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집에 들어온 후.

2015.12.15 19:38

잔인한오후 조회 수:2271

1_ 집에 들어오고 나면, 뭐든 귀찮아서 침대에 늘어붙게 되죠. 그렇게 시간을 흘려 보내게 되요. 최근 가장 존경스러운 사람들은 일을 끝마치고 나서 특정한 일정을 가지는 사람들이에요. 어떻게 하루종일 일에 매진하고도, 여력이 남아 또다시 다른 일정을 처리할 수가 있는가 하는거요. 방과후 학교 같은 것과는 다르잖아요. 내일 또다시 다가올 고통과 오늘 방금 끝난 고통 사이의 기간 동안, 최대한 아무 생각도 권한도 없이 자신을 흘려보내겠다는 공백을 포기한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런고로, 저는 사실상 대부분의 창작활동과 자기개발을 그만 둔 상태입니다. (언제는 했었냐만은.) 책을 읽은지는 수십만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지고, 뭔가 그럴싸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주말까지 웅크리고 기다렸다가 막상 주말이 다가오면 힘내서 허송세월을 하는, 그런 나날들이 반복되고 있는 중이지요. 마치 흔히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어떤 상황에 도달하고 나면 뭔가 끊임없이 이뤄낼 것처럼 보이다가 막상 그 후에는 회색 배경으로 섞여들어가 반복하면서 기억을 잃어버리는 스트레오 타입.


창작 소재로 자주 다뤄지는 소재 중 하나가, 용사와 마왕이 있는데 요새는 마왕을 부러워하고 용사를 비정규직화 하다 못해서, 용사와 마왕 둘 다 비정규직화된 (아마추어) 만화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 추세랄까요. 마법소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도 꼼꼼히 따져보면 꼭 꿈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지는 않았지만, 요즘은 어둠과 절망으로 가득찬 게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영화판도 달달하고 부드러운 것은 로맨스 장르에서나 그것도 가끔가다 볼 수 있을 뿐이지 희망을 관측하는건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올 해 본 영화 중에서 가장 희망찼던게 [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라면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여튼, 제 잠자리 주변에는 부질없는 욕망의 투사체인 종이책들이 둘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타블렛에는 꽤 읽을만한 e-북들도 많이 기다리고 있죠. 어떻게하면 여유를 가지고 읽을 수 있는 것일까요. (올 해 들어서 책을 1권이나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읽기에 대한 투정은 인터넷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한 것이니 반복해서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것이긴 합니다만. 평일을 무시해서는 안되욧! 같은 느낌으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저는 그게 떠오릅니다. 김연아가 스트레칭을 하는데 방송관계자가 질문을 하는 짤방이요.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해요?'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결국 습관으로 하고 싶은 일을 끼워 넣기 위해서는 단세포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곱씹습니다.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면 가만히 있어도 그게 그냥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겠거니 싶은 거요. 정신적 동인이란건 크게 의미있는 일이 아니지 않을까 싶으니까요.


2_ 그냥 집에 와서 그럼 무엇을 하느냐하면, 예전 버릇 남 못 준다고 아직도 방송을 봅니다. 저는 남이 무언가 하는걸 구경 아주 잘하거든요. 구경에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을 남이 대신 해주는데다 나는 그냥 보고 있기만 해도 되네' 싶은 마음으로 2시간이고 3시간이고 보다가 잠듭니다. 남는건... 방송 보는 세대의 사투리 같은걸 빠싹하게 알 수 있습니다. 머리를 쓰지 않고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최상의 일거리라고 할까요. 어떤 면에서는 TV보다 더 한 거 같아요.


제가 방송을 보려면 여러가지 제약거리가 있습니다. 일단 3D 게임은 안 되요. 10분만 보고 있어도 멀미가 나거든요. 심지어 보던걸 끝냈을 때 후속 멀미가 계속 이어집니다. 대략 3배 정도 된다고 할까요. 그래서 FPS나, 요즘 가장 흥행하는 샌드박스류 게임은 볼래야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폴아웃4도, 라스트 오브 어스도 안녕이죠. 남는게 얼마 없어요. 다행인건 블리자드사가 저같은 3D 멀미 유저를 위해서 은혜로운 대중 게임을 하나 내줬다는데 있죠. 하스스톤이라는 카드게임을 말이죠.


