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랜덤

2016.01.09 06:15

차이라떼 조회 수:3220

낯선 땅에서 서울까지 원거리로 일년이 넘는 소송을 하고 드디어 자유의 몸의 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인생 정말 별거 아니구나. 
"이혼을 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심지어 영어권 국가인 이 나라 도서관에도 이런 책이 꽂혀있더라고요. 
그러므로 무너지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남은 저는 돌싱입니다. 다행히도 '돌씽', 귀여운 말이예요. 
여기서는 또 감사하게도 니가 싱글 페어런트니 뭐니 신경도 안씁니다만.  

간혹 제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혼했다고 하면, 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주로 한인들이, 심리나 상담을 공부한 분들이, 
어린 시절에 가정 폭력이나 학대나 아버지와의 문제가 있었냐, 다른 애인들과의 관계는 어땠냐, 등등 물으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마치 저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결국 문제가 있는 남자를 골랐다는 듯이요. 
뭐 때로는 그런 케이스도 있겠지만 그런 식의 '네 탓' 이론이 결국 당사자를 얼마나 위축되게 하고 상처를 주던지요. 
이 '네 탓' 이론은 '애 놔두고 싸우고 이혼이라니 쌍방 똑같다'는 이론과 쌍두마차로 저를 괴롭혀왔습니다. 
"나도 예전에 많이 싸웠다. 아이 생각해서 좀 더 참지 그랬냐"는 말도요. 그냥 걱정되서 지나가는 말로 하는 말인데 당사자에게는 비수가 되더라고요. 

그치만 저의 아버지는 평생 성실하셨고 어머니를 존중하셨고 절대 폭력적이지 않으셨고 저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주셨습니다. 
저의 전 애인들도 대부분 순하고 착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마침 저의 결혼적령기에 만났던 사람이 유독 폭력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고 저는 그걸 모르고 결혼했을 뿐입니다. 

주변에 무척 착하고 좋은 남편을 둔 친구들이 많아요. 작은 단점들이야 있어도 기본적으로 아내와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가족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을 주고 받을 줄 아는 사람들이요. 가끔 그런 남편들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세상에 저렇게나 괜찮은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왜 이런 사람을 만났던 걸까. 나에게 정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걸까. 내가 정말 불행과 폭력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친구들이 저랑은 다르게 잘 자라서, 혹은 훌륭한 공덕을 쌓아서 착한 남편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더라고요. 그중에는 그전에 꽤 나쁜 남자들을 만나면서 고생을 하다 마침 결혼적령기에 괜찮은 짝을 만난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돌싱 친구들도 너무나 매력적이고 똑똑하고 가정폭력과는 상관없이 사랑받으며 자란 친구들이 있어요. 그러니 '네 탓' 이론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 - 인생은 그냥 랜덤이다, 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어떤 나라,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지를 내가 결정하지 못하듯이, 어떤 짝을 만날지도 사실 내가 온전히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결혼을 하고 가장 많이 중얼거렸던 혼잣말이 아마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였을 꺼예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인데도 어쩌다보니 일어나는 일들도 있으니 -  물론 그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져야 하는 것과는 별개로 -  그것에 대해 너무 심하게 고통스러워하고 자책하지는 말자, 뭐 이런 결론이요. 그냥 내 힘으로 컨트롤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흘려보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어요. 지금으로선 하는 일을 잘 하고, 돈을 벌고, 아이를 잘 돌보는 것이죠. 우습게도 큰 일을 겪으면서 어지간한 일들은 웃어넘기는 배짱(?)같은게 생겼습니다. 내 자신이 좀 더 단단해진 느낌, 그런 건 좋아요. 이제사 조금이나마 철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아, 친구들의 사소한 고민에 감정이입을 못하는 단점은 있습니다.. 특히 이민 생활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친구들을 잘 참지 못하게 됐네요..  끙.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가.. 
아, 저도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결혼기간 포함 거의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만한 30대를 정말 외롭게 보냈네요.. 
20대에는 애인이 떨어졌던 시기가 없었건만 ㅎ
일년 반 동안 공부하면서 일하면서 애키우면서 살림하면서 극기훈련처럼 사느라, 또 시골에서 사람만날 기회도 없이 사느라.. 
커피공룡님과 다른 분들 글로 대리만족하면서 살았지만,  
슬슬 전에 글 올리셨던 산호초님처럼 적극적으로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려구요. 

택이 아빠랑 선우 엄마도 담을 허물었잖아요..  
지난 주에는 큰 맘먹고 블러셔도 하나 샀어요. 3년 만에 미용실도 갈꺼예요. 
혹시나 계실 듀게의 돌싱분들 같이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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