는거 말이죠. 뭐 여기에 자세히 쓸순 없지만...어느 순간 열받게 되었어요. 가만히 상황을 보니 만남을 구걸하는 구걸 거지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올바른 결론을 내렸죠. 고귀한 내가 저급한 저들에게 만남을 구걸할 필요는 없다는 거요. 아예 그럴 기회조차 없도록 메신저를 다 끊어버렸어요. 그땐 휴대폰도 뭐도 없어서 인터넷 메신저만 끊으면 저를 찾는 게 불가능했죠. 그리고 그들에게 나를 인기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요소를 분석해 봤는데 열중 아홉은 고치고 싶지 않은 거였어요. 열중 하나는 술자리에 가서 콜라를 마시는 거였어서 그건 한번 고쳐보자는 마음을 먹었죠. 같이 놀 사람도 구하고 술도 배우는 일석이조 계획이었죠.



 자전거도 배운 상태여서 이미 자신감은 붙어 있었어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거요. . 흠...그런데 술이라. 저는 술을 안마셨어요. 뭐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술을 마시잖아요. 술을 마시는 건 모두가 하는 일이고 모두가 하는 일을 하는 건 이상하게 손이 안 갔어요. 그래서 학교에서도 안 마시고 치킨집에서도 안 마시고 술집에서도 안마셨어요. 사실 맛이 없기도 하고 굳이 먹는 이유도 잘 알수 없었어요. 특히 맥주는...치킨집에서 먹으면 배가 부르거든요. 맥주를 마시면 그만큼 치킨을 못 먹게 되는데 이건 엄청난 손해죠. 어떤사람은 술배는 따로있다는 허세를 부리는데 왜 그런 거짓말들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가요. 어떤 지구인에게도 뱃속에 웜홀이 있을 리 없잖아요. 술이라곤 가끔 이런 저런 곳에 혼자 가서 그곳의 시그니쳐 칵테일이나 맛보는 게  다였어요. 종이 좀 가져다 달라고 해서 그림이나 그리고 그랬는데 혼자 그러고 있으니 늘 심심했어요.



 술 마시기로 마음먹고 몇 주나 실행에 못 옮겼어요. 그러다 어느날 마음을 먹고 출격했죠. 밤 11시쯤 나가서 압구정로데오역으로 갔어요. 뭔가 클리셰같지만, 그냥 그런 곳에 술집이 널려 있을 거 같았거든요. 한데 없더군요. 뭔가...위기의 주부들에서 브리가 불쑥 들어가 '샤도네이'라고 외칠 만한 그런 곳을 상상했는데 그런 곳은 안보였어요. 술집에 대해 아는 건 아니지만 어떤 좋은 가게든 역세권에 있는 법이니 교대 강남역 신사 가로수길 역삼 역마다 역 근처를 다 기웃거렸는데 대체 술집이 안보이더군요. 사람들끼리 가서 먹는 호프집, 막걸리집 같은 가게랑 아예 이상해보이는 가게 두가지밖에 안보였어요. 빌어먹을 젊은이들의 거리인지 젊은이들의 빌어먹을 거리인지 알 수 없는 빌어먹을 가로수길에서 파티를 맺지 않고 혼자 걷는 건 저뿐이더군요. 가로수길 한가운데서 욕을 몇 마디 하고 그날은 그냥 돌아와야 했어요.




 그런데 사실 그 날의 기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요.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는 요소 중 하나인 냄새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뭔가 알 수 없는 기대감과 불안함이 드는 밤거리의 공기요. 약간의 매연 냄새도 섞이고 음식점 환풍구에서 조금씩 새어나오는 주방 냄새, 포장마차 냄새 그리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밤의 냄새 말이죠. 그리고 똑똑한 듀게분들은 알겠지만 밤에는 소리의 산란이 낮과는 다르죠. 타이어가 도로를 긁는 소리, 경적 소리, 바람 소리 등등이 피아노 페달을 밟고 연주하는 것 같은 울림이 섞여 낮에는 들리지 않던 도시의 고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도로에서 막히지 않고 쌩쌩 달려대는 차들도 왠지 마음에 들었어요. 어떤 차 하나를 타겟으로 잡고 마구 전력질주 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러진 않았고요. 한밤 거리에 내던져진 아이 같은 기분이었지만 이젠 벽장 안이나 침대 밑이나 뒷골목에 제가 두려워할 만한 것 없기 때문에 무섭진 않았어요. 이상한 고양감과 설레이는 마음만 들었던 거 같아요. 결국 그러다가 택시비를 날리긴 했지만 좋았어요.



 며칠 집에서 있다가 다시 밖에 나가보고 싶어서 도전. 이번엔 삽질하지 않게 네이버검색으로 검색부터 했는데 신논현역이랑 강남 쪽에 뭔가 걸리더군요. ㄱㄱ했어요.



