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나

2015.12.15 06:46

Vulpes 조회 수:2931



 그 사이 나는 결혼을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Police certificate의 유효기간이 3개월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 영주권 신청을 마치기 위해서는 9월 중에 혼인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늦어도 9월 중순엔 식을 올려야 했다. 인터넷으로 가장 가까운 Registry를 찾았고, 당장 오늘 우리를 결혼시켜 줄 수 있다는 주례 선생님도 찾아서 연락을 했다. 


 그 사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감정의 격랑들이 있었다. 얼마나 서로의 곁에 있기 원하는지 우리는 각자 깊이 고민했다. 한번은 내가 밥을 계속 굶으며 늑대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한번은 늑대가 화장실로 달려가 바닥에 쓰러져 모든 것을 토해내듯 울었다. 나는 사람이 그렇게 우는 것을 처음 보았고 구급차를 불러야 하는 줄 알았다. 늑대는 문자 그대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과 의료인, 법조인 자녀로 반짝이는 늑대네 가족이 사실 아버님의 도박과 사업 실패 때문에 어떻게 무너졌었고 늑대가 부모님을 위해 어떤 것들을 해드렸었고 그래서 지금 아무것도 없다고, 그런 이야기들을. 


 너는 내 곁에 "오래된 벽처럼 말없이 있어" 주겠다고 했지. 나는 그걸로 충분했기 때문에 캐나다에 왔어. 네가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나와 그래서 무슨 상관인데? 

 너는 내게 미안하다며 울기만 했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엔 시간이 걸렸지. 우린 지금 올해/내년 결혼하는 네 친구들처럼 멋진 집을 사거나 준비하는 데 일이년 걸리는 근사한 결혼식을 할 수도 없고 네가 내게 기대하라 말하던 프러포즈도 아직 받지 못했지만, 중요한 건 네가 내게 여기 오라고 했고 내가 여기 왔다는 거야. 그 결심보다 중요한 건 없어. 한 번도 네가 얼마를 버는지 돈을 얼마나 모았는지 물었던 적 없어. 이대로 내가 떠난다면 다신 너를 보지 않을 거야. 


 그냥 가서 혼인신고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고 몇 가지 절차들을 밟아야만 했는데, 세부사항은 늑대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레지스트리에 가서 주례 선생님을 만나야 하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증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해야 한다고 축약했다. 늑대는 굳은 표정으로 주례 선생님과 통화해 일시를 조정했다. 나는 한 가지 걱정이 되어 이메일을 썼다. "Hi Robert, I just want to let you know this is same-sex marriage and hope you are ok with it. Cheers," 곧 답장이 왔다. "Am I OK with it? I'm pleased for both of you that you found someone to love and that you've chosen me to marry you. See you tomorrow evening." 


 다음날 나는 엄마가 사준 이불보를 세탁해 건조기에 넣고 쇼핑몰에 가서 분홍 리본 장식을 사 온 후 화장을 하고 흰 드레스를 입었다. 리본 장식은 늑대의 가슴과 내 손목에 달 것이었다. 동생이 준 하얀 구슬 장식 머리띠를 하고 분홍 네일 폴리쉬를 바르고 나니 늑대가 왔다. 늑대는 매일 야근을 하고 있었지만 그날만은 특별히 이야기해 일찍 와서 바나나를 먹고 옷을 갈아입었다. 까만 셔츠와 바지였는데, 나중에 유럽 사진들을 정리하며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늑대가 입었던 옷이었다. 


 레지스트리는 말하자면 동사무소와 비슷한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먼저 Marriage license를 발급받고, 직원에게 혹시 증인이 되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우린 여기서 지금 결혼할 거라고. 직원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정말 여기서 한다고? 재차 물었지만 곧 여기저기 전화해보더니 해당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자신은 증인이 될 수 없지만 동료는 가능하다며 옆 직원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한 명이 더 필요하니 지금 어서 친구를 만들어 보라며 웃었다. 퀘벡에서 이주해 온 한 청년이 우리를 도와주기로 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몸을 떠는 나 대신 늑대가 대부분의 일을 처리했다. 얼음장 같은 손으로 내 손등을 어루만지며 다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며, 다음엔 뭘 해야 하는지 연신 물었다. 

 

 아직 민원인들이 있었지만 레지스트리가 문을 닫기 전에 식을 마치고 Marriage certificate을 신청해야 했기 때문에, 그곳 구석에서 우리는 로버트의 안내에 따라 선서를 낭독했다. 너무 긴장했던 탓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지만 늑대가 I do 하며 내 손을 꼭 잡던 순간만은 분명하게 남았다.


 둘 다 너무 배고팠지만 이미 시간이 늦어 캘거리 타워의 Sky 360엔 갈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미리 알아뒀던 집 근처 쇼핑몰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아주 시끄러운 바에 앉아야 했고, 서버는 영원히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도 그렇다. 잘한 일일까. 우리는 서로 함께 살아갈 시간이 필요했다. 고통스럽게 빛나며 전력 질주하던 어떤 초침들이 지금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리고 평화로운 표면으로 흐른다. 누워 있는 너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반하는 나날. 너는 내 기저의 격렬함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꼭 안고 입 맞춘다, 그처럼 중요한 일은 세상에 다시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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