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11 18:43
1.예전에 대학교를 다녔었어요. 하지만 안다녔어요. 다니는 것과 안다니는 것을 동시에 했기 때문에 학점이 위험해졌고 어느날 계산을 해보니 이제부터 모든 방학에 풀로 계절학기를 들어야만 졸업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한데 계절학기를 듣다 보니 그렇게 계절학기를 차곡차곡 쌓는 게 의외로 재밌어서 나중엔 방학 시즌을 기다리게 됐죠. 그리고 어느 겨울에 이번에야말로 일본어 수업을 듣기로 하고 신청했어요. 일본어를 선택하면 그 계절학기는 날로 먹는 거니까요. 한데...중급반이 당시에 없었던지 어쩔 수 없이 초급반을 하게 됐어요. 날로 먹는 건 좋지만 너무 날로 먹는 건 재미가 없는 일이라 입맛을 다시며 첫 수업을 갔죠.
그런데 거의 같은 과 동기가 있는거예요. 전혀 친하지 않았지만 얼굴 정도는 아니까 같이 앉았어요. 아예 모르는 사람과 앉는 것보단 안전한 거 같아서요.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이런,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온 거란 걸 알게됐어요. (거의)모두가 일본어를 이미 어디선가 배운 자들이었고 그걸 숨길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리고 당황하지 않는 교수의 표정으로 보아 교수도 이 연극에 동참중이란 걸 알게됐어요. "날로 먹기 클럽에 온 걸 환영한다 제군들!"이라고 하진 않았지만 말이죠.
물론 여기서 거의라는 말을 쓴 건 이유가 있어서죠.
옆자리에 앉은 동기는...진짜로 일본어를 몰랐어요.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일본어 초급반에 온 거예요. 그리고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 중인지도 눈치를 못 챈 것 같았어요. 하긴 그게 정상이죠. 일본어 초급이면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와야겠죠.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교수는 일단 오늘은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배우자고 했어요. 독학으로 일본어를 익혀서 읽기 듣기 말하기는 할 줄 알았는데 게임 소프트로 익힌 거기 때문에 히라가나 쓰기는 약간 아리까리했죠. 그래도 읽을 줄 아는 글자라 그럭저럭 수업에 따라가면서 명확해졌어요. 교수는 히라가나 전부와 가타가나 대부분을 읽고 쓰고 말하는 법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모두가...그날 처음 보는 척하는 그 언어를 몇시간만에 읽고 쓰고 말할 줄 알게 되었죠.
이쯤에서 옆자리 동기의 얼굴을 슬쩍 봤어요. 당황해하는 표정과 어두운 표정이 섞여 있었어요. 그녀만 뺴고 모두가 처음 보는 언어의 기본요소를 읽고 쓰고 말할 줄 알게 되는 일이 일어났으니까요. 몇시간 만에요.
교수는 계속 시치미를 뗀 채로 '자 이제 이걸로 읽고 쓰고 발음할 줄은 알게 되었죠? 다음 시간엔 남은 가타가나와 주로 쓰이는 어휘와 단어 짤막한 문장 인사법 등을 배워 보겠어요' 라고 말하고 가버렸어요.
저는 늘 그렇듯이 솔로몬에 핵바주카를 막 쏜 가토처럼 학교에서 이탈하려고 하고 있었죠. 그런 저를 동기가 불러 세우더니 '은성씨도 혹시 다 읽고 쓸 줄 알게 됐어요?'하더군요. 여기서 사실을 말해 줄까 하다가...다른 사람들처럼, 세시간전엔 몰랐었던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마스터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오지 말았어야 했던 곳에 잘못 온 그 동기는 수업에 다시는 나오지 않았어요.
2.이게 대학교 얘기와 비슷한 맥락일지는 모르겠는데...살면서 종종 마주치죠. 대단한 척 하는 사람들이요. 어쩌다가 어떤 집단 내에서 그렇게 포지셔닝 된 사람들일 뿐인데 놀랍게도 그런 사람들이 진짜로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믿고 말아요. 냉정한 시선으로 보지 못하면 가끔은 진짜로 속고 말 때가 있죠. 사회에 나와보니 회사에도 그런 사람이 있고 모임에도 그런 사람이 있더군요.
그런 사람을 굳이 기죽일 건 없을 거 같아서 아예 말을 안섞거나 예, 예 그렇군요 하고 마는 편인데 어느날...또 그런 사람 집단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게 됐어요. 저야 어딜 가나 깍두기니 그냥 거기 있었는데 또다시 그 모임의 그런 사람이 발산하기 시작했어요. 말도 안 되는 태도로 말도 안 되는 언설 같은 거요. 되게 이상했어요. 의문이 들었어요. 사람들을 모아놓고 저렇게 으스대려면 디켐이나 브리냑 정도는 사주면서 저래야 되는 거 아닌가? 왜 이 테이블에는 맥주와 마른안주가 올려져 있지? 대학교에서 으스대던 교수는 정교수 타이틀이라도 있지 이 사람은 대체 뭔가?