 사실 혼자서 마실 만한 곳이야 널려 있죠. 하지만 지금 와서 떠올려보면 역시 그거였어요. 지난번 쓴 글에 말한 것 같은 훈계의 문제요. 그때 주로 듣던 훈계는 어렸을 때와는 또 다른 거였어요. 짧게말하자면, 이 사회의 성인 남자가 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한 거 아니냐는 훈계를 곧잘 들었죠. 어르신들이 아닌 또래나 나이가 별 차이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요. 그래서 훈계에 대한 반발심에 주류사회의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할 만한 곳에 가고 싶었어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 가로수길에서 혼자 소주와 생라면을 뜯고 있는 걸 그들 중 하나가 본다고 가정해 봐요. 그럼 그들은 더더욱 잘못된 확신을 가질 거예요. 내가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한다는 거라는 확신 말이죠. 그렇게 둘 수는 없었죠.


그래서 일단 막연하게 양주를 마시러 간다...는게 목표였는데 사실 흔히 말하는 양주가 뭘말하는 건지, 대충 돈이 얼마가 드는지...온더락으로 마신다는 뜻이 뭔지도 몰랐어요. 스트레이트는 그냥 마신다는 걸로 알고 있었어요. 스트레이트로 양주를 원샷하면 '이봐, 괜찮아?'같은 약속된 추임새가 뒤따라온다는 걸 드라마에서 봐서 알고있었요. 어쨌든 새로 산 게임을 매뉴얼 안 보고 플레이하는 느낌을 느껴보고 싶어 정보 없이 그냥 갔어요. 신논현역 쪽 있는 바가 버스로 한번에 갈 수 있길래 타고 갔죠. 새로 나온 게임 소프트 밀봉을 풀고 게임기에 집어넣고 타이틀 화면이 뜨는 걸 기다리는 기분이었어요.



 한데 버스를 타고 가는데 아주 옛날에 본 짱이라는 만화가 떠올랐어요. 이런 장면이 있거든요. 김민규라는 고딩이 아버지랑 새어머니랑 아침 식탁에서 밥먹다 말고 아빠한테 이런 말을 해요. '아버지 돈 좀 주세요' '돈? 얼마나?' '아버지 전 아내가 아파요. 일단 급한 대로 삼백만원만요' '뭐? 삼백? 못줘!' '왜 못 줘요? 그정도는 아버지 하루 술값밖에 안되잖아요!'  뭐 대충 이런 상황이었어요.



 그때 그 장면이 잡지에서 연재된 게 아마 늦어도 2005년 경이었을거예요. 2005년경에 양주를 먹는데 하룻밤 삼백이라면 그럼 한 8년 이상 지난 현재는 물가상승을 고려하면 이거 감당이 안 되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더군요. 하지만 이미 버스가 출발해 버렸으니 그 만화의 김민규 아버지가 황당하게 부자거나, 아니면 만화가가 고증을 발로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죠.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었어요 일단 던전...아니 바 앞까지 갔어요. 바 앞에서 웬 남자가 길빵을 하고 있었는데 셜록이 아니더라도 그사람이 사장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어요. 그사람이 내게 말했죠. 대충 "누구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왜오셨어요?" 라고 했던듯. "널 부자로 만들어 줄 사람이지"라고 대답해 주려다가...그 사람이 나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고 그 드립은 사실이 아니기도 해서, 대답하는 대신 그냥 무시하고 들어갔어요. 바 앞에 발렌타인 특가라고 써진 배너가 보이고 뭔가 좋은 것 같은 냄새가 나더라고요. 며칠 전 밤에 느껴본 밤의 냄새와 비슷했어요. 어쨌든 문을 열고 들어갔고 사장은 급하게 담배불을 끄고 계단을 뛰어내려와서 날 따라왔어요. 아마 내가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람으로 보인 거 같아요.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어떤시선으로 보는지 잘 알거든요.


 들어가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날아와 꽃혔어요. 거기서 일하는 것 같은 여자애들이었는데 역시 손님을 보는 것 같은 눈초리는 아니었어요. 어쨌든 들어간 다음에 문제는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모른다는 거였어요. 여긴 위주에서 브리가 가는 바 같지도 않고 호텔바 같지도 않고 그나마 가본 모던바 같지도 않았거든요. 지금이야 혼자 왔으니 적당한 테이블에 앉겠지만 그때는 8~10인용 부스에 들어가서 앉았어요. 여기서 몇 초 더 망설이면 처음 왔다는 걸 눈치채일까봐 그런 건데, 그런 행동은 오히려 더 처음 온 티를 내는 거였죠. 사장의 표정이 더 안좋아졌어요. 이번엔 대답을 듣겠다는 듯이 부스로 들어와서 내앞에 앉아 '어떻게 오셨어요?'하더라고요. 순간적으로 트랭크스의 '너희들을 죽이러 왔다...'라는 대사가 떠올랐지만 부스 밖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애들의 표정을 보고 참았어요. 사장은 분명 계단 위에서 담뱃불을 껐던 거 같은데 어느새 다시 새 담배를 물고 있었어요. '이 사람은 혹시 모모에 나온 회색사나이의 일종이 아닐까? 산소로는 호흡을 못 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입 밖에 내어 물어보진 않고 난 담배냄새를 싫어하니 담배 좀 꺼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메뉴판이나 달라고 했어요.