아니면 웹툰 순례를 하든가요. 요즘은 앱이 잘 나와 있어서, 좋은 타블렛이 있으면 웹툰뷰어로 최적입니다. 좋은 휴대폰을 가지고 있어도 마찬가지겠지만요. 세로보기가 가로 동영상의 적이라면, 스크롤 웹툰의 단짝 친구라고 할 수 있겠죠. 크롭 기능이 없는 모니터에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웹툰들이 완벽하게 최적화되어 나온답니다. 그렇게 몇몇 곳을 떠돌다가 아마추어 업로드까지 찾아서 확인하면 하루 일과가 끝이나는 거죠. 오늘도 컨텐츠 생성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구나 싶은 마음으로.


단점이라고 한다면, 하루 종일 모니터 쳐다보고 있다가 집에와서도 또 모니터를 봐야한다는 거죠. 눈을 혹사시키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짧은 순간 팟캐스트를 위시한 소리를 듣는걸 찾아봤는데 역시 저에게 듣는 것이란 들을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몰렸을 때 선택하는 탈출구 같은 것이더라구요. 제약이 없을 때 굳이 손댈 이유가 없는. 장거리 통학을 할 때는 꽤 들었지만, 그럴 일이 없어지니 그것도 시들해지더군요.


3_ 감정적으로 건강한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제가 그걸 강하게 느꼈던 건 [시]의 주인공을 보면서였는데요. 노년 주인공을 그렇게 곱게 그려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보통 착한 사람은 약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이잖아요. 그리고 일상에서 그런 사람을 어떻게 만나봅니까. 다들 생글생글 웃고는 있지만, 관례상 혹은 업무 관계상 내가 취해야할 입장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한 편인 것이잖아요. 그래서 집에 돌아올 적에는 한 치의 감정도 없는 얼굴 표정을 지으며 돌아가는 것이잖아요.


루머를 통해 특정한 추측을 할 때나, 특정 연령대가 취할 행동을 가정할 때 얼마나 편견과 미신에 사로 잡혀있는지요. 그럴싸하다, 어떤 이가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라 족히 미뤄 짐작이 가능하다, 같은 것을 여러 계층에 대어 보면서 얼마나 침울한 세계를 가정하고 있는지 생각을 하면 참 움울해지죠. 그래서 그런 상황에 대한 반례를 발견하게 되면 그렇게 흡족하고 기분이 좋아지나 봅니다. (의인에게) 좀 너무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의인 한 명을 보고 멸망을 안 시키는게 이해가 가요.


감정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을 낮춰 사과하는 사람과 남을 낮춰서 사과를 받아내는 사람이요. 지난번에 잠깐 이야기했던 책임 소재의 비율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죠. 상식적으로 생각해서는 남 50%, 나 50%로 공정하게 따져나가야겠지만 세상이 그렇질 않잖아요. 나 100%로 미뤄 생각하거나 남 100%로 미뤄 생각하는 편이 많은 것이죠. 온갖 것에 움츠러들거나 하나도 남을 고려하지 않거나. 무수한 전례들을 통해서 이끌어진 것이겠죠.


잠깐 생각나는 한 장면. 흔들리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한 후 출발하려는 찰라, '잠깐만요 기사님-'이라고 이야기한 초로의 아주머님을 본 적이 있어요. 버스가 출발하려다 말고 멈춰서서 다시 문을 열었는데 아주머님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반복했던 사과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어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죄송합니다 기사님, 죄송합니다 기사님, 죄송합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내리시더라구요. 뒤로 갈수록 더 줄어드는 목소리로...


최근의 베스트셀러 제목이 '미움받을 용기'였었죠. 아들러 심리학을 대화체로 풀어내었다던가 하는 책이었는데. 제목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음... 너무 여기저기로 이야기가 튀니 이 쯤 이 소재를 끝내보도록 하죠. 서로의 감정을 과대과소평가하지 않는게 강건하게 보일 수 있는 (혹은 강건한) 것이겠죠.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자만 할 필요도 없이. 그건 테니스나 배드민턴 같은 거라고 생각해봅니다, 보통은 탁구를 많이 예로 들지만. 서로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게임할 것을 믿고 공을 계속 건내주는 거죠. 그런 것에 익숙하다는건 수 만번의 교환을 해 왔으니까 그럴테고요. (그 만큼의 실수도)


4_ 저녁을 안 먹었더니 배고프군요. 뭔갈 먹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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