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입니다. 영화일기인데요, 제가 작년 11월부터 쓰기 시작한 겁니다. 사실 이 글을 원래는 페이스북에 쓸까 듀나게시판에 쓸까 고민하다가 전자에 올렸었는데, 후회 막심이었어요. 제 친구들이 기본적으로 영화에 관심 많은 친구들이 별로 없어서요. 지금도 영화일기 계속 쓰고 있는 중인데, 앞으로는 열심히 듀나게시판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ㅎㅎㅎ 일단 이게 나름 맥락도 있고 하니, 1번부터 차근차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선택한 게 페북이었어서 일단 반말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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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1-, 11월 첫째 주. 11월 1일~11월 8일

 

  왓챠라는 어플을 깔고 난 다음, 깨달았던 것은 내가 생각보다 영화를 별로 보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물론, 뭐 양이란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건 책이랑 똑같은 문제다. 나는 다독한다는 사람에 대해 큰 가치를 두진 않는다. 중요한 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의 문제니까. 그래도 내가 생각보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건 마치 제대로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는 몸무게를 꼭 재봐야 하는 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필요한 작업이었다.

 

  어쨌든, 내가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 왓챠를 통해 확인하고 난 다음, 이제부터 영화를 정말 작심하고 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시험 기간 같은 예외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화를 하루에 한 편씩은 보아야겠다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걸 일지처럼 작성하고 공유하는 작업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모르지, 이렇게 쓰다보면 세상에 영화동지가 늘어날 수도!

 

  살짝 언급을 하고 지나가자면, 영화 각각에 대한 자세한 감상은 사실 평글로서 길게 써야 하는 것이 정석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상만을 채취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다음이 11월 첫째 주에 내가 본 영화 목록이다.

 

11월 1일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밤', 루이스 브뉴엘의 '어느 하녀의 일기'
11월 2일 :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
11월 3일 :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11월 4일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 (한국어 제목 : 태양은 외로워)
11월 5일 : 마이클 마키마인의 '콜걸' (스웨덴 영화제)
11월 6일 : X
11월 7일 : 얀 트로엘의 '마지막 문장' (스웨덴 영화제)
11월 8일 : 로만 폴란스키의 '테넌트'

 

  이 정도를 보았다.

 

  날짜별로 정리하자면, 11월 1일에는 시험이 끝난 다음 날이라 집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다. 요즘 내가 빠진 배우가 프랑스 대여자배우 쟌느 모로이다. 쟌느 모로가 나온 두 영화를 11월 1일 날 몰아보았다.

 

  11월 6일에는 안타깝게 영화를 보지 못했다.

 

  11월 5, 7일에는 이화여대 모모에서 스웨덴 영화제를 통해 무료로 스웨덴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감독별로 정리하자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은 정말 예술작품 그 자체였다. 큰 화면으로 정말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이었다. 만약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이다. 그것은 장면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미학의 문제, 그리고 영화의 서사와 그 가지를 통해 스며나오는 정서(내용이라는 단어로 압축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의 문제이다. 그 두 개를 다 이루어내면 그 사람은 예술인이다. 전자에만 도달한 사람은 기술인이고, 후자에만 정통한 사람은 투박한 사람일 수 있다. 어느 쪽이나 예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이미 어떤 한 지경을 찍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장면 호흡은 정말 길고, 주로 풍경화에 가깝다. 인간을 도시의 눈으로 관찰하는 그의 시선은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방황을 찍어낸다. 그리고 종국에 인물이 사라진 그곳에서는 장면을 꽉 채우고 폭발할 듯 이글거리는 일식과 같은 정서가 흘러나온다. 여백의 미를 아는 사람이랄까? '밤'의 마지막 장면, '일식'의 마지막 장면, 특히 '일식'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종종 다시 돌려본다.

 

  코엔 형제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감독들은 아닌데, 그들이 예술인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차원은 아니다. 잘 만든다. 그런데 어떤 지점에서는 사실 취향이란 문제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들은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균형 잡힌 이들이고,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든다. 이들은 웨스 앤더슨과 비슷하다. 그들은 나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정말 잘 만들었다, 라는 말이 나오지만 마음 깊은 곳을 톡 건드리진 못한다. 그런데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는 내가 본 이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았다. 자세히 이야기하면 스포일러니 굳이 더 나가진 않겠지만 예술과 창작에 뜻이 있는 모든 사람의 고통과 고민, 부조리와 모순을 잘 묘사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정말 에스파냐가 낳은 최고의 명감독이다. 그는 특히 여자 이야기를 다룰 때 있어서 상당히 좋은데,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언뜻 산만할 수 있지만 결국은 종점을 향해 가는 길을 착실히 밟는 영리한 영화다. 더 할 말은 없고, 사실 이 사람의 영화는 '귀향'이 정말 좋다. 관심 있는 분 꼭 보시기를.

 

  '콜걸'의 경우는 애매하다. 상당히 투박하다. 문제가 있을 정도로 투박하달까. 장면미학이 독자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감독이었다. 데뷔작이었던 듯 하지만, 훌륭한 감독들은 데뷔작으로도 장면미학을 구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지막 결말은 매우 좋았다. 역시 스포일러에 가까우니 말은 안 하겠지만, 특히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결말이라는 것만 언급하는 정도로 끝내겠다.

 

  얀 트로엘 감독 같은 경우 보고 나서 너무 놀랄 정도로 영화가 세련되었었다. 내가 정말 영화를 하루에 한 편씩 보아야 하는 이유를 절감하게 해준 영화였다.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이러한 수준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들이 있다. 장면미학적으로 이미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해 놓은 감독이었다. 정말 기가 막힌, 만약 판소리였다면 내가 얼씨구 외쳤을 정도로 좋은 장면들이 있었다. 또한 그의 영화적 시선에는 정서가 고밀도로 농축되어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에만 충실한 한 이기적인 남자의 정서를 어찌 그렇게 훌륭하게 짜놓았는지. 감탄만 하면 지겨우니 다시 여기서 줄이는 것으로.

  

  로만 폴란스키의 '테넌트' 같은 경우는 상당히 기대하고 봐서 그런지 기대보단 이하였다. 물론 잘 만들었다. 못 만들진 않았는데, 솔직히 어떤 지점부터는 조금 뻔한 이야기 같았다. 감독의 괴기하고 정신분열적인 정서를 느낄 순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것조차 조금 뻔한 형식과 뻔한 내용 같기도 했다. 다시 보면 평가가 달라질 순 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 본인이 연기를 인상적으로 해낸 것은 소소한 재미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길게 썼다. 사실 작품 하나하나만 따지면 훨씬 더 길어야 하지만 인상 위주라서 이 정도로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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