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에 맘에 안드는 글이 많으면 나라도 영화관련 글을 써야지 하고 적어두던 글의 반쪽만 먼저 올립니다. 후편이 언제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영화감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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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의 영화 중에는 어려서 공중파 TV에서 본 더빙판 명화극장 영화들이 좀 있습니다. 이런 고전 명화들은 요즘 dvd나 블루레이 복원판들이 나와서 근사한 화질의 자막판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죠. 그러나 알만한 명화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출시안되는 영화들도 있는데 이중 하나인 <무도회의 수첩>이 수상한 dvd으로 나왔기에 불법 타이틀은 사지 않는다는 원칙을 저버리고 일단 구입했습니다.

혹시나가 역시나라서 일어자막이 달린 저화질 비디오를 리핑한 위에 한글자막을 얹은 판본이네요. 아마 자막도 일어중역일 거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나 30년전에 TV에서 상영한 이후로 어디서 볼 기회가 없던 터라 반갑게 보았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많은 장면들이 진짜 있었다는게 가장 놀랍고요. 우울한 주제가인 회색의 왈츠는 다시 들어도 좋네요. 주인공을 흠모하는 남자들의 직업이 법률, 정치, 의학, 예술 등등으로 사회를 대표하는 구성이라는 게 보이고요. 각각의 사람들을 만나는 에피소드들이 호러, 스릴러, 코메디, 로맨스 등등으로 장르화 되어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는 것도 다시 보니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처음 보았을 때는 부모님이 주무시기를 기다려 몰래 거실에 나와서 TV를 보느라고 맨 첫 장면-크리스틴이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는 부분을 못 보았는데요. 물론 짐작은 했지만 크리스틴은 꽤 연상이었음이 분명한 부자남편을 전혀 사랑하지 않은 듯해요. 근데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랑 16살에 약혼하고 곧 결혼해서 타향생활을 했다는 건 아무래도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원치 않는 상황에 들어갔다는 의심이 드는군요.

 

영화의 줄거리는 다 아시는 것처럼 젊은 미망인이 된 크리스틴이 첫 무도회 무도회의 수첩의 10명의 남자들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10인중 2명이 작고해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이 8명의 남자들에 따라 장이 나뉘어지고요 각각의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프롤로그

젊은 미망인인 크리스틴은 16살때인 1919년 첫 무도회 수첩을 발견하고 그때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였던 남자들을 찾아 인생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려 합니다. 이중에서 유일하게 소재를 파악하지 못한 제라르를 주인공은 진정 사랑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크리스틴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첫 무도회가 19세기 풍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게 그려지는게 참 맘에 듭니다. 나중에 이것도 허상이었다는게 밝혀지지만 16살 소녀가 처음 데뷔하는 무도회에 대한 추억을 그럴듯하게 재현하고 있거든요. 물론 이 환상의 중심인 제라르의 사랑이 진짜였는지 아닌지 끝까지 밝히지 않은 점도 아주 좋습니다.

, 크리스틴은 40대라고 설명이 많이 나오는데 1919년에 16살이었다면 약 20년 후이자 영화가 제작된 해인 1937년에는 아직 30대입니다. 제가 처음 영화를 본 때가 무도회에 참석한 크리스틴보다 어린 나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제가 지금 영화 속 현재의 크리스틴보다 연상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2. 조르쥬

피에르는 크리스틴의 약혼발표 직후에 권총자살했고 그 충격으로 홀어머니는 아들이 살아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이런 내용을 곧바로 알리지 않고, 피에르의 옛 집을 방문한 크리스틴을 반갑게 맞은 피에르 모친이 크리스틴을 크리스틴의 어머니로 오인하고 자살 당시의 모습(1919 12 19일에 머무른 달력까지)을 그대로 보관한 아들의 방을 보여 주는데서 밝혀집니다. 고향 친구가 죽었는데 크리스틴은 전혀 몰랐다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성한 피에르 모친이 숨겨둔 부고장이 쏟아지는 장면에서 진실이 분명해지죠. 이런 일련의 상황들이 멀쩡한 척 하는 피에르 어머니와 사정을 알면서 말 못하는 하녀, 어리둥절한 크리스틴 사이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호러 영화에서 유령을 발견하는 과정처럼 묘사됩니다. 귀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이지만 무섭다기보다는 슬픈 느낌이 강하고요. 창문 밖 나이든 오르골 연주자가 들려주는 회색의 왈츠는 근사한 배경음악이 됩니다.   

 

3. 피에르

크리스틴이 진짜 사귀었던 남자는 아무래도 이 피에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제는 죠라는 이름으로 법의 헛점을 이용하는 암흑가의 실력자가 되었지만 한때 크리스틴과 시를 낭송하던 법학도였죠. 크리스틴이 죠의 클럽을 방문한 밤이 바로 절도계획이 실패하는 밤이라서 경찰에 연행되면서 체포되는 사람은 피에르가 아니라 죠라고 말한 점이 참 인상적인데요.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혀 변치 않은 사람은 죽은 조르쥬나 죽은 것 같은 결혼생활을 한 크리스틴 뿐이고 청년이던 남자들이 중년이 되면서 얼마나 타락하는지를 보여주는 첫 단서가 됩니다.

피에르가 법망을 피하기 위해 법률지식을 이용해 범죄를 계획하는 부분은 지금봐도 기가막힌데요. 여자가 유혹해서 집열쇄를 받아 들어가면 불법침입이 아니라던지, 야간범행은 가중처벌되니 아직 어두운 일출시간 직후에 범행을 저지르게 시간을 짠다던지 하는 부분은 범죄 영화로서의 묘미를 더합니다.

 

4. 알랭-도미닉 신부

크리스틴의 남자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였던 알랭은 자신이 혼신을 바쳐 작곡한 신곡 발표회에서 크리스틴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걸 깨닫고 아들마저 급사하자 사제가 되어 빈민층 아이들을 돌보게 됩니다. 알랭이 자신을 흠모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던 크리스틴과 이제는 도미닉 신부가 된 알랭이 자기들의 엇나간 사랑이야기를 남의 사연인양 이야기하는 부분은 고풍스러운 옛 로맨스 소설 같은 느낌을 더합니다.

 

5. 에릭

크리스틴을 한때 흠모했던 남자들 중에서 그나마 다시 그녀와 행복을 찾을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남자로 에릭이 등장합니다. 한때 한량이자 바람둥이었던 그는 등반구조자로 활동 중인데 함께하자는 크리스틴의 간청을 뿌리치고 위기에 처한 등반객들을 구하겠다고 나서고, 자신이 에릭의 인생에 우선순위를 차지하지 못한다고 느낀 크리스틴은 다시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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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나머지 6~9까지 남자들과 영화의 결말은 아직 정리하는 중입니다.

참,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이 리핑 DVD는 절대 살 물건이 아닙니다. 불법인건 말할 것도 없고 화질과 자막 모두 엉망입니다. 여기 나오는 대사와 줄거리는 엉터리 자막이 아니라 30년전에 들은 한국어 더빙의 아련한 기억에 의지한 겁니다. (이렇게 적고보니 제가 내용을 제대로 기억했는지 좀 의심스럽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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