그 사람을 그자리에서 한번 거꾸려뜨려 보고 싶은 유혹이 뭉게뭉게 들었어요. 두 가지 방법이 있었죠. 지갑을 열거나 입을 열거나요. 휴...하지만 포문을 열려다 간신히 참았어요. 그 사람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공격을 시도했을 거예요.
아 이 잡담은 뉴스를 보다가 또 대학교 신입생들을 카톡으로 위협하는 단국대 대학생들 기사를 봐서예요. 대체 왜그러는걸까요?
예전에 대학교를 다시가고 싶다고 썼고 다시 간다면 주류 대학이 아니라 한적한 곳을 가보고 싶다는 글을 썼었죠. 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 고약한 심보가 발동해서, 누군가가 내게 저런 시비를 걸어주길 바라며 돌아다닐 거 같아요. 시비를 걸어오는 상대에게 '1년에 1억은 벌면서 그러시는 거예요?'라고 대답하는 건 정말 재밌어요. 주위에 관객이 많다면 더 재밌고요.
3.안철수를 좋아하지 않지만 안철수가 무상급식에 대해 발언한 거 보고 박근혜는 저 수준의 반의 반도 안될거란 생각에 기분이 참...
아무리 봐도 이명박과 박근혜의 당선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내구력이 얼마나 강한지 테스트하는 거 같아요. 한국은 저 두 사람이 연달아 대통령을 해도 폭삭 주저앉지 않는 강한 나라라는 걸 자랑스러워해야 하는건지.
2015.03.11 18:48
2015.03.11 19:01
이야기 다 세상이 그렇게 잡다하게 진행됩니다 누구의 삶도.
2015.03.11 19:18
글이 재미있어요~은성님.
2015.03.11 19:26
1. 아 저도 비슷한 이야기 들은 적 있어요... 제2외국어 수강할 때 불어처럼 외고 애들이 많이 오는 수업에 들어가면 어느 순간 나는 봉주르밖에 모르는데 교수님과 주위 학생들이 실전 회화를 하는 현상을 겪게 된다는 전설을.... 전 스페인어를 들었는데 스페인어 1은 재수강해서 그럭저럭 넘겼지만 스페인어 2는 교수님이 처음부터 스페인어를 쓰시며 자기소개를 스페인어로 해보라고 하시는 바람에 드랍했죠. 언젠가 학원이라도 다녀서 마스터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할 수 있게 되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2. 그것밖에 내세울 게 없으니까 저렇게 대단한 척이라도 해야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구나, 불쌍한 사람이다. 쯔쯔...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훔친다)
전 주로 이럽니다. 그런데 사실 전 생각이 없어서 이러는 적은 별로 없어요. 대단한 척 한다는 것을 모르고 그 사람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다 믿어버리거든요. 그런 점을 느끼는 것도 사람에 대한 타고난 감수성이나 잘 벼린 생각이 어느 정도 있어야하나 봅니다.
2015.03.11 20:10
정말 대단한 사람들은 그런 자리에 나와서 시간 낭비를 하지 않습니다. 100%죠. 헷갈릴게 전혀 없음.
2015.03.12 08:35
외국어 중에 일본어가 특히 그런 것 같아요. 하다 못해 일본 애니 드라마라도 보면서 익숙해진 치들이 많이들 들으러 오죠. 제가 저 언급하신 정말 히라가나부터 배우려고 들어간 학생이었는데, 그래도 배워보고 싶었기 때문에 수강철회를 하진 않았지만, 꽤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수는 상당히 낮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2015.03.12 12:08
이 글이 재밌나요? 진심으로요?
1. 왜 동기에게 사실대로 말을 하지 않은건지 그냥 좀 이해가 안가네요. 다른 사람들도 그러니까? 대단해 보이고 싶어서? 둘다 별로 그럴듯한 이유는 아니군요.
2. 디켑이나 브리냑 정도(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주면 개똥철학을 늘어놔도 된다는 얘긴가요? 님이 지갑을 열거나 입을 열면 상대방이 거꾸러 지나요? 님과 그 사람이 뭐가 다른거죠? 알수가 없네요;; 결론이 '나도 너도 참 못난 사람들이다'라는 거라면 이해가 갑니다만..
2015.03.19 15:21
이 댓글도 재밌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