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코패스’가 ‘싸이코’랑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입니다만 모든 강력범죄자가 반사회성 인격장애는 아닙니다.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가진 이들이 모두 연쇄살인이나 감금고문 등을 자행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다보니 임상심리학이나 정신의학쪽에선 싸이코패스라는 진단과 용어의 사용 자체에 도리어 더 신중해보이는 모습입니다.

용어의 남용은 결국 오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니까요. 싸이코패스라는 진단이 나와도, 일단은 반론을 하는 것이 적어도

제가 속해있는 학군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이런 기조에 반해 만장일치 싸이코패스 진단이 나왔습니다.

바로 ‘인분교수 사건’의 가해자인 장호현 교수입니다.

 

흥미로운 건 학계에서 이런 만장일치가 터지게 된 계기가 장 교수가 저지른 악행의 잔혹성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학생을 감금해 가족과의 통화시 스피커폰을 통하도록 하고, 아킬레스 건을 끊겠다 협박해 무임금으로 일을 시키고,

그도 모자라 식당 일을 해 돈을 벌도록 하며 무려 억 단위가 넘는 돈을 변호사까지 불러다 공증을 세우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가스로 호흡을 하게 만들고, 자신보다 나이 어린 동료들에게 존칭을 쓰게끔 하고,

고문 과정을 인터넷 실시간 동영상으로 지켜보고, 심지어 자신의 대소변까지 먹인. 이런 일련의 악행이 공개됐을 때만

해도 끝까지 ‘좀 더 살펴보자’던 분들이 많았어요. 그러다 결국 모든 분들이 ‘맞네. 그것도 차마 꿈에서조차 보고싶지

않은 악질 싸이코패스네’하고 확 돌아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피해학생에게 눈물을 보이며 동정심을 유발하는,

〈그것이 알고싶다〉속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장 교수는 피해 학생에게 ‘학교에서도 파면되고 연금과 퇴직금도 못 받게 되고 우리는 악연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저 말은 피해 학생의 죄책감을 유도하는 대사에요. 일단 피해학생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장 교수의 완벽한

폭력 하에 있었고, 그런 상황에 익숙해져있는 피해자에게 상황의 역전은 그 자체로 부적절한 죄책감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싸이코패스들은 절대 녹록하지 않아요. 장 교수는 이미 이걸 압니다. 그래서 ‘악연’이란 말로

 (악연은 권력이 일대 일일 경우에만 이용 가능한 말이죠)자신이 피해자를 감금 고문한 것과

피해자로 인해 자신의 사회적 위상 등이 추락한 것을 동치해 피해자의 죄책감을 증폭시키려 시도한 것이죠.

 

천만다행인 것은 이러한 싸이코패스들의 수단에 속아 엉겁결에 합의를 해 주거나 무고를 적극 주장하는 피해자들도

상당히 많습니다만, 적어도 방송에 나온 피해자의 태도는, 너무나 다행히도 몹시 단호하더란 겁니다. 저는 의료진의

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  언론에서 피해자를 돕고 있는 상담사의 인터뷰를 봤는데, 믿음직하더군요. 피해자의 심리와

거기에 따른 적절한 처방을 정확히 알고 또 몹시 신중하고 진지하게 치료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싸이코패스의 혀놀림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미리 조언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아, 물론 끝까지 그

단호함을 유지할 용기는 피해자의 것이지만요.

 

장 교수 사건에 대해 말이 나온 김에 몇 가지 더 적자면, 인분을 먹인 행위를 성도착으로 보는 선생님들도 상당수

계시는 상황입니다. 저도 대변이 담긴 컵 15회, 소변 20회를 먹이고 먹지 않을 경우 살이 썩어 들어갈만큼의

폭력을 휘두른 그 상황에 매우 잔혹하고 비인간적이며 역겨운 성도착의 기호가 숨어있다고 보고 있어요.

안타까운 건 그렇다고 해서 이를 성범죄로 벌하기 어려운 상황이란 거. 장 교수와 그의 부하들이 그런 과정에서

느꼈을 쾌감은 분명 성적인 것이었는데요.(네, 쾌감을 느꼈을겁니다. 표창원교수도 같은 생각이더라고요.)

 

좀 더 자세히 적자면, 장 교수는 자신의 인분을 자신의 내면에 억압된 온갖 부적절하고 도착적인 욕망과

동일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싸이코패스이자 성도착증 환자로 살려니 내면에 그런 더러운 것들이

오죽이 많았겠습니까. 그리고 싸이코패스의 특성상 그런 부적절한 내면의 악들, 내면의 욕망들을 ‘합리화’

하고 싶었을거에요. (싸이코패스들이 제일 못견뎌하는 기분이 ‘불편한’기분입니다)

즉, 내 내면에 꿈뜰대는 더러운 것들을 ‘인분’이 아닌 ‘먹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려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걸 또 내가 먹기는 뭣하니 남한테 먹인거죠.

 

이 행위를 통해 장호현은 두 가지를 획득합니다. 인분을 먹는 제자를 보며 내 내면의 악이

타당하다는 위안이 하나이고, 두 번째는 병리적 자기애의 충족이죠. 나는 대변조차도 거룩한

사람이라며. 피해자에게 자신의 소변을 ‘포도주’라 이르며 먹도록 하고 대변이 담긴 컵을 ‘특별한

컵’이라 이르도록 했다고 하죠. 기독교 신자에게 포도주는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자신의 소변을

성서 속 포도주의, 그런 의미로 생각하면서 장 교수는 엄청난 흥분을 느꼈을 겁니다. 뭐, 자신의

대변에 대해서는 대놓고 ‘특별하다’고 했으니 더 분석할 것도 없네요.

 

제한된 정보로 너무 많은 것을 읽어내는 것 아닌가, 싶으시겠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의 도착과 반사회적 성향을 드러낸 경우 자체가, 없습니다. 이 쪽 공부하시는 분들이 흥분하는

것도 다 그래서고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장호현의 심리가 아니라 그런 온갖 무자비한

폭력을 삼키며 버틸 정도로 자신의 꿈에 간절했던 피해자의 앞으로이겠죠. 학대 생존자로서의 그의

앞으로가 수많은 위안과 극복의 드라마이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도착과 반사회적

성향을 미친듯이 드러낼 수 있는, 그러고도 정재계까지 건드려가며 승승장구할 수 있는,

여전히, 아직도 장 교수의 세력들이 건재해 관계자들이 모자이크 처리된 인터뷰까지 거절해야

하는 한국 사회를 강하게 규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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