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박원순쑈에 대한 잡담

2015.06.05 23:43

로이배티 조회 수:4853

- 제목에도 박혀 있듯이 전문적인 식견 따위와는 아주 거리가 먼 바이트 낭비성 잡담에 가까운 글입니다... 라고 쉴드를 미리 쳐 봅니다. 싸움은 싫어요. ㅋㅋ


- 듀게에서 어젯밤 박원순쑈(...)에 대해 이야기가 오가는 걸 보면서 좀 위화감을 느꼈던 부분이 있는데. 무엇인고 하니 바로 '어제 박원순의 정치쑈 때문에 시민들의 불안감이 더 커졌다' 라는 발언입니다.

 그게 제 생각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람들의 불안감은 성층권을 돌파하여 우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거든요. -_-;;

 제가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며칠 전부터 학생들이 '메르스가 무섭다'는 이유로 학교에 안 옵니다. 물론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서, 혹은 심지어 부모들이 그러라고 시켜서 그러고 있는 겁니다. 당장 그건 아무런 개인 사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무단 결석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알려줘도 안 와요. 오히려 '나라가 이렇게 위기인데 니네 학교는 휴교도 안 하고 뭐 하는 거냐!'는 준엄한 꾸짖음만 돌아올 뿐이죠. 허허. 그리고 그런 학생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참고로 제가 살고 일하는 지역은 오늘 오전까진 메르스 확진 환자가 한 명도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근데도 저런 학생들이 워낙 많아서 얘들 죄다 무단 결석 처리하기 부담스러우니 휴교를 해 버리는 학교가 며칠 사이 엄청 늘어났구요. 이건 몇 년전 전국적으로 수만명 이상이 감염되고 고생하면서 난리가 났었던 신종 플루 사태 때도 보기 힘들었던 현상입니다. 사람들의 인식이 그래요. 실제로 메르스가 어떤 질병인지를 떠나서 사람들은 이게 몇 배는 더 심각한 상황인 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깁니다. 정부측과의 온도차가 엄청나죠.


- 이런 연유로 저나 동료 교사들이 학부모들과 수없이 많은 통화를 해 봤는데. 그 분들의 주된 불만은 대략 이런 겁니다.

 "나라와 지자체가, 심지어 학교까지도 우리를 속이고 있다! 니네 학교에도 메르스 환자 있지!!"

 전혀 없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안 먹혀요. ㅋㅋ 메르스 환자 발생한 병원 이름도 감추고, 환자가 사는 지역이나 생활 동선도 안 가르쳐주는 비밀스런 대처. 그리고 공기로 전염이 절대 안 된다고 했다가 된다고 했다가 또 안 되는 것 같다고 그러다가. 3차 감염자는 절대 없을 거라고 안심하라더니 하루만에 떡하니 3차 감염자 등장하고. 뭐 이런 정부의 오락가락 행태 덕에 지금 사람들은 메르스 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은 거의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어제까지'도 정부의 반응은 참으로 뜨뜻 미지근했습니다.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 느끼기에 그러했다는 겁니다.)

 일단 대통령은 그냥 계획된 미국 순방 그대로 가겠다고 그러고. 쿨하게 '니들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으니 안심하고 유언비어나 퍼뜨리지 마.' 라는 얘기나 하고 있었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 메르스라는 질병이 그렇게 치명적이고 살벌한 병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거야 제 생각일 뿐이고, 현실적으로 불안감과 공포가 이미 극에 달해 있는 사람들을 달래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오버액션'이었다고 봅니다. 무슨 비상 기구라도 꾸려놓고 그 중심에 대통령이 떡하니 앉아서 '모든 역량을 동원해라! 책임은 내가 진다!!'라고 외치는 "쑈" 같은 것 말입니다. 

 근데 그런 일은 없었고 결국 사람들의 공포는 대책 없이 커져만 가고 있었죠.


- 그 와중에 갑자기 박원순이 튀어 나와서 다들 아시는 그 쑈를 펼쳤습니다. 가만히 따져 보면 이 쑈의 핵심은 두 가지인데요.

 1. 그동안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던 서울시 메르스 확진 환자에 대한 고급(?) 정보 공개.

 2. 내가 지금 전쟁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빡세게 막아주겠다. 내가 앞장서고 내가 책임진다! 라는 선언.

 제가 보기엔 정말 감탄이 나오도록 아주 시의 적절하게 계획된 쑈였다고 봅니다.

 일반 시민들에게 메르스 전파 현황에 대한 정보를 쥐어주고, 그래서 뭔가 대비하고 조심할 계획이라도 세울 수 있게 해 주는 것.

 그리고 나랏님들이 나서서 '완전 진지하게 궁서체로 애써주마!' 라고 약속해서 보호 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

 이거야말로 요즘 국민들이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정부는 끝끝내 이런 역할을 해 주길 거부했고 그래서 사람들의 원성이 거세지는 가운데 박원순이 정부 대신 그걸 해 준 겁니다.

 불안감이 더 커진다구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오히려 체계적인 방역에 문제가 될 수 있다구요? 그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시민들 맘은 오히려 조금이라도 편해졌을 거라는 데 100원 정도 걸 수 있습니다.

 아까 보니까 박원순이 '준 전시상황'이라는 표현을 써서 사람들 겁을 준다는 얘기들이 많던데. 오히려 그 반대죠. '준 전시상황처럼 막아주겠다'는 강한 의지로 받아들이고 위안을 얻을 사람이 훨씬 많을 겁니다. '걱정 말고 손이나 깨끗이 씻어라' 라는 조언이 현실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그게 자신이 보호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지는 못 하거든요.


- 암튼 제 생각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어젯밤의 기자 회견은 제가 보기에도 쑈의 성격이 강한 게 맞아요. 하지만 시민들 입장에서 그 쑈의 효과가 긍정적이라면 이게 비난받아야할 이유가 뭐가 있겠냐는 거죠. 실효성을 의심할 수는 있겠지만 일단 심리적 안정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안겨줬다면 정치가로서는 좋은 일 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 건은 오히려 박원순의 정치 감각이 새민련 사람들보다 몇 수 위라는 걸 증명한 일이라고 봅니다.

 당장 오늘 여당측의 반응을 보세요. 열심히 융단 폭격을 퍼부으면서도 병원 한 곳의 이름을 공개하였고, 동시에 대통령을 병원 현장으로 출격시켜 얼른 끝내고 미쿡가야 하는듸!! 어제 박원순이 한 것과 비슷한 대사들을 읊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어제의 그 쑈가 잘 먹혔다는 얘깁니다. ㅋ


- 다만 제 입장에서 볼 때 좀 커다란 옥의 티가 보여서 그게 좀 아쉽습니다. 오늘 갑자기 종편과 보수 언론의 히어로가 된 그 의사 관련 발언 말이죠. 그 부분은 확실히 좀 더 신중하게 발언하는 게 좋았을 거라고 봅니다. 그 발언 자체가 신중하지 못 했고 그래서 그 의사에게 필요 이상의 데미지를 안겨줬다는 게 당연히 가장 큰 문제구요. 박원순 입장에서 봐도 당장 지금 상황이 그걸로 엄청 트집 잡혀서 역공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흠. 왜 그랬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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