 메뉴판을 보고 김민규의 아버지는 하룻밤에 마시는 술의 양이 정말 많았던 거구나...라고 주억거리다가...갑자기 깨달았어요. 원래 계획은 모든 술집을 한번씩 가보고 분위기를 살피는 거였는데 이곳을 그냥 나가버리면 내 등뒤에 감당할 수 없는 시선들이 꽃힐 거라는 걸요. 그래서 적당히 뭐 하나 시켰어요. 아마 발렌타인 뭐시기+과일세트였을 거예요. 옆에 여자애 중 하나가 와서 앉았는데 자기도 마셔도 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내 돈으로 산 술을 왜 남에게 줘야 하는지 어이가 없었지만 그게 이곳의 규칙인 거 같아서 그러라고 했어요. 여자애는 내게 질문을 하면서 나이는 몇인지 사는 곳은 어딘지 같은 정보를 캐내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 거짓말로 대답해줬죠. 그러는데 갑자기 옆 부스에서 누군가의 일성이 들려왔어요.


  "야! 내가 누군 줄 알고! 내가 천만원짜리 와인을 마셔 본 사람이야!" 라는 일갈이었어요. 옆 부스는 원래 시끄러웠는데 그건 정말 소음의 정점이었어요. 그래서 짜증나서 대체 누군가 싶어 옆부스를 흘끗 봤는데 내가 수상해 보인 이유를 그때 알았어요. 중년 남자 여러명이 있었는데 다들 양복을 입고 있더라고요.


 뭐 재밌었어요. 재미있게 놀던 와중 셜록만큼 똑똑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똑똑한 저는 한가지를 떠올렸어요. 이곳에 들어올 때 사장이 긴장한 건 추리닝 입은 청년이 혼자 왔다는 거였죠. 양복 입은 중년 여러 명이 같이 오는 곳에 말이죠. 그런데 중간에 어떤 말을 했었는데(지금은 흐릿하지만)그 중 하나의 단어는 공무원을 두려워하는 듯한 뉘앙스였거든요. 사실, 돈없는 사람이 온 게 걱정이라면 그냥 보내거나 선불을 요구하면 될 일이니까요. 그래서 가설을 세워봤어요. 만약 공무원을 두려워하는 거라면 어떤공무원을 두려워하는 걸까? 환경과일까? 아니...환경과나 위생관리과라면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을텐데 대체 뭘까? 그렇게 꼬투리잡을 만한 건 없어 보이는데...하다가 문득 들어올때 간판이 음식점으로 써있던 것같은 게 떠올랐어요. 그리고 간판에 음식점이라고 써있는 곳은 여자가 옆에 앉거나 술을 따라주면 안 된다는 짤막한 상식도 떠올랐어요. 그리고 이곳은 세금을 아끼기 위해 음식점 간판을 걸고 비지니스바를 운영하는 거 아닐까? 하는 가설에 도달했죠. 이 가설이 그럴듯한 게 아까 옆 부스를 흘끗 봤을 때 여자들이 고객의 옆에 앉아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이 부스에선 옆에 안 앉아 있었거든요.


 아 물론 모든건 짧은 장난을 치기 위한거예요. 장난을 워낙 좋아해서요. 제가 하는 행동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모든건 모두에게 무해한 장난을 치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사장을 불러 네이버검색을 통해 이 가게를 찾은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며 수상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며 긴장을 풀었어요. 사장의 긴장이 충분히 풀린 것 같았을 때 옆에 여자애한테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로 옆에 앉아서 술 좀 따라달라고 했어요. 여자애가 사장을 보고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여자애가 옆에 와서 앉아 술을 따랐어요. 저는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얼음 같은 표정으로 사장의 손목을 잡고 외쳤어요.


 "1종 아니면 이거 불법 아닙니까? 잡았다 요놈."(대충 이렇게 말한듯)

 

 디오가 더월드를 쓸 때 바로 이런 기분이겠구나 하고 느꼈어요. 디오는 시간을 최대 9초까지 멈출 수 있는 걸로 아는데...사장과 여자애들의 표정을 보니 그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심한 짓을 하는 거 같아 3초쯤 지났을 때 그만둬야 했어요. '걱정마세요 공무원 아니니까'라고 말했는데 그들의 표정이 '저는 절대로 아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콜린스위니를 보는 배심원들의 표정 같았어요. 그날 그곳에서 계산을 마칠 때까지는 계속 수상한 사람 취급받는다는 듯한 기분을 조금은 느껴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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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마치려다가...바텐더라는 말을 안 쓴건 그들이 칵테일을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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