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은 미시마 유키오라는 인물을 제외하고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하자고 들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 의미가 절반으로 줄어버리죠. 그의 문장들은 미시마를 알면 그 말맛과 의미가 훨씬 더 깊어집니다. 쉽게 말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재밌어져요. 그리고 저는 그를 좋아합니다. 이런 제 취향에 대해 누군가가 정치적 공정성을 요구해온다면, 어줍잖은 핑계나 되도 않을 변명 대신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도덕적인 페티쉬는 없다’.

 

그리고 제가 미시마 유키오의 팬으로서 신경숙 씨가 베낀 문장에 짜증이 나는 건, ‘도둑맞았다’는 기분 때문이 아닙니다. 유키오의 문장 속에 꿈틀거리는 그 남자 냄새와 질긴 근육,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촉감 따위의 것들이 싸그리 날아가버렸다는 거에요. 차라리 표절은 흥미로운 스캔들 정도로 봐 줄 수도 있습니다. 멍청하게 베껴놔서 열이 받아요. ‘뭔가 막연하지만 막연하기에 도리어 더 정확한 성적 취향 저격이 누군가에 의해 훼손됐다고 느끼는 순간’의 이 짜증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보며 강렬한 성적 흥분을 경험한 사람이, 조형기가 그레이 역할을 맡은 한국판 〈50가지 그림자〉를 볼 때의 그 짜증 비슷한거라 보심 되겠습니다.

 

특히, ‘흙 묻은 군복을 벗고’를 ‘흙 묻은 얼굴을 씻고’로 베낀 건 정말이지 특정 페티쉬 모욕입니다. ‘군복’을 ‘벗는’것과 ‘얼굴’을 ‘씻는’건 완벽히 달라요. 흙투성이 군복을 벗는 건 오염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불편을 줄이는 행동이고 이 저변엔 비위생 상태를 어느 정도 즐기는 매저키즘이 존재합니다. (미시마의 문장을 ‘군복을 털고’로 번역한 책들도 있는데 ‘터는’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또한 ‘군복을 벗는 것’은 그 자체로 섹스의 연장입니다. 하지만 얼굴을 씻는 건 그건 개뿔 아무것도 아녜요.

 

그리고 미시마의 문장을 갖다 쓰면서 관능, 향기, 청일함, 노래 같은 단어들이 쓰이는 게 이게 말이 됩니까. 이건 젠장 마동석한테 핑크 리본에 꽃무늬 턱받이에 레이스달린 원피스를 입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뭣보다, 미시마의 문장엔 폭주기관차같은 남성과 이에 ‘응하는’여성이 등장하죠. 여기서 성적 자기결정권의 불균형을 언급하고 들면 논점이 완벽히 틀어집니다. 대신 성별을 잠시 내려놓고 발정난 두 마리 짐승으로 이 사내와 여인을 놓고 보면, ‘기쁨을 아는 몸’이란 ‘마조히즘에 눈 뜨는’정도로 해석될 여지가 어느 정도 있어요. 하지만 신 씨가 베낀 문장엔, 정말 신통방통하게도 ‘기쁨을 아는 몸’이란 단어는 똑같이 있는데 이러한 해석의 여지만 싹 빠져있습니다. 그렇다고 원문이 놓친 정치적 공정성을 획득한 것도 아니고요.

 

이런 문제 제기엔 다음과 같은 비판이 가능합니다. ‘표절이라는 사실을 내려놓고 보면, 미시마 유키오가 〈우국〉의 문장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미학을 신경숙이 그대로 갖다 쓸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전 여기엔 이렇게 반론하겠습니다. ‘그래서 신경숙이 그 변주로 구현한 미덕이 뭔데?’적어도 제 눈엔, 신 씨는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을 ‘변주’한 것이 아니라, 그의 문장을 베끼려다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 여러 모로 짜증나는 사